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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하동이야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36) 김병걸-이호섭의 ‘다함께 차차차’-(42) 김다인-백년설의 ‘고향설’

惟石정순삼 2013. 2. 28. 06:59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10분 작사-10분 편곡으로 탄생한 명곡… 전국 곳곳 ‘차차차 노래방’ 선풍적 인기

(36) 김병걸-이호섭의 ‘다함께 차차차’
1991년 여름. 안양에 위치한 오아시스레코드사 2층 A 스튜디오. 편곡자 송태호의 손을 떠난 20인조의 편곡 스코어는 졸속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최고의 편곡자로 등극하는 송태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드디어 ‘다함께 차차차’의 연주 순서가 되고 연습용 합주가 시작되었다.

퍼스트 기타를 치는 백전노장 이유신이 장미 담배를 입 안에서 빙빙 돌리며 키득대기 시작했다. “쨘쨘쨘 짜란짜라쨘 쨘쨘쨘 짜란자라자 짠짠짠.” 악사들 모두 박장대소, 지독한 복고 풍에 조금은 촌스러운 전주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녹음 당일 녹음실에서 연주 한 시간 전에 작곡자 이호섭한테서 건네받은 곡조를 당혹해하며 송태호는 담배 한 대를 물 겨를도 없이 오선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며칠 전에만 악보를 주었더라면 지금의 전주와는 다르게 편곡됐을지도 모른다.

악사들은 웅성웅성하며 이 노래 참 재미있다며 약간은 조소를 보냈고 곡을 쓴 이호섭과 작사를 한 김병걸은 “그래 웃어라 두고보면 알 일”이라며 마음을 달랬다.

‘두고보면 알 일’이 기어이 일어났다. 이 노래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전국에 ‘차차차 노래방’과 ‘차차차 노래연습장’ 등 다함께 차차차의 열풍은 영업장 상호에까지 파급되면서 그 인기를 입증했다. 이호섭이 건넨 악보에는 “아무리 돈돈하는 세상이지만~”으로 시작되는 가사가 붙어 있었고 이호섭은 중간에 “근심을 털어 놓고 다함께 차차차/ 슬픔을 묻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이 대목은 건드리지 말고 앞뒤를 완성해 달라고 김병걸에게 주문하였고 녹음실 소파에 앉아 10분 만에 가사를 메웠다.

‘어차피 잊어야 할 사랑이라면/ 돌아서서 울지 마라 눈물을 거둬라/ 내일은 내일 또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 꺼야/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잊자 잊자 오늘만은 미련을 버리자/ 울지 말고 그래 그렇게/ 다함께 차차차/ 어차피 돌아서 간 사람이라면/ 다시는 생각 마라 눈물을 거둬라/ 내일은 내일 또 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 꺼야/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슬픔을 묻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잊자 잊자 오늘만은 미련을 버리자/ 울지 말고 그래 그렇게/ 다함께 차차차.’

“그래 그렇게”는 어떤 모습을 말하는 걸까. 또 “다함께 차차차”는 어떤 행위일까? 굳이 설명 안 해도 여러 뜻을 안고 있는 이 결구는 쉬운 듯 하지만 고도의 표현이다. 이처럼 안성맞춤의 마무리가 어디 있을까. 과연 김병걸이었다. 미련을 떨치고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 노력하는 자세가 이 시대에 필요치 않을까. 정적이던 설운도를 동적인 가수로 탈바꿈시킨 국민가요 ‘다함께 차차차’는 10분 작사에 10분 편곡으로 가히 기적을 일궈낸 명작 중 명작이다.

설운도는 1983년 이산가족의 재회를 열망하는 ‘잃어버린 30년’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 노래를 부를 때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반드시 히트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내놓은 여러 음반이 고전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키운 매니저가 공백을 가져 오는 등 수난을 겪었다. 더구나 전속사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지구레코드사로 옮겼으나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길러낸 오아시스레코드사로 리턴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부터 설운도는 자신이 직접 곡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근무하던 김병걸과 한남동에서 이웃하며 ‘원점’을 콤비한 이호섭과 셋이 의기투합하여 취입한 작품이 바로 ‘다함께 차차차’이다.

1980년대 중반은 김병걸, 이호섭 이 두 명콤비의 화려한 출현을 알리는 시기였고 이 두 사람은 ‘다함께 차차차’ 외에도 편승엽의 출세작인 ‘찬찬찬’과 요즘 대세인 강 진의 ‘삼각 관계’ 등 주옥 같은 히트송을 연이어 쏟아낸다.

문희옥의 ‘사투리 디스코’ 시리즈와 주현미의 ‘짝사랑’ ‘어제같은 이별’ ‘추억으로 가는 당신’, 박남정의 ‘사랑의 불시착’ 등의 히트곡을 작사하여 주가를 높이던 이호섭과 서울시스터즈의 ‘청춘열차’와 MBC강변가요제 이순길의 ‘끝없는 사랑’, 미소년 박혜성의 ‘도시의 삐에로’, 장은숙의 ‘사랑하는 내곁에’ 등 일련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던 김병걸, 이 둘은 손을 잡고 작사가 이호섭을 작곡가로 변신시키며 합작한 데뷔작 ‘다함께 차차차’로 초구에 홈런을 쳤다.

