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개의 작은 섬들을 400여개의 다리가 연결하고 있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
유럽 전체에서 가장 환상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베네치아가 아닌가 싶다. 베네치아에선 어느 앵글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찍고 보면 모두 화보 탄생이었다. 10m 곤돌라가 미로 같은 수로를 누비는 광경도, 건물과 건물 사이로 연결된 빨래줄 네트워크도, 골목골목 빼곡히 들어선 유리 공예품 샵들도 카메라가 쉴 새 없이 줌인, 줌아웃을 넘나들도록 유인하는 훌륭한 피사체들이었다.
곤돌리에의 구성진 노래 소리가 좁은 수로를 채우고 유리 장인들의 현란한 공예품들이 이방인들의 눈길을 잡고 골목에서 풍기는 피자 냄새는 여행객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을 은폐함으로써 해방감을 만끽하는 수단이었다는 사육제용 가면의 화려함 또한 관광객들의 넋을 빼 놓는다.
화려한 볼거리와 먹거리, 살거리로 관광객들의 지갑을 사정 없이 털어가는 도시 베네치아. 아무리 쇼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물가가 높더라도 베네치아에선 쇼핑 중독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좋아하는 내게 베네치아 골목들은 보물 창고와 같았다. 일주일을 체류해도 너끈히 지루함 없이 보낼 자신이 있었다. 골프 짐들이 워낙 많아 여행 내내 쇼핑을 자제해오던 분위기는 베네치아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 골프는 차마 양심상 기대하기 힘든 아이템이었다. 땅 값 비싼 이 곳에 18 홀 골프장 부지가 왠말이며, 미로처럼 얽힌 수로들 사이에 억지로 18 홀을 구겨 넣는다 하여도 사방이 워터해저드에 18 홀 내내 아일랜드 그린일 것 같은 코스에서 골프 칠 맛이나 나겠는가?
그러나 있었다. 베네치아의 남쪽 끝 섬, 배를 타고 들어가는 그 섬에 조용하고 울창한 파크랜드 스타일의 Circolo 골프클럽(베네치아 골프클럽)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상위 그룹에 랭크되는 이 코스는 그 기원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1928년 미국 Ford 자동차 소유주인 Henry Ford가 베네치아 여행을 왔다. 골프를 좋아하던 그는 당연히 골프클럽을 가지고 왔지만 베네치아 어디에서도 골프장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에는 골프 붐이 일어 어디에서나 골프를 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지 베네치아에 골프장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납득할 수 없었다.
포드는 한 이탈리아 호텔 사업가에게 이런 불평을 했고 이야기를 들은 이탈리아 사업가는 자극을 받았다. 그가 바로 Count Volpi. 베니스 영화제의 창시자이자 수완 좋은 사업가, 다혈질 이탈리아인의 특성을 고루 갖춘 그는 곧바로 베네치아 남쪽 끝 섬 Alberoni를 골프장 부지로 낙점하고 정통 영국식 링크스를 지향하는 코스 건설에 들어갔다.
결국 그 해가 다 가기도 전에 바다와 인접한 사토 위에 부드러운 언듈레이션을 얹은 9 홀의 링크스 지향 코스가 탄생했고 이후 18홀 규모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버드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울창한 수목이 페어웨이를 둘러 싸고 있는 이 코스는 따지고 보면 링크스 보다는 파크랜드형 골프장에 가까워 보였다.
다행히 베네치아라는 지명에서 유발되는 워터해저드 공포는 기우에 불과했다. 8번, 11번, 13번 홀에 걸쳐 워터해저드가 있기는 하지만 애교로 봐줄만한 연못 수준이었다. 오히려 몇몇 도그렉 홀이 더 위협적이었고 페어웨이 나무들의 밀도가 높아 스코어 관리를 위해선 드라이버의 정확성이 관건이었다.
클럽하우스는 원래 부지 내에 있던 1820년대의 건물을 활용했다는데 해자와 가파른 둑으로 둘러쳐진 고대 요새와 같았다. 17세기식 누벽으로 쌓아 올려진 티잉그라운드는 클럽하우스와 어우러져 더욱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골프장도 컨디션도 모두 좋아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은 아직 구입하지 못한 물건들로 갈등하며 골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은 여정 트렁크에서 굴러다니다 깨질 위험이 높아 망설여지는 고가의 유리 제품들을 파손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거금을 들여 도전할 것이냐 말 것이냐… 평탄한 베네치아 골프장은 얼토당토 않게도 ‘베니스의 상인’들로 인해 18홀 내내 도전적인 코스가 되어 버렸다.
'골프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스코틀랜드 마지막 원정 골프 (0) | 2009.07.22 |
---|---|
옛날 골프 이야기 ㉻ 영친왕과 군자리 코스 (0) | 2009.07.22 |
싱글골퍼를 향한 예산서 (0) | 2009.07.21 |
왓슨이 넘긴 '세월의 벽'… 왜들 난리일까 (0) | 2009.07.21 |
톰 왓슨 - '예순살의 반란' 졌지만 행복했다 (0) | 2009.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