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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하동이야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30) 조미미 ‘서귀포를 아시나요’-(35) 손석우-남인수의 ‘내 고향 진주’

惟石정순삼 2012. 12. 6. 17:00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밀감향기…쪽빛 바다…돌하루방 추억, 민요풍 노래로 고향에 대한 향수 달래
(30) 조미미 ‘서귀포를 아시나요’

1970년대 트로트 황금시대를 이끈 가수 조미미의 ‘서귀포를 아시나요’ 앨범 재킷 사진.
2009년 12월 6일. 제주 서귀포시 ‘서귀포 70리 시립공원’에서는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서귀포 바닷가’와 ‘서귀포 사랑’, 그리고 ‘서귀포를 아시나요’가 그것이다. 그만큼 서귀포는 풍광명미(風光明媚)의 고장. 그래서 노래가 많았다.

“서귀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화산 한라산이 일구어 낸 섬, 특히 서귀포시는 세계관광 문화 단지로, 그리고 자연 생태계의 보호 지역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높은 산, 깊은 계곡, 울창한 삼림. 이뿐만 아니라 동굴이며, 폭포, 가로지르는 해안선, 용머리 기암절벽, 돌 하르방 등 그야말로 눈부신 자연의 감동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밀감향기 풍겨오는 가고 싶은 내 고향/칠백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동백꽃 송이처럼 예쁘게 핀 비바리들/콧노래도 흥겨웁게 미역 따고 밀감 따는/그리운 내 고향 서귀포를 아시나요.’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서귀포를 아시나요’의 작사가 정태권은 그가 쓴 노래시를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정태권이 처음 서귀포를 찾은 것은 1970년 여름이었다. 서귀포는 소문대로 역시 아름다웠다. 한국적인 정서와 이국적 정취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 탁 트인 망망대해며, 한라산의 풍요로운 초원. 바다 기슭에 핀 눈이 시리도록 황홀한 동백꽃. 갯바위며, 하얀 거품을 뿜으면서 쪽빛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해녀들. 그리고 길가의 야자수들은 넉넉한 삶을 젊은 작사가에게 안겨줬던 것.

‘서귀포를 아시나요’의 노래시가 완성되자 그는 작곡가 유성민에게 곡을 의뢰했다. 유성민은 그때, ‘여인의 눈물’ ‘나 홀로 걸으면’ ‘가버린 영아’ 등의 히트곡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가수 오은주가 유니버샬 레코드사에서 취입한다. 하지만 이 마스터 테이프는 그해 태풍으로 공장이 침수돼 음반을 내지 못한다.

1973년. 결국 이 노래는 가수 조미미가 부른다. 구성지면서도 애틋한 민요풍의 이 노래는 ‘서귀포 찬가’로 서귀포를 알리는 데 한몫을 했다. 이 무렵 우리 사회는 관광 문화시대가 되면서 관광지와 명승지의 개발에 활기를 띠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조미미의 고향은 목포. 그녀는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다. 당시 지구레코드사의 문턱을 드나들었지만 가수 이미자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었던 것.

작곡가 김부해는 그녀에게 조미미(본명 조미자)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이미자와 이름이 겹쳤던 것이다.

1969년. 조미미는 ‘여자의 꿈’ ‘서산 갯마을’ ‘단골손님’ ‘연락선’ ‘동창생’ ‘선생님’ ‘먼 데서 오신 손님’ 등의 노래를 불러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적인 노래는 1971년에 부른 정귀문 작사, 이인권 작곡 ‘바다가 육지라면’이었다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 갑니다/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아아- 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어제 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할 말이 하도 많아 , 하고파도 못 합니다/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뱃길에 훨훨 날아 어디론지 가련마는/아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섬 처녀의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낸 이 노래는 마치 1960년대 이미자의 히트송 ‘흑산도 아가씨’와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연상시켰던 절창이었다.

가수 김부자, 김세레나 등과 같은 해에 데뷔한 그녀는 동갑내기 ‘돼지 클럽’을 결성해 사회봉사에도 많은 참여를 했다.

지난 9월에 간암으로 타계한 그녀는 우리 한국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수평선에 돛단배가 그림같은 내 고향/칠백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한라산 망아지들 한가로이 풀을 뜯고/줄기줄기 폭포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그리운 내 고향 서귀포를 아시나요.’

