![]() |
그러나 골퍼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스가 너무 좁고 짧았다. 부지 10만 평은 요즘 9홀밖에 짓지 못하는 크기다. 홀 수는 16개였고 다시 1, 2번 홀을 돌아 18홀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다 합쳐도 전장이 3942야드에 불과했다.
![]() |
그린은 샌드그린이었다. 초창기 프로골퍼이자 현 코스 설계사인 그린패밀리 대표이사 김학영씨는 “잔디가 아닌 맨땅에 요철을 줄이기 위해 1~2㎝ 정도 모래를 뿌린 형태”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벙커 옆에 고무래가 있듯 청량리 코스의 그린 주변에 고무래가 있었다. 공이 그린에 떨어지면 볼을 들고 고무래로 모래를 평탄하게 한 후 퍼팅을 하고 다시 고무래로 모래를 고르게 해야 했다.
|
경성 클럽이 세계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명코스를 만들 만한 자리로 점찍은 곳은 이왕가의 묘가 있던 서울 뚝섬 주변 군자리 일대 99만㎡(약 30만 평)이었다. 순종의 부인 순명효황후의 묘가 있던 곳으로 26년 순종이 서거하면서 금곡으로 함께 이장돼 당시엔 왕가의 말을 기르는 곳으로 쓰였다.
골퍼들은 군침을 흘렸다. 그러나 이곳을 쓰려면 왕가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주인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영친왕이었다. 1897년 태어난 영친왕은 아버지인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1907년 일본으로 끌려갔다. 영친왕은 순종의 이복형제다.
골프와의 인연도 많다. 일본의 유명 프로인 아카호시(赤星六郞)에게 골프를 배웠으며 일본 왕족과 자주 골프를 했다. 일본 왕족인 부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도쿄 등 명문 클럽의 회원이었고 일본의 클럽 대항 경기에 이왕배를 하사하기도 했다. 경성 클럽의 첫 한국인 골퍼 윤호병보다 먼저 골프를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국 골프의 시조 중 한 명인 것은 틀림없다.
27년엔 1년 남짓한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총독의 안내로 골프를 쳤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에선 왕실 사람들과 함께 골프의 발상지로 알려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즐겼다. 이방자 여사는 회고록에서 “전하가 해외에서의 라운드를 잊지 못했다”고 했다.
해외 여행을 다녀온 뒤 이왕직(일제시대 왕실의 업무를 맡아 보던 기관) 차관 시노다(條田治策)가 군자리의 유릉을 골프 클럽 자리로 달라고 하자 쉽게 응낙한 것도 이해가 간다. 영친왕은 땅뿐 아니라 건설비 2만 엔에 3년간 매년 5000엔씩 보조금도 얹어 하사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한골프협회의 골프 100년사는 ‘한국에도 외국 못지않은 골프 코스가 있어야 하겠다는 영친왕의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고국의 골프 발전을 위해서라고만 보기엔 어색한 면도 있다. 언론인 김을한이 70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인간 이은(영친왕)’에 의하면 그는 왕가의 재산을 퍼줄 정도로 골프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왕가의 얼이 서린 군자리 땅에 자주 들르기 위해 골프장 건설을 허락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기자는 상상한다. 군자리 골프장에 묻혀 있던 순명효황후 민씨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체험하고 아이도 없이 세상을 떠난, 조선처럼 슬픈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총명했던 영친왕은 일본 육군 유년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면서 일본 왕실 근위대의 지휘관이 됐고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간토(關東) 대지진(23년), 순종 서거(26년)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민족의식을 키우기 시작했다. 자신을 ‘농 속의 새’라고 표현했다. 일본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27년 유럽 여행을 간 것도 울분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영친왕은 유럽 여행 중 밀사 사건의 사적지 헤이그에 도착하자마자 “태황제 폐하, 지금 막 헤이그에 왔습니다”라면서 머리를 숙이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영친왕은 고국 땅을 밟을 때마다 군자리 골프 코스를 찾았다. 30년대 초반 어느 날 군자리 코스를 찾은 영친왕을 수행한 조선신문 김정래 기자는 영친왕의 스윙 모습을 촬영하여 앨범 한 권에 담았다. 코스에 나오면 영친왕은 대개 2~3시간 라운드를 했는데 그 표정은 운동을 즐기는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영친왕이 코스에 나가면 군자리 관할인 성동경찰서장이 직접 나와 플레이를 하고 있는 한국인 골퍼들의 접근을 막는 등 경호가 철저했다. 라운드를 마치면 평복 차림으로 나온 이방자 여사와 함께 조용히 수림 사이를 산책하다가 돌아가곤 했다.”(한국 골프 100년사)
30년 설립된 군자리 코스는 전장 6045야드, 파69로 한국의 첫 본격 챔피언십 코스였다.
그러나 군자리 코스는 역사의 영욕을 모두 겪어야 했다. 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나무가 베어지고 군 훈련장으로 변했다. 광복 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코스 복구가 지연되다가 50년 겨우 복원됐지만 이를 기다렸다는 듯 터진 6·25전쟁으로 다시 파괴됐다.
종전 후 코스는 6750야드, 파72의 현대적 코스로 부활되지만 이를 위해 총무처장 이순용이 외자를 빼돌리고 미군 장비를 불법적으로 전용해 나라를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팽창하는 도시의 공원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은 72년 군자리 코스를 폐쇄하고 어린이대공원을 지었다.
군자리 코스는 로열&에인션트(R&A) 세인트 앤드루스 클럽처럼 대한골프협회의 모태가 됐고 프로골프협회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41년 일본 오픈을 제패한 연덕춘과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마스터스에 나간 한장상 등을 키운 한국 골프의 요람이기도 했다. 군자리 코스가 남아 있었다면 왕이 하사한 땅에 왕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로열(royal) 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R&A는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골프를 관장하는 클럽으로 컸지만 군자리 코스는 사라졌다.
영친왕도 해방 후 자신의 땅에 만든 이 코스에서 다시 라운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중장까지 승진했던 영친왕의 입국을 이승만 대통령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적도 없이 미국, 일본을 떠돌던 영친왕은 이승만 하야 이후인 63년 11월에야 깊은 병환 속에서 귀국했고 69년 7월에 타계했다.
세인트 앤드루스 시민들은 올드 코스에 톰 모리스와 그의 아들 톰 모리스 주니어의 영혼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디 오픈 챔피언십을 네 차례 석권한 젊은 골프 천재 톰 모리스 주니어는 1875년 아버지와 한 팀으로 2-2 매치플레이를 하던 중 임신한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는 집으로 달려갔지만 부인과 신생아는 숨을 거둔 후였다. 그해 크리스마스 날 외로운 톰 모리스 주니어도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디 오픈에서 역시 네 차례 우승한 아버지 모리스도 평생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숨을 거뒀다.
군자리 코스가 남아 있었다면 현대의 골퍼들도 영친왕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 후에도 군자리에는 영친왕의 영혼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깊은 밤 바람이 불면 대공원의 동물들은 영친왕의 스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골프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리티시 오픈? NO! 디 오픈 YES! (0) | 2009.07.22 |
---|---|
다스코틀랜드 마지막 원정 골프 (0) | 2009.07.22 |
베니스의 골퍼들, Circolo 골프클럽 (0) | 2009.07.22 |
싱글골퍼를 향한 예산서 (0) | 2009.07.21 |
왓슨이 넘긴 '세월의 벽'… 왜들 난리일까 (0) | 2009.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