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초창기에 역사적인 테마를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해 그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로마로 이주했을 정도다. 고대 로마사를 주제로 한 작품 중에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신고전주의 상징이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이 1790대 프랑스 혁명의 상징물로 이용됐지만 다비드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어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싹 트지도 않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 로마 왕국에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살고 있었다. 로마에 감독권을 행사하던 알바 왕국에 대항해 로마는 반란을 일으킨다.
로마와 알바 왕국는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에 따라 두 왕국에서 세 명의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함으로써 해결키로 합의를 했다. 알바 왕국의 쿠리아티우스 형제 중 한 사람은 호라티우스 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을 했고 쿠리아티우스 가의 딸 사비나와 호라티우스 삼 형제 중 한 사람과 결혼을했다.
싸움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 없이 양쪽 집안은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카밀라는 오빠를 저주한다. 호라티우스의 장남은 로마를 위해 여동생을 칼로 죽인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이 작품에서 손을 뻗어 칼을 잡으려고 하는 남자가 호라티우스 삼 형제이고 그 앞에 붉은 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남자가 아버지다. 그 뒤로 화면 앞에 울고 있는 젊은 여자들은 비극의 주인공들인 사비나와 카밀라다. 여자들 옆에 어머니가 아이들을 껴안고 울고 있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비드는 다섯 번의 도전 끝에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제정한 최고상 ‘로마상’을 수상함으로써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됐다. 5년 동안의 로마 유학으로 다비드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고히 정립한다.
귀국 후 다비드는 로마 고대사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고 그 작품은 성공을 가져다 줬다. 다비드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기희생과 의무·헌신·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을 작품에 표현했다.
살롱전의 성공으로 루브르 내에 아틀리에를 갖게 된 다비드는 왕정 시대 최고의 영예를 버리고 혁명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자코뱅 당의 일원이 됨으로써 막강한 정치적 힘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그는 브뤼셀로 망명한다. 망명지에서 조국 프랑스로부터 귀국 제의를 받지만 다비드는 거절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