그리운 남쪽 바다 서귀포의 정경을 간결한 서경시로 읊은 이 노래는 이제 노래비가 세워져 서귀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많은 정서를 안겨주고 있다. 세월은 가도 노래는 남는 것. 미모와 함께 뛰어난 가창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조미미는 정녕 가고 말았는가.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현란한 무대 제스처·매혹적 가창력 입에서 입으로 ‘전파’…폭발적 인기
(31) 나화랑-도미의 ‘비의 탱고’

1950년대를 풍미한 노래‘비의 탱고’가 수록된 가수 도미의 히트곡 앨범 재킷 사진.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울음과 같이/슬픔에 잠겨있는 슬픔의 가슴 안고서/가만히 불러보는 사랑의 탱고/지나간 날에 비 오는 밤에/임과 마주 서서 속삭인 창살가에는/달콤한 꿈 냄새가 아련히 스며드는데/빗소리 조용하게 사랑의 탱고’

“비(雨)가 몇 도(度)냐?”

“…?”

“허어, 이 사람 귀(耳)하고는….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는 도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걸 몰라?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 ‘비가 5도’라고 강조하지 않는가?”

그랬다. 임동천 작사, 나화랑 작곡. ‘비의 탱고’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마치 인도인 같은 이국적인 마스크에 뿜어내는 열정적인 가창력은 현인의 전성기 때를 방불케 했다.

현란한 무대 제스처와 함께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를 부를 때면 객석은 매료돼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만큼 도미의 노래는 매혹적이었다.

경북 상주 감나무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낙동강이 한반도지도처럼 흐르는 곳에서 멱을 감으며 발성을 익혔다. 현인의 창법과 노래 연기는 그의 사표. 그리하여 고등학교를 나오기가 무섭게 작곡가 박시춘을 찾았다. 박시춘은 현인을 발굴하지 않았던가.

그가 박시춘 앞에서 부른 노래는 ‘신라의 달밤’. 박시춘은 도미에게 야인초 작사, ‘신라의 북소리’를 작곡하여 취입시킨다.

‘서라벌 옛 노래냐 북소리가 들려온다/말고삐 매달리며 이별하던 반월성/사랑도 이 목숨도 이 나라에 바치자/맹세에 잠든 대궐 풍경홀로 우는 밤/궁녀들의 눈물이냐/궁녀들의 눈물이냐 첨성대 별은.’

이 무렵은 역사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많았다. ‘방랑시인 김삿갓’ ‘효녀 심청’ ‘사도 세자’ ‘백마강’ 등이 그랬다. 예상한 대로 도미의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였다.

이후, 도미는 박시춘 작곡으로 화려하게 명성을 떨친다. ‘오부자의 노래’ ‘청춘 부라보’ ‘사랑의 메아리’ ‘하이킹 노래’ 등으로….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어여쁜 아가씨는 손잡고 가잔다/그윽히 풍겨주는 포도향기 달콤한 첫사랑의 향기/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던/바람은 산들불어 불어준다네/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그대와 단둘이서 오늘도 맺어보는 청포도사랑.’

1956년에 발표한 도미의 ‘청포도 사랑’은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질렀다. 포도밭은 이 무렵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였기 때문.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몸이/뒤죽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꽃피는 청춘도 영화도 버리고/흐느끼며 가실 때엔 밤새들도 울었소.’

작곡가 나화랑(본명 조광환)은 경북 김천 태생. ‘나그네 설움’의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과는 친형제. 나화랑이 동생이다. 일본중앙음악학교 바이올린과를 나온 한 때 KBS 경음악단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삼각산 손님’ ‘제물포 아가씨’ ‘도라지 맘보’ ‘향기 품은 군사우편’ ‘닐리리 맘보’ ‘서울의 지붕 밑’ ‘서귀포 사랑’ ‘뽕따러 가세’ ‘웬일인지’ 등을 작곡한다.

특히 데뷔곡 ‘삼각산 손님’을 비롯해 송민도의 노래 ‘내일이면 늦으리’ ‘푸른 꿈이여 지금 어디’ ‘행복의 일요일’ ‘목숨을 걸어놓고’ 그리고 남인수의 노래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 ‘이미자의 노래’ ‘열아홉 순정’ ‘임이라 부르리까’ ‘정동대감’, 남일해의 노래 ‘이정표’ ‘핑크 리본의 카드’는 그의 대표곡.