이 당시는 메들리 붐이 일어나 메들리 음반을 만드는 그 자체가 돈이던 시절이었는데 모든 메들리음반의 머리곡은 단연 ‘다함께 차차차’였다. 거리마다 리어카에서 파는 비품 음반에도 첫곡으로 수록되어 이 나라 구석구석을 ‘다함께 차차차’로 울렸다.

 

내달 3일 KBS 가요무대 ‘정두수 특집’

문화일보 ‘가요따라 삼천리’ 연재
김고금평기자 danny@munhwa.com
오는 2012년 12월 3일 오후 10시 방영되는 KBS 1TV ‘가요무대’는 ‘정두수 특집’ 편으로 꾸며진다. 정두수(75)는 지금까지 3500여 편의 시와 가사를 통해 국내 대표 가수들의 국민 작사가로 이름을 떨친 가요계의 산증인이다.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들고양이들의 ‘마음약해서’,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번 특집 방송 ‘가요 산맥’에서는 이미자, 남진, 문주란, 하춘화, 진송남, 김연자, 김상진, 여운, 김용임 등 가수들이 대거 출연해 정두수가 작사한 노래들을 재음미한다.

정두수는 4권의 시집을 비롯해 ‘알기쉬운 작사법’ ‘한국 가요 걸작선 해설’ 등의 저서도 내놓았다. 또 전국에서 가장 많은 노래비(13곳)가 세워진 작사가로 기록되기도 했다. 현재 문화일보에 ‘가요따라 삼천리’를 연재 하고 있는 정두수는 가사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시대 대중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는 “해맑은 고향 하동이 나를 이렇게 키웠다”며 “모두 고향의 은혜”라고 말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겨울바다서 스치듯 만났던 여인 못잊어 그리움에 지쳐 詩 되었네
<37> 이미자의 ‘그리움은 가슴마다’와 ‘못잊을 당신’

이미자의 노래가 히트한 뒤 만들어진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 포스터.
1965년 말. 나는 겨울 바닷가로 나갔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송년회’다 ‘망년회’다 하여 열리는 술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몇 잔 하는 게 고작. 그것도 진통과 산고를 치르는 창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충동이었다. 망망대해, 동해 바다는 드넓었다. 이제 나는 짙푸른 겨울 바다에 안겨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된다. 그리하여 몇 번 왔던 어부의 집으로 들어섰다. 며칠 묵고 가기 위해서였다.

겨울 바다는 한적했다. 그야말로 종일을 가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적막하고 고즈넉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황혼녘이면 나는 무료한 나머지 독서를 하거나 해변을 거닐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바닷가를 거니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 여인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호젓이 거닐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지만 그 여인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여인이 혼자인 줄을 몰랐다.

그 이튿날도 다음 날도 황혼녘이면 혼자서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을 보고서야 동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묵고 있는 집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혹시 저 여인을 아십니까? 어느 집에서 투숙하고 있기에 이맘때면 저렇듯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지?”

“알다마다요. 대학에 다닐 때부터 겨울이면 이 어촌에 왔거든요. 3년 전에는 약혼자와도 다녀갔는데….”

집주인의 말에 나는 퍼뜩 스쳐가는 여인의 불행이 떠올랐다. 혼자가 된 여인에게는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이날 밤. 나는 다음 날 황혼녘을 기다리면서 겨우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내일이면 그 여인을 다시 볼 수 있었기에…. 하지만 다음 날 그 여인은 해변에서 볼 수 없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여인은 떠난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 여인으로 하여 공허해졌다. 그러나 내 술잔에는 차고 넘치는 게 있었다. 노래시였다.

‘생각하면 그 얼마나 꿈같은 옛날인가/그 세월 잃어버린 서러운 가슴/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워하면서도/입술을 깨물며, 당신 곁에/가지 못하오. 옛 추억의 하루해는 오늘도 저물건만/그 세월 잃어버린 사무친 가슴/장미꽃은 시들어도 사랑은 별과 같이/영원히 비춰도 당신 곁에/가지 못하오.’

‘못 잊을 당신’이라는 노래시를 쓴 다음 나는 다시 한 편의 노래시를 쓴다. ‘그리움은 가슴마다’였다.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으로 내 가슴에 다가섰던 여인.

‘애타도록 보고파도 찾을 길 없네/오늘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그리움만 쌓이는데/밤하늘에 잔별 같이 수많은 사연/꽃은 피고 지고 세월이 가도/그리움은 가슴마다 사무쳐 오네. 꿈에서도 헤맸지만 만날 길 없네/바람 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서러움만 쌓이는데/밤이슬에 젖어드는 서글픈 가슴/꽃이 다시 피는 새봄이 와도/그리움은 가슴마다 메아리치네.’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그래서 가슴이 저미도록 못 잊어 하는 게다.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 한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김지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못 잊을 당신’에서 이미자가 부른 이 노래는 감미로우면서도 애절했다. 마치 샘물이 철철철 넘치듯 맑은 음색과 성량. 한마디로 신선하면서 정갈했던 것이다. ‘그리움은 가슴마다’ 또한 정감으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사랑은 그리움이며, 기다림 그리고 외로움이기에.

