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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문하는 천주교 솔뫼·해미성지

惟石정순삼 2013. 6. 12. 07:32

박해 속에 핀 '신앙의 꽃'… 아픔 서린 순교의 흔적 고스란히

교황 방문하는 천주교 솔뫼·해미성지
솔뫼, '신앙의 못자리' 김대건 신부 생가엔 수백년 소나무 숲이 슬픔 곱씹는 듯
해미, 이름모를 신자들 피로 물든 읍성… 잔혹했던 생매장의 역사 생생
  • 우리나라 현존 읍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은 내포 지역의 동학운동, 한말의 의병 활동, 천주교 박해 등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 당진시 우강면에 자리한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1822~1846)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대한민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 해미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0년 박해 기간 동안 해미에서는 수천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떠밀려 생매장당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드나들었던 이수광이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예수회 소속의 이탈리아 신부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중우론' 등을 소개한 것을 그 시발로 보기 때문이다. 이수광과 동시대 사람인 허균도 베이징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다.

이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1700년대, 성호 이익 등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일며 안정복·권철신·권일신·정약전·정약종·정약용·이벽·이승훈 등을 통해 잠시 세를 확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천주교는 집권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고난과 순교의 길을 반복하는 부침을 겪었다. 천주교가 박해에서 벗어나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의 일이다.

1989년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25년 만에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 천주교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교황은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성지, 서산시 해미성지 등을 찾을 예정이다. 이번주 나들이에서는 교황의 방한을 즈음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예정인 충청남도 일대의 천주교 성지를 살펴봤다.

◇솔뫼성지=당진시 우강면에 자리한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1822~1846)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대한민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솔뫼성지에서 솔뫼라는 이름은 울창한 소나무숲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50세에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가 전래된 곳이다. 이후 김진후는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해미감옥에서 10여년간의 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김진후 순교 이후 2년 뒤에 그이 셋째 아들 김한현, 다시 23년 뒤에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 다시 7년 뒤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이곳이 '신앙의 못자리'라고 불리는 이유는 32년간 4대에 걸쳐 순교자가 이어진 처절한 역사 때문이다.

솔뫼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김대건 신부가 살았던 옛집이 복원돼 이곳을 찾는 객을 맞고 있다. 입구에서 왼편 언덕으로 오르면 소나무 숲 안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수령이 200~300년가량인 소나무들은 순교의 슬픔을 곱씹기라도 하는 듯 김대건의 동상을 에워싸고 굽어보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붉은색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김대건기념관이자 성당이다. 기념관에는 충청도 지방 가톨릭 역사와 김대건 신부의 유품과 유골을 전시해놓고 있다.

■주변 볼거리

삽교호함상공원(041-363-6960), 왜목마을

■ 맛집

태공수산(간재미, 041-353-6544), 해안선횟집(활어회, 041-353-6757)

소들강문(버그네순례길향토밥상, 041-363-9494), 길목식당(한식, 041-363-5505)

◇해미순교성지=해미읍성은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충청도 서해안 방어를 위해 세워진 성에는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고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 동안 천주교도를 처형한 옥사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대박해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해미성지다. 박해 때뿐 아니라 해미읍성에선 지속적으로 충청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였다. 읍성 내의 감옥터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을 매달아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 가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해미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0년 박해 기간 동안 해미에서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떠밀려 생매장당했다. 이 기간 해미읍성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해미읍성과 순교지를 둘러보았다면 생매장 순교성지라 명명된 여숫골에 들르는 것도 좋다. 이곳은 해미천 좌우 주변으로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1,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해미순교성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은 1985년 해미본당 설립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제는 단장을 마치고 천주교 신자들과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8년)에 기존 예산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도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의 이전으로 조성된 해미읍성은 원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였다. 헌종 13년 개축 이후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춘 해미읍성은 면적이 19만4,102㎡이며 둘레는 약 2㎞에 이른다. 읍성에는 동문과 서문·동헌·어사·교련청·작청·사령청 등의 건물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 현존 읍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은 내포 지역의 동학운동, 한말의 의병 활동, 천주교 박해 등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루하루가 역사의 더께처럼 쌓여 있는 곳이 바로 해미읍성이다.