‘슬어진 빗돌에다 말고삐를 동이고/초립끈 졸라매면 장원꿈도 새로워/한양길이 멀다해도 오백 리라 사흘 길/별빛을 노려보는 눈시울이 곱구나, 백화난 잿마루에 물복숭아 곱던 밤/아미월 웃어주는 들마루가 즐거워/죽장망혜 늙은 손님 일러주던 글 한수/산허리 굽이굽이 풍악소리 들린다.’

형님 고려성이 작사한 이 노래, ‘삼각산 손님’을 작곡한 나화랑. 그 자신이 노래를 부르려 했지만 형님의 권유로 가수 태성호가 부르게 된다. 작곡가 나화랑은 본디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작곡가 이재호에게 곡을 받아 취입한 적도 있었다.

짧은 생애. 하지만 이 기간에 그는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클래식풍에서 민요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곡을 펼쳤던 것이다.

‘초록 바다 물결위에 황혼이 오면/사랑에 지고 새는 서귀포라 슬픔인가/임 떠난 부두에 울며 불며 새울 때/칠십 리 밤하늘에 푸른 별도 슬퍼라.’

1956년에 가수 송민도가 부른 강사랑 작사, 나화랑 작곡. 클래식풍의 ‘서귀포사랑’이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유명가수 숯가루 바른 대머리서 검은 물 줄줄
<32> 채규엽의 ‘북국 5천킬로’
“천하 가수 이 채규엽이 옥(獄)살이를 하고 있다니…. 이건 말이 안 돼!” 그러나 현실이었다. 채규엽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채 징역을 살고 있었다. 그것도 창피하게 사기죄로 끌려 와서 철창신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나는 이게 뭐람? 아, 나를 망가뜨린 건, 훌렁 벗겨진 이 웬수놈의 대머리….”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이자, 대중가요 효시 격인 ‘희망가’를 취입한 채규엽(사진)은 음반가수 제1호이다. 물론 희망가는 번안가요이긴 했지만, 그는 이 밖에도 ‘봄노래’ ‘학도가’ 등을 불러 초창기 우리 가요사를 이끈 선각자였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채규엽은 이미 중학교 때, 독일인 음악가 ‘모이기르크르’로부터 성악을 사사하기도 했다. 도쿄(東京)의 중앙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그는 귀국해 1928년,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갖는다. 풍부한 성량. 남자다운 외모와 체격. 그리고 연기는 청중을 압도했다. 그래서인지 채규엽은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웬만한 출연료가 아니면 무대에 나서지를 않았다. 당시 그는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것. 이 무렵 월간잡지 ‘삼천리’가 실시하던 인기 가수 여론조사에서 늘 1위에 올랐다. 김용환, 강홍식, 최남용, 고복수를 제치고.

하지만 세월 앞에 어찌 장사 있으랴.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 채규엽의 기력은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진다. 인기와 젊음을 생명으로 하는 무대에서는 이건 치명타. 그래서 그는 무대를 아예 포기한다. 젊은 시절에 쌓았던 화려한 명성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채규엽은 사채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흥행에 손을 댄다. 그러나 결과는 빚만 지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체포돼 형무소로 오게 된다.

“아, 이 대머리! 그 누가 있어, 새까맣게 머리털이 솟아나는 약을 개발할꼬?….”

장탄식에 장탄식을 거듭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채규엽. 하루는 후배 가수들이 면회를 왔다.

“선배님. 우리가 무료 공연료를 모아 빚을 갚았습니다. 곧 풀려날 테니 그동안 건강이나 챙기십시오.”