나는 어촌에서 며칠 묵는 동안, 두 편의 노래시를 더 쓰게 됐다. 우연히 만난 그 여인으로 하여 노래시가 샘처럼 솟아났던 것.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내 어이 사랑했나 상처 준 그 님을/이렇게도 애태우며/사랑하고 있어요, 언제까지나/사모하고 있어요, 영원토록/당신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옛날엔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고/대답해 주세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내 어이 믿어왔나, 돌아선 그님을/꿈에도 잊지 못해서/그리면서 살아요, 마음 다 바쳐/기다리고 있어요, 언제까지나/당신 곁에만 있게 해 주세요/옛날엔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고/대답해 주세요.’

나는 그 여인이 거닐던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대답해 주세요’를 썼다. 이후 나는 이미자에게 ‘한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석양’ ‘삼백리 한려수도’ ‘자주댕기’ ‘그때가 옛날’ ‘정착지’ ‘정든 섬’ ‘황혼의 블루스’ ‘비에 젖은 여인’ ‘고향의 꿈’ ‘가을 초’ ‘꽃잎은 외로워도’ ‘네온의 블루스’ ‘타국에서’ 등 많은 노래를 함께 하면서 콤비의 두터운 성을 쌓기에 이른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입대 전날 작사… 전방서 노래 들어… 女가수 목소리에 초소서 외친 ‘윤희’
(38) 차경철-박재란의 ‘님’

‘창살 없는 감옥’을 타이틀로 영화가 만들어진 박재란의 노래 ‘님’ 앨범재킷 사진.
“와아, 와아, 우우….”

어느 전방부대 연병장에선 한겨울의 칼바람을 가르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연예인 위문 공연단이 쓸쓸한 전방을 찾아온 것이다.

1961년 겨울 당시 인기 정상의 가수 박재란(본명 이영숙·천안 태생) 일행은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병들과 어울려 하나가 됐다. ‘맹꽁이 타령’‘푸른 날개’‘럭키모닝’ 등 발랄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그녀는 미모에다 사근사근한 폼, 그리고 나긋나긋한 말씨로 장병들을 열강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연신 앙코르가 터져 나오고 그때마다 박재란은 두 말 없이 무대에 다시 섰다.

“저는, 오늘 장병 여러분들께 신곡 ‘님’을 선사하기에 앞서 이 노래의 작사가 차경철 선생님을 한번 찾아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부탁을 올립니다. 차 선생님은 2년 전에 입대하면서 이 애절한 가사를 만들어 작곡가 한복남 선생님께 보냈습니다. 지금쯤 아마도 차 선생님께서는 상병이 되셨겠네요. 여러분! 되도록 이 노래를 많이 불러 주셔요. 바로 여러분의 동료가 작사가란 걸 기억해 주시고…. 아울러 이 박재란이도 많이 사랑해 주셔요. 호호호….”

장병들은 작사가가 같은 동료라는 소리에 더욱 더 열광했다. ‘육군장병’이라는 말은 공감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병든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서로 만나 헤어질 이별이건만/맺지 못할 운명인 걸 어이하려나/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 /애달피 울어봐도 맺지 못할 걸/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바로 이 시각에 이 노래의 작사가 차경철(본명 차익준) 상병은 보초를 서며 박재란이 부르는 ‘님’을 스피커를 통해 듣고 있었다. 전방의 싸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차 상병은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윤희와의 추억은 그를 끝내 울게 만들었다. 그는 바람에 서걱대는 잡초 주위를 맴돌며 ‘윤희야! 윤희…’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차익준의 고향은 경남 울주. 윤희와는 소꿉친구. 둘은 한 마을에 살며 십오 리 솔밭 길을 함께 걸어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직물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차익준은 부산으로 가 부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윤희는 울산여중으로 가고.

당시 중학교는 6년제, 두 사람은 방학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었다. 방학 때 만나면 그들은 태화 강변이나 칠암포 바닷가를 찾았다. 무슨 사랑이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어느덧 ‘연인’이었다. 차익준은 본디 말이 없는 데다 문학도여서 고작 푸시킨의 시나 읊어주고 윤희는 그저 듣기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중학을 졸업한 그는 문학을 계속하고 싶어 서울대 국문학과에 원서를 디밀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손자의 진학을 말렸다. 외동아들인 차익준의 아버지가 고향에 머물지 않고 객지로만 떠도는 걸 못마땅해 하던 할아버지는 손자만은 고향에 눌러 앉혀 결혼도 시키고 증손자도 보고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삼대독자. 그래서인지 손자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차익준이 어릴 때부터 무릎에 앉히고 ‘초한지’며 ‘삼국지’ 등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손자의 ‘호연지기’를 키워 주었다.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친구의 손녀딸을 손자의 색싯감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어른들끼리의 정혼은 당시로선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차익준은 대학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그와 윤희는 술에 수면제를 타서 같이 마시기도 여러 번 했으나 그때마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가눌 길 없어 군대에 자원입대키로 했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이기에.

