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묘는 서울 노량진 노들역부근에 있는 사육신(死六臣)의 무덤이다.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숙종 17)년에 민절서원을, 1782(정조 6)년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955년에 서울시가 이 자리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수축(修築)하였다.
원래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만 묻혀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河緯地), 류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가 추봉(追封)되어 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협조했던 43명을 정난공신에 봉하였다. 2년후 수양이 왕위를 찬탈하고 임금이 되어
왕권을 강화하자 관료지배 체제를 구현하려던 신하들이 반발하며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김질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여 죽임을 당하는데 이들중 주모자인 6명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처음엔 이들도 세조의 편에 서서 단종을 몰아 내는데 협조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1978년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9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
홍살문과 불이문(不二問),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사육신묘 입구에 들어서면 홍살문이 있고, 불이문을 지나면 의절사가 있는데,
사당 왼쪽에 신도비각, 오른쪽에 육각 사육신비가 건립되어 있다.
매년 10월 9일에 이곳 의절사에서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
의절사에는 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의절사를 돌아가면 7기의 묘소가 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울 때는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으며 이들이 누구 누구라는 것까지도
달달외워 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생생한데 사육신 묘에는 7분의 위패와 묘소가 안장되어 있다?
사육신은 생육신중의 한분인 남효온이 쓴 추강집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기록된 사람들은 성삼문, 이개, 하위지, 박팽년, 류성원, 유응부 6명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김문기의 후손들이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단종 복위운동을 벌인 것으로 나온다"고 주장하며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할 것을
주장함에 따라, 1977년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왕조실록"을 확인한 결과 김문기 등 6명이
세조시절 가려진 육신(六臣)이라고 판정된다"며 "김문기를 현창(顯彰)한다"고 발표하였다.
1978년에는 사육신묘역에 김문기 가묘(假墓)가 추가되어 현재 사육신묘에는 7기의 묘소가 있다.
문제는 동작구가 사육신의 충절정신을 기리고 영상교육, 고문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단종충신역사관'을 건립하였으나, 사육신에 김문기의 포함여부를 놓고 후손들의 다툼때문에
2011년 7월 문을 연지 20일 만에 잠정폐쇄된 후 지금까지도 개관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육신(死六臣)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려다가 전시 범위를 확대하여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킨 32명의 충신을 다루면서 역사관의 이름을 바꾼 것이 문제가 되었단다.
사육신 외에 '일곱 번째 사육신'으로 불리는 김문기 당시 공조판서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사육신수호회는 "역사관 명칭을 사육신역사관으로 되돌리고,
기존 사육신 여섯 분만 모시라"며 농성을 벌이고, 김문기 후손들은 "사육신만 모셔야 하고,
사육신에는 김문기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또한, 사육신수호회는 "500년 동안 사육신은 유응부였지 김문기가 아니었다"고 반발하고 있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과 농성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가지로 사육신에 대한 역사관에
혼란을 주고 있고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건립한 역사관도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민간단체의 힘겨루기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부기관에서 명확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지?
우리집옆에 사육신묘가 있어 자주 산책을 가고 있는데 아직도 굳게 닫혀있는
단종충신역사관이 안타까워 이 글을 올려본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궤고 팔이 잘려나가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끝까지 '나리'라고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모두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을 당하였다. 류성원은 부인과 함께 집에서
자살하였고 김문기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세조마저도 이들을 두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단다.
사육신이든, 사칠신이든 이들의 충절을 올바르게 후세에 전하는 역사의식이 중요한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충절을 지켰다고 하면 역사교육에 더욱 좋은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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