채규엽은 석방이라는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어느 날. 그날은 형무소 죄수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채규엽도 그랬다. 헌데, 이날. 채규엽은 눈이 뻔쩍 띄는 대머리 특효약을 발견하게 된다. 간수들이 숯불 앞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고향 언덕에서의 가슴시린 이별 담아… 송창식·윤형주의 감미로운 음색 매력
(33) 트윈폴리오 ‘하얀 손수건’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축제의 노래’ ‘하얀 손수건’ 등이 수록된 트윈 폴리오 앨범 재킷 사진.
1960년대 중반. 캠퍼스에서는 청년문화가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른바 청년문화로 상징되는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대학생들은 청바지를 입고 생맥주를 마시며 기타를 치면서 포크송으로 젊음을 발산했던 것. 그래서인지 명동과 종로 그리고 무교동에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특히 무교동의 ‘세시봉’은 매주 금요일 밤마다 ‘대학생의 밤’이 열렸다. 이상벽(경음악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되던 이 프로는 당시 아마추어 대학생 가수들의 꿈의 무대. 포크송 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기에 인기는 사뭇 높았다. 그리하여 출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67년. 송창식과 윤형주는 이곳에서 만난다. 22세의 동갑내기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취향이 같아 이듬해 보컬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한다. 서울예고 출신의 송창식은 그때 홍익대 청강생. 윤형주는 연세대 의예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히쭉히쭉 웃거나 머쓱해하던 송창식. 하지만 그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때면 객석을 압도한다. 절창이었던 것이다. 매혹적인 음색에서 뿜어내는 소리는 타고난 소리꾼. 팝송뿐만 아니라 대중가요에서도 그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던 것. 그것이 오늘날 송창식을 우뚝 서게 했다. 윤형주 또한 감미로운 음색과 포근함을 안겨 주는 가수. 정갈한 노래의 맛은 격조가 높았다. 한마디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하모니는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행복한 아침’ ‘더욱더 사랑해’ ‘빗속을 울며’ ‘모닥불’ ‘낙엽’ ‘에델바이스’ ‘이별’ ‘슬픈 운명’ ‘고별’ ‘회상의 노래’ 등을 불러 원곡 못지않은 감동을 주던 트윈 폴리오는 팬들이 확산되자 방송에 진출한다. 그들의 인기는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엔/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욱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고향 언덕에서 이별하던 정경이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조용호 작사의 번안곡 ‘하얀 손수건’은 당시 우리 사회상과도 맞물려 있었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산업화 시대였다. 노래는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것. 그래서인가. ‘하얀 손수건’은 시대적 정서가 됐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

그러나 트윈 폴리오의 활동 기간은 2년도 채 못 돼 해산한다. 윤형주의 학업 문제가 이유였다. 송창식은 텅 빈 구멍 뚫린 가슴을 안고 방황한다. 하지만 이 기간에 그는 우리 음악을 발견하게 된다. 국악을 바탕에 둔 대중가요 말이다. 서양 음악은 동양인이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 것. 그래서 알기 쉬운 우리 노래를 부른다.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 도는 떠돌이/ 멋진 피리 하나 들고 다닌다/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거센 눈보라가 닥쳐도/ 은빛 피리 하나 불면서/ 언제나 웃고 다닌다/ 갈길 멀다 우는 철부지 새야/ 나의 피리 소리 들으려므나/ 삘리리- 삘리리-/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 도는 떠돌이’

‘우리는’ ‘왜 불러’ ‘고래 사냥’ ‘가나다라’ ‘토함산’ ‘내 나라 내 겨레’ ‘꽃보다 귀한 여인’ ‘새는’ ‘그대 있음에’ ‘선운사’ ‘참새의 하루’ ‘좋은걸 어떡해’ 등 자작곡을 만든다. 포크송 시대의 서막이었다.

한편 트윈 폴리오의 해체 이후, 윤형주는 경희대로 옮겨 학업에만 전념한다. 하지만 그의 열렬한 팬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에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침이슬 내릴 때까지/ 별이 지면 꿈도 지고 슬픔만 남아요/ 창가에 피는 별들의 미소/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겨울 눈 내리던 창가에 앉아서/ 단 둘이 나눈 영원한 약속/ 잊을 수가 없어요’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함께 속삭이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 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라라라 라라라…’ 청순하면서도 발랄한 그의 노래시는 여름날 해변을 뜨겁게 달구었다.