입영열차에 타기 하루 전날 밤. 그는 밤새워 술을 마시며 ‘님’이란 가사를 썼다. 이튿날 이 노래시를 부산 아미동에 있던 도미도레코드사의 한복남에게 부쳤던 것이다. ‘님’이란 노래는 대 히트를 하며 영화 ‘창살 없는 감옥’을 낳게 했다. 이 노래비는 그의 고향 경남 울주군 온양읍 대운산 앞에 서있다.

‘원통하게 죽었구나, 억울하게 죽었구나/몸부림친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마산 시민 흥분되어 총칼 앞에 싸울 적에/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남원 땅을 떠날 적에 성공 빌던 어머니는/애처로운 주검 안고 목메어 슬피 울 때/삼천 겨레 흥분되어 자유 민주 찾으려고/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손인호가 부른 ‘남원 땅에 잠들었네’의 이 노래는 3·15 부정 선거를 항의하다 숨진 당시 고등학생 김주열 열사의 고향이 전라북도 남원이기에 그런 것. 이후 마산 시민들은 순국의 넋을 기리기 위해 ‘3·15 성지’에 노래비를 세웠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호언장담 뒤 떠오르지 않던 曲想… 연애시절 아내와의 이야기서 탄생
<39> 손석우-손시향의 ‘검은 장갑’

‘검은 장갑’이 수록된 가수 손시향의 앨범재킷 사진.
1958년 1월. ‘검은 장갑’의 작사 작곡가 손석우는 이날 KBS 신년 특집방송을 마치고, 방송국의 전속 가수들과 어울려 ‘산길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환담을 즐기고 있었다. KBS는 당시 남산에 있었고 ‘산길 다방’은 그 맞은편에 위치했다. 손석우는 이때 KBS 악단장으로 음악에 대한 젊은 날의 열정을 신인가수 발굴과 작품에다 쏟았다.

방송국 주제가 1호인 조남사 작사 ‘청실 홍실’을 작곡해 송민도, 안다성 듀엣으로 부르게 했다. 이 밖에도 ‘꿈속의 사랑’ ‘물새우는 강언덕’ ‘청춘 고백’ ‘즐거운 잔칫날’ ‘그러긴가요’ ‘검은 스타킹’ ‘청춘 목장’ 등 실로 많은 가사와 작곡을 그는 썼던 것이다.

특히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에 가수 현인이 그 화려한 창법으로 부르던 중국인 양악음 작곡인 ‘몽증인’을 손석우는 ‘꿈속의 사랑’이란 가사를 붙여 널리 애창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손석우의 음악적 재능과 진면목은 ‘눈이 내리는데’ ‘꿈은 사라지고’ ‘내 고향 진주’ ‘나 하나의 사랑’ ‘이별의 종착역’ ‘노란 샤쓰의 사나이’ ‘우리 애인 올드 미쓰’ ‘내 사랑 쥬리안’ ‘우리 마을’ ‘석양의 밀감밭’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상업성을 탈피한 건전하고 밝은 내일의 우리 가요를 지향하기 위해, 손석우는 이때 그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KBS가 해마다 발굴하는 신인 가수 선발에 기대를 걸었다.

이날, 남산 ‘산길 다방’ 창밖으로 신년 벽두의 분위기를 장식하는 함박눈이 진종일 내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노래의 화제로 옮겨졌다. 노래의 패턴을 보다 음악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싶어하던 손석우는 동료들의 화제가 노래 쪽으로 모아지자, 갑자기 그의 목소리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묵한 성격의 그도 노래에 관해서는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 어디 그림으로 예를 하나 들어 보자구. 그림이 되는 소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 쓰레기 더미도 그림으로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문제는 우리 일상생활을 어떻게 예술성으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거지.”

평소의 신념을 피력하던 손석우의 눈길이 앞자리에 앉아있는 가수 김성옥에게로 갔다. 김성옥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

“김성옥이 끼고 있는 ‘검은 장갑’도 바로 노래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거야.”

함박눈을 맞으며 이날 집으로 돌아온 손석우는 집에 와서도 ‘신길 다방’에서 그가 한 말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검은 장갑을 노래로 만들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한 것이 어쩐지 쑥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신중히 생각해서 말해야 하는 건데 내가 좀 말이 앞섰어. 그러나 어쩌랴! 이미 장담한 약속인 걸! 요는 검은 장갑의 노래를 만들어 내는 일만 남은 거다….

일단 오선지에 ‘검은 장갑’이라고 크게 써놓았다. 하지만 시상이나 곡상이 좀처럼 떠오르지를 않았다. 먼저 가사가 나와야 멜로디도 쉽게 진행 되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내 최의덕이 차를 끓여 와서는 피아노 위에 놓으며,

“어머? 당신. 우리들의 연애 시절을 노래로 만들려고 하는 군요? 검은 장갑이라고 쓰인 걸 보니…, 호호호. 그렇죠?”

