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1825년 영국을 여행한 후 영국 연극에 심취하게 됐다. 대담한 영국 연극들은 들라크루아에게 영감을 제공해 줬다.
들라크루아가 바이런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다. 바이런(1788~1824)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는 아시리아 전설의 군주 사르다나팔루스에 대해 쓴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 책자에서 ‘사르다나팔루스는 불에 타 죽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단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환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처첩과노예들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애마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됐던 것이다’고 이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는 선대의 아슈르바나팔, 샤마시 슘 유킨 그리고 신 샤르이슈쿤 세 왕의 성격과 비극적인 운명을 합쳐 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30여 명의 아시리아 왕 중에 마지막 왕으로서 왕들 중에서 가장 방탕한 인물이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폭정에 못 이겨 반란이 일어났다. 사르다나팔루스는 세 번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유프라테스 강이 범람하자 싸움을 포기한다. 그는 적에게 포위당하자 신하와 첩, 노예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화면 중앙 붉은 침대 시트 위에 누워 있는 남자가 사르다나팔루스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살해당하는 여인들을 음미하고 있다.
화면 맨 앞에 있는 아름다운 노예는 목에 칼이 찔려 죽음을 당하고 있고 사르다나팔루스 침대 위의 여자 노예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엎드린 채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보이고 누워 있다.
들라크루아는 바이런의 희곡 외에 사르다나팔루스의 운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고대 문헌에서 얻은 지식으로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바이런의 희곡에서는 사르다나팔루스의 노예와 처첩들, 그리고 동물들까지 학살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살롱전 개막일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개막 3일째 되는 날 전시한다. 이 작품은 출품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 이 작품은 낭만주의 회화로서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