1971년. 음악계에 복귀한 윤형주는 동아방송 심야 프로 ‘0시의 다이알’에서 DJ로서도 성공한 통기타 가수 1세대였다. 그는 ‘세시봉’ 열풍이 불면서 올해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연분홍 치마의 처녀시절 어머니 사진 화재로 타버려 그 모습 그리며 읊조려
(34) 손로원 ‘페르시아 왕자’·‘봄날은 간다’

손로원이 작사한 ‘봄날은 간다’ 앨범 재킷사진. 미성(美聲)의 가수 백설희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사시사철 검정 고무신에 검정 점퍼를 입고 다니던 작사가 손로원은 부산 피란 시절의 ‘막걸리 대장’. 그는 작사료보다도 술을 먼저 챙겼다. 그래서 막걸리 대장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952년 어느 가을날. 손로원이 부산 광복동에 있는 초원다방에 들어서자 동료들은 모두 놀랐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드나들던 손로원이 달포 만에 그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

“그동안 어찌된 일입니까? 나는 귀신이 잡아간 줄로만 알았지요? 하도 안 보이시길래…. 허허허…. 문제는 황제 ‘빽’ 갖고도 못 구한다는 그놈의 ‘술’인데 지금도 안녕하시겠지요? 설마하니 그걸 손 대감(손로원의 별명) 혼자서 다 자시지는 않았을 테고….”

손로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며 작곡가 한복남이 안부(?)까지 살피고 있는 그 술은 다름 아닌 바로 ‘루이 13세’를 말함이었다. 본디 화가이기도 한 손로원은 어느 토요일 오후. 그림을 그리려고 부산 태종대 바닷가로 나갔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한눈에도 그가 프랑스 장교임을 알 수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장교는 영어로 인사를 청해 왔다. 손로원의 그림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주머니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어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잔이 채워지자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는 건배가 제의됐다.

십년지기처럼 다정한 술잔이 몇 차례 오고 간 다음, 프랑스 장교는 지갑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며 그의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금발의 중년 여인은 뛰어난 미인이었다. 프랑스 장교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손로원은 쾌히 승낙을 했다. 초상화가 완성되자 손로원은 장교의 막사를 찾아갔다. 그림을 본 장교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끄집어내어 주는 것이었다. 술만 갖고 집에 온 손로원은 이날부터 그 술을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제조 연대가 100년도 넘는 프랑스 최고의 명주 루이 13세였기에.

“루이 13세만이 오직 그 권좌에서 이 술을 음미했을 뿐, 그 누구도 이 술을 마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암! 왜냐하면 루이 13세는 당시 페르시아 시장에서도 구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암….”

손로원은 동료들에게 침을 튀기며 술 자랑을 해댔다.

“자갈치 시장에 가서 우리 회나 좀 먹읍시다. 오랜만에….”

한복남의 말에 손로원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 술을 가지고 왔으면, 피란통에 고생하는 동료들과 함께 딱 한 잔씩 마시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려 자갈치 시장에 왔을 때였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한곳을 주시하며 웅성댔다. 용두산 판자촌에 불이 났던 것이다. 요란하게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소방차가 급히 달려가는 게 보였다. 이때 손로원의 다리는 이미 중심을 잃고 휘청대고 있었다.

“아이고 내 술! 아이고….”

지금 손로원이 탄식하는 건 바로 루이 13세였던 것.

“나는 술 향기마저 맡는 걸 아까워서 사양했거늘 저놈의 불길은 어찌 한 입에 깡그리 마신다는 말인가?….”

이날 충격으로 손로원은 며칠 뒤에 ‘페르시아 왕자’와 ‘봄날은 간다’를 쓴다. 그날, 화재는 벽에 걸어둔 어머니의 사진마저 태워버린 것.

처녀 시절 어머니는 연분홍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항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흰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달이 뜨면 함께 웃고 달이 지면 함께 울던/얄궂은 그 세월에 봄날은 간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시아 왕자/눈 감으면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어이해서 사랑에는 약해지던가/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의 공주/오늘밤도 외로운 밤 별빛이 흐른다. 약해서야 될 말이냐 페르시아 왕자/모래알을 움켜쥐고 소근거려도/어이해서 사랑에는 약해지는가/아라비아 공주는 마법사 공주/오늘밤도 외로운 밤 촛불이 꺼진다.’

다작가 손로원은 그의 대표작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고향의 그림자’ ‘즐거운 목장’ ‘물레방아 도는 내력’ ‘귀국선’