아내는 창밖에 내리고 있는 함박눈에 눈길을 주며, “생각하면 그때 겨울은 왜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지 모르겠어요, 눈 오는 날이면 당신은 나를 꼭 밖으로 불러내서는 늦도록 까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집 앞까지 바래다줄 때도 헤어지기 싫어 ‘검은 장갑’을 낀 내 손을 꼭 잡고서는 놓아주지를 않았죠.”

손시향이 부른 ‘검은 장갑’은 이날 아내의 이야기에서 탄생됐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검은 장갑 낀손/할말은 많아도 아무말 못하고/돌아서는 내 모양을/저 달은 웃으리.’

‘검은 장갑’을 부른 가수 손시향은 당시 한국의 이브 몽땅이라고 일컫던 샹송 가수. 우아하고 부드럽던 그리고 매혹적인 달콤한 그의 음색은 ‘거리를 떠나’ ‘비오는 날 오후 2시’ ‘이별의 종착역’ 등을 불러 그 시대 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다. 마치 아련한 그리움처럼 우리 곁에서 사라진 그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는 밤길/토라져서 가는 검은 스타킹/무엇에 틀렸는지 인사도 없이/토라져서 가는 검은 스타킹’

손석우 특유의 정감이 녹아 있는 눈 내리는 밤의 그리운 풍경화 같은 이 노래 ‘검은 스타킹’은 1962년, 허스키 가수 한명숙이 불러 ‘검은 장갑’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검사된 애인 못잊은 여인, 사랑에 속고 배신에 울고…
(40) 이부풍-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

사랑의 쓸쓸한 정서를 담은 노래 ‘외로운 가로등’이 수록된 가수 황금심의 40주년 앨범 재킷 사진.
1965년 어느 봄날의 주말. 이날은 아침부터 진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무료한 나머지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뚝섬 경마장을 찾았다. 근데 거기서 나는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을 뵙게 됐다. 김동리 선생은 누런 서류봉투를 낀 채, 경마장 입구 버드나무 아래서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김동리 선생은 누구나 다 아는 경마팬. 주말에 시간이 날 때는 오후 늦게 경마장에 온다고 했다. 봄과 여름이면 휘휘 늘어진 능수버들이 좋아서….

무척이나 반가운 나머지 선생을 가까운 한식집으로 모셨다. 능수버들로 에워싸인 버드나무집. 이 집은 민물장어와 파전 그리고 동동주가 유명했다. 능수버들이 휘휘 감기는 봄비 소리 때문일까? 약간 취기가 오른 선생은 한 곡조 뽑기도 했다. ‘외로운 가로등’이었다.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김동리 선생이 생각날 때면 이따금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래서 오늘은 ‘외로운 가로등’에 얽힌 사연을 쓰게 됐다.

1937년도 저물어 가는 겨울, 이날따라 비는 스산하게 뿌렸다. 작사가 이부풍(본명 박노흥)은 한잔 술에 기분 좋게 취해 약간 비틀대는 걸음으로 명동을 걸어 나왔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그는 이날 서민호와 함께 창설한 ‘빅다 가극단’의 기념 행사에 참석한 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명월관 앞을 지나는데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웬 여인이 우산을 받쳐 든 채 서 있었다. 그 여인은 명월관을 나오는 손님들의 얼굴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부풍은 이날은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밤에도 이부풍은 가로등 밑,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여인을 보자 뭔가 ‘사연이 있는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 다음 다음날도 그 여인은 그곳에 있었다. 이날 밤. 이부풍은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저, 결례되는 말입니다만…. 매일 저녁 왜 이 자리에 계신지?”

그러나 여인은 말이 없었다. 그저 쓸쓸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가까이서 본 여인은 젊었다. 갸름하면서도 우수 띤 얼굴은 청초했다. 가로등 밑의 여인은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이부풍이 용기를 내 다음날 낮에 한번 만나줄 것을 간청했다. 여인은 그러나 얼굴만 붉힐 뿐 처음에는 거절했다. 이부풍이 자신이 작가라는 걸 밝히자 그제야 여인은 응해 주었다. 이 여인은 이부풍의 짐작대로 깊은 사연이 있었다. 여인은 기생이었다. 가난한 애인의 학비를 대주기 위해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잠시 화류계에 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정절만은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지켰다. 애인과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기 때문. 여인의 헌신으로 애인은 일본 와세다대 법과를 나와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그러나 정작 출세를 한 애인은 이제 와서 여인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기생이 아니라도 주위에 여인들은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처음엔 바쁘다는 핑계를 대다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모든 것을 과거사로 돌리자는 거였다.

그러나 여인은 애인을 단념하기엔 이미 늦었다. 몹쓸 게 정. 거기다 이 여인의 뱃속에는 애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저녁마다 여인은 명월관 가로등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가 된 애인은 이곳을 자주 츨입한다기에….

이제 여인은 애인과 결혼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먼발치로라도 애인의 그리운 얼굴만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검사가 돼 있는 애인에게 공개적으로 불쑥 다가가기엔 이목도 있고 해서 그냥 애인과 마주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이는 제게 안 와도 좋아요, 제겐 이제 귀여운 우리 아기가 태어날 테니까요. 그래서 이 아이를 위해서도 이 사실을 그이에게 알려야 한다는 게 제 심정입니다.”