■주변 볼거리

서산 마애삼존불상(041-660-2538), 개심사(041-688-2633), 간월암(041-668-6624)

마늘각시(한정식, 041-663-8283)

■ 맛집

읍성뚝배기(소머리곰탕, 041-688-2101), 진국집(게국지백반, 041-665-7091), 명성식당(꽃게장, 041-665-2981), 토담골(우럭젓국, 041-669-5547)

/당진=우현석객원기자, 사진제공=충남도청

 

한국천주교 신앙의 출발점 ‘솔뫼성지’를 찾다

 

 

2014년 06월 11일 (수) 12:00:31 정현경 기자 sevi@newscj.com
   

▲ 솔뫼성지는 소나무가 산을 이뤘다는 뜻으로 성지에는 수령이 200~300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솔뫼성지 내에 있는 한국천주교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동상 앞에서 순례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생가터… 4대에 걸친 순교
근처 합덕성당‧신리성지 등 잇는 버그내 순례길 조성 

 

[천지일보=정현경 기자] 오는 8월 14~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1984년과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 25년 만의 교황 방문이기도 하고, 파격적 행보와 소탈한 모습으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에 오기 때문이다.

교황청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밝힌 공식 방한 목적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석이다. 교황은 입국 다음 날인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충남 당진 솔뫼성지를 찾는다. 이어 17일에는 아시아 주교회의 참석을 위해 충남 서산 해미성지를 방문하고 해미읍성에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다.

교황이 방문할 솔뫼성지와 해미성지, 해미읍성 등은 초기 천주교가 박해받았던 곳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당진, 서산, 홍성, 예산 등 충남 북서쪽 평야지대인 내포지방은 한국천주교에 있어 각별한 곳이다. 내포(內浦)는 바다가 뭍으로 휘어들어간 부분으로 예로부터 물과 통하는 지역이라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프랑스 사제들은 바닷길을 따라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고 이 지역에 천주교 교리를 널리 퍼트렸다. 신자가 많았던 만큼 박해도 컸던 곳이다.

한국천주교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솔뫼성지를 미리 찾아가 봤다.

   
▲ 김대건 신부의 복원된 생가.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김한현), 아버지 김제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천주교 신앙의 시작점

소나무가 많아 산을 이뤘다는 뜻의 솔뫼성지(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6호)는 수령이 200~300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가 태어나 7살이 되던 해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으로 옮길 때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본명 김한현,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김제준(1839년 서울 서소문밖에서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았으며,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현장서 발굴된 기와조각 등을 토대로 고증을 거쳐 2004년 생가를 복원했다. 이 외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성당 및 기념관, 솔뫼 아레나(원형공연장 겸 야외성당), 십자가의 길 등이 있다. 성지 가득한 소나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곳으로 순례객과 관광객을 위해 잘 꾸며놓았다.

김대건 신부는 16세 때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5년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하다 1년여 만에 군문(軍門)효수형(목을 베어 군문에 높이 매달아 놓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 살이었다. 김 신부는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에 맞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때 시성(諡聖)됐다. 김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와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은 이번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에서 시복(諡福)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관의 진윤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김종한의 세례명을 따른 것으로, 모범적이었던 작은 할아버지의 신앙의 열성을 본받고자 함이었다”고 설명했다. 진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그의 가족이 있었던 솔뫼성지는 한국천주교 신앙의 탄생지이자 시작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솔뫼성지 내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관 앞에서 진윤기 토마스 아퀴나스 보좌신부가 김대건 신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의 카타콤바 ‘신리성지’

솔뫼성지 근처에는 합덕성당과 신리성지 등이 있어 이들 성지를 걸어서 순례할 수 있는 버그내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내포 지역의 첫 성당인 합덕성당(충청남도기념물 제145호)은 1890년 예산 양촌성당에서 출발해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1929년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됐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으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로 지었으며,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충남지역 천주교의 중심지 내포 공동체는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특히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는 신리성지(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 충청남도기념물 제176호)는 400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으로, 삽교천 수계를 통해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었다.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는 등 한국천주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가 손자선의 집에서 수년간 거처하던 곳이다.

현재 당진시는 솔뫼성지 성역화사업, 신리성지 정비사업, 버그내 순례길 조성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교황 방문을 계기로 이 일대를 문화 관광지로 조성하고 있다.

   
▲ ‘조선의 카타콤바’로 불리는 신리성지는 신앙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으로, 다블뤼 주교가 기거했던 곳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