이부풍은 이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련한 여인을 위해 노래시를 쓴다. 노래시를 쓰는 그의 손이 분노에 못 이겨 파르르 떨렸다.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 거리에 외로운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속을/ 마저 울려 주느냐./ 희미한 등불 밑에 외로운 등불 밑에/ 울리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꿈도 짙은 이 거리에 비 젖는 가로등이여/ 이별도 많은 내 가슴속을/ 한없이 울려 주느냐.’

사랑의 배신과 그 당시 사회 풍조를 고발한 이 노래. ‘외로운 가로등’은 전수린이 작곡하고 황금심이 노래를 불러 우리 가요사의 명가요로 자리매김했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여대생과 아련한 짝사랑 추억… 미련과 아쉬움 애절하게 노래
(41) 전오승-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과거는 흘러갔다’ ‘방랑삼천리’ ‘삼일로’ 등이 수록된 가수 여운의 히트곡 앨범 재킷 사진.
스쳐지나간 일인데도 사람들은 곧잘 과거를 떠올린다. 배 떠난 나루처럼 과거는 공허하련만 그래도 미련과 아쉬움은 남는다. 1968년 여름. 가수 여운이 불러 사람들의 가슴을 젖게 한 노래 ‘과거는 흘러갔다’는 바로 이런 사연을 담고 있다.

대구 대륜고등학교 시절. 야구 투수로서 맹활약을 하던 여운은 야구뿐만 아니라 육상, 수영, 테니스에 이르기까지 만능 운동 선수였다. 그런 그는 노래도 잘 했다. 날렵한 몸매와 훤칠한 키. 기린처럼 긴 목을 갖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면 동료들은 그를 가수로 나서 보라고 충동질했다.

그래서 귀공자 타입의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갈등과 고민에 빠지게 된다. 당시 여운이 잘 부르던 애창곡은 가수 나애심의 ‘언제까지나’와 ‘미사의 종’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레퍼토리였다. 물론 듣기 좋고 감미로운 사랑을 담은 노래라면 가요와 팝송을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그는 틈만 나면 음악이 흐르는 음악실로 찾아 다녔다. 운동 연습 시간보다는 음악실에 틀어박혀 혼자 있는 게 더 좋았던 것이다. 시합을 앞둔 선수가 연습 도중에 사라졌다면 이는 확실히 탈이 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 뒤에는 ‘잠수함’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체육 선생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야구부에 끌려 왔지만 그는 이때 대학 진학이나 야구선수보다도 가수의 꿈에 더 정열을 쏟고 있었다. 한번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잠수함’의 종적은 찾을 수 없다. 졸업을 앞둔 그가 음악실에 파묻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못했던 것.

여운은 이 무렵 음악실에서 한 여대생을 만나 이성의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음악실 앞좌석에 늘상 혼자 나와서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이 여대생의 뒷모습에 차츰 뜨거워지는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

그런 어느 날. 그 여대생은 군복을 입은 남자 친구와 앉아 있었다. 다정하게 귀에 대고 속삭이는 걸로 보아 이미 그 사이가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고교 졸업을 하고서도 그는 여대생에 대한 못다 한 그리움을 안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진학 대신 가수가 되겠다는 각오로 인현동 명보극장 옆에 있던 전오승 음악학원을 찾았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아무리 미련에 집착해도 한번 흘러간 세월의 강을 다시 돌릴 수 없지 않겠는가. 잊어버리자, 그 사람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지워 버려야만 한다.

‘삼일로 고갯길을 같이 가던 그날 밤/영원토록 이 거리를 잊지 말자고/거니는 발자국에 새긴 그 사랑/날이 새면 지워질까, 삼일로 고갯길. 삼일로 가로등을 세며 가던 그날 밤/영원토록 이 등불을 잊지 말자고/거니는 순간에는 즐거웠지만/내일이면 추억 남길 삼일로 고갯길.’

1967년 월견초 작사, 전오승 작곡 ‘삼일로’는 데뷔곡 ‘황혼이 져도’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과거는 흘러갔다’를 야구방망이 대신 노래로써 크게 히트하게 된다.

‘즐거웠던 그날이 올 수 있다면/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 돌아가서/지금의 내 심정을 전해 보련만/아무리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잃어버린 그님을 찾을 수 있다면/까맣게 멀어져간 옛날로 돌아가서/못다 한 사연들을 전해 보련만/아쉬워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내가 이 노래 가사를 쓴 1968년경, 세광음악출판사에서 나오는 월간 ‘가요생활’에 ‘알기 쉬운 작사법’을 매달 연재하고 있었다. 마침 ‘과거에의 여행’이라는 부분을 쓰고 있을 때라 그 예문이 아쉬웠다. 물론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노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노래를 예문으로 들면서 나는 작사가는 드넓은 작품 소재를 찾아 끝없는 헌팅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은 새로운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희구하기 때문에 유동적인 이 심성에 변화를 주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노랫말을 써야 한다는 게 당시 나의 소신이기도 했다.

풍부한 경험은 작가의 자산. 헌팅에서 얻은 체험과 경험은 바로 자신 있게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때문. 작품 소재의 세계를 쉬지 않고 여행하는 것은 경험이라는 과거의 묘지 위에 새 잔디를 입히는 것.

빚에 쪼들린 급박한 상황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쫓기듯이 남의 가정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으로 뛰어들었고 ‘죄와 벌’의 세계까지 드나들지 않았던가. 악처에게 밀려난 톨스토이기에 시골의 조그만 간이역도 작품화됐고, 행동의 참여를 수반했기 때문에 앙드레 말로의 사상은 비로소 문학 작품이 됐다.

그렇다면 가수 여운의 청소년 시절의 경험도 노래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여운을 생각하며 ‘과거는 흘러갔다’를 작사했으며, 작곡은 전오승이 했다. 감미로운 음색에 폭 넓은 음폭. 뛰어난 가창력은 팬들을 사로잡았다. 준수한 용모와 함께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독립투사’ 삼촌과 어린시절 추억… 눈내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노래
(42) 김다인-백년설의 ‘고향설’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강원 고성군 건봉사의 조명암(본명 조영출) 노래비. 그는 박시춘, 손목인과 함께 ‘국내 대중음악 3대 천재’로 불렸다.
‘한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이요/ 두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일세/ 깊은 밤 날아 오는 눈송이 속에/고향을 불러보는 고향을 불러보는/ 젊은 푸념아. 소매에 떨어지는 눈도 고향눈/ 뺨 위에 흩어지는 눈도 고향눈/ 타관은 낯설어도 눈은 낯익어/ 고향을 외워보는 고향을 외워보는/ 젊은 한숨아. 이 놈을 붙잡아도 고향 냄새요/ 저 놈을 붙잡아도 고향 냄샐세/ 내리고 녹아가는 모란 눈 속에/ 고향을 적셔보는 고향을 적셔보는/ 젊은 가슴아.’

1941년 정초 ‘고향설’의 작사가 김다인(조명암의 필명)은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동양극장에서 창 밖에 내리고 있는 함박눈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아침 나절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저녁 무렵에 이르러서는 온 장안을 하얗게 뒤덮었다. 김다인은 만주에 있는 삼촌을 생각하고 있었다.

삼촌은 그와 동갑내기. 늦게 막내 아들을 본 할아버지와 일찍 장가를 든 아버지는 한 지붕에서 같은 해에 할아버지는 아들과 손자를, 그리고 아버지 쪽에서는 동생과 아들을 두는 경사를 치른 것이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 때문. 그래서 김다인은 동갑내기 삼촌과 한학교에 다니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학교 성적도 1, 2등을 서로 바꿔하면서 고등보통학교까지 줄곧 한 반에 다녔다. 그러나 삼촌은 학교를 졸업하자, 동경 유학을 조카에게 양보하고 만주로 달아났다.

학비로 쪼들릴 김다인을 위해 삼촌은 장사를 하겠다면서 어느날 꼭두새벽, 메모 한 장을 조카가 자고 있는 방에 밀어 놓고는 기어이 북행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었다.

삼촌이 독립투사로 활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경찰서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붙들려 가면서였다. 이때 그는 동경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삼촌의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 능히 그런 일을 할 사람이라고 짐작했던 것.

1939년 2월. 중국 광서성 유주에서 조직된 광복전선 청년공작대의 일원으로 삼촌은 활약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독립투사로 둔 대가로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그 후유증으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집요한 감시의 눈초리는 동경 유학생 김다인에게까지 번득였다. 미행을 하거나 수시로 하숙방에 들이닥쳐 몸과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가 삼촌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집을 나간 지 꼭 햇수로 7년째가 되는 바로 이날 아침 나절이었다. 비좁은 전차 안에서 누가 똘똘만 쪽지를 그의 손에 꼭 쥐여주는 것이었다. 순간 그의 뇌리에는 퍼뜩 스치는 예감이 있었다.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황급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미행당할까 봐 골목길을 돌아 찻집에 들렀다. 화장실에서 펼쳐본 쪽지에는 그의 짐작대로 삼촌의 글이 씌어져 있었다. 동상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으니 약을 구할 수 있다면 쪽지를 전해준 사람에게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접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암기하고는 쪽지를 얼른 불에 태웠다.

담배를 문 김다인의 눈은 온통 삼촌 얼굴로 덮였다. “아! 길호 삼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 삼촌의 이름을 불렀다. 겨울 내내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 만주에서 지금 삼촌은 동상에 걸려 있지 않는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광복군에 들어가 이 겨울을 악조건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순간 눈을 좋아했던 삼촌과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고향설’을 원고지에 갈겼다. 이날 밖에는 함박눈이 온종일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1930년 초기부터 극작과 시 및 가사를 쓴 작사계의 태두, 김다인. 그의 본명은 조영출. 충남 아산 태생이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시단에 등단한다. 그리고 시가(詩歌·노래시) 부문에서는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상했다. 대표작 ‘낙화유수’를 비롯, ‘고향설’ ‘목포는 항구다’ ‘선창’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진주라 천리길’ ‘눈오는 네온가’ ‘남아 일생’ ‘남매’ ‘청년 고향’ ‘서귀포 70리’ ‘울며 헤진 부산항’ ‘어머님전상서’ ‘목단강 편지’ ‘꼬집힌 풋사랑’ ‘초립동’ ‘꼴망태 목동’ ‘화류 춘몽’ ‘고향 소식’ ‘역마차’ ‘소주 뱃사공’ ‘코스모스 탄식’ ‘경기 나그네’ ‘바다의 교향시’ ‘해방된 역마차’ ‘고향초’ 등 많은 명가요를 남겼다.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잎 따는 아가씨는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찔레꽃이 한잎 두잎 물 위에 내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디로 갔나/ 전해오는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1947년. 친일파 재판이 한창일 때, 일제 말엽에 친일 군가를 많이 쓴 그는 월북해 북한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1993년 향년 80세. 작곡가 박시춘, 손목인, 김동진과는 1913년에 태어난 동갑내기였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로맨틱한 사랑의 애환 다룬 ‘명동노래’… 촉촉하고 현란한 창법으로 심금 울려
(43) 박인환-현인의 ‘세월이 가면’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1954년 어느 봄날.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과 시인 박인환, 그리고 언론인 이진섭은 명동 입구에 있던 동방 문화회관에서 만났다. 현인과 이진섭은 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 전신) 2년 선후배 사이. 이진섭과 박인환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 이진섭은 해방 후 정동 방송 시절 아나운서를 지내기도 했다.

당시 명동은 6·25 전쟁으로 폐허였지만 명동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환도와 함께 하나둘 모여들었다. 문인, 화가, 연극인, 가요인, 음악가, 언론인들이 동방 문화회관을 찾았던 것이다.

1954년부터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명동. ‘동방회관’과 대폿집 ‘은성’은 문화인들의 집결처요 근거지였다. 누굴 만나거나 연락할 일이 있으면 그리로 가는 것이었다.

은성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다시피 탤런트 최불암의 자당이 운영하던 곳으로 술집 분위기가 아주 훈훈했다. 소설가 김광주·이봉구, 작사가이기도 한 유호, 시인 조병화·박인환, 그리고 이진섭과 현인이 낮이나 밤이나 찾아와서 술을 마셨다.

“노래의 패턴을 좀 바꿔보자! ‘신라의 달밤’이나 ‘서울 야곡’과 같은 노래가 애창곡으로 불리는 걸 보면 우리도 이젠 센강을 노래한 샹송처럼 뭔가 변화를 좀 보여주자!”

셋은 은성에서 만나게 되면 문학과 노래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통금시간이 임박해서는 모두들 곤드레만드레가 됐다. 죽이 잘 맞았던 것이다.

“먼저 좋은 노래시가 나와야 한다. 박 시인(박인환)이 우선 시를 탄생시켜라! 작곡이 전문은 아니지만 가수 현인을 위해 나도 작곡을 해보겠다.”

샹송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던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이에 코끼리 ‘현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보라고! 이 서늘한 눈매를 보라고! 코끼리는 어느 때 코를 높이 쳐드는지 아나? 갈증이 날 때지! 그리고 필요한 것을 구할 때지.”

박인환이 노래를 의식하고 쓴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를 갖고 나오자 셋은 곧바로 작곡으로 들어갔다. 이진섭은 도시 소시민적인 사랑의 애환을 다룬, 다소 감상적인 이 서정시를 ‘명동 노래’로 만들겠다며 보름간이나 끙끙댔다. 노래시가 던지는 전후의 상흔을 살리려고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마침내 음반에 현인 노래가 취입됐다. 이 노래는 명동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애창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현인은 작곡에도 뛰어났다. 중국 베이징(北京) 비밀 감옥소에 6개월간 갇혀 있을 때 작곡한 명동의 노래 ‘서울 야곡’이 유호의 작사로 그 멜로디가 살아나고 널리 불리자 시공관(명동 국립극장) 무대에서 ‘서울 야곡’과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처음으로 불렀다.

명동의 모더니스트들은 모두가 환호했다. 현인은 그 촉촉하고 현란한 창법으로 마침내 ‘세월이 가면’을 메마른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1923년 강원 인제에서 태어난 시인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다니다가 해방 후에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한때는 경향신문 사회부 차장을 지냈다.

1956년 33세로 요절한 그는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비롯,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시가 비평성과 서정성의 조화를 얻어 원숙할 즈음에 타계한 것이었다.

여류작가 박기원 씨의 부군이기도 한 이진섭은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팔방미인이었다.

명동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던 동방 문화회관이나 은성도 이제는 사라졌다.

현인에 이어 박인희가 부르기도 한 이 노래 ‘세월이 가면’은 명동을 사랑하는 가요팬뿐만 아니라 노래시로 명가요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동 노래 유호 작사, 현동주 작곡 ‘서울 야곡’ 또한 이 무렵 명가요로 손꼽혔다. 서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 노래는 당시 명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봄비에 흠뻑 젖어 불렀기 때문.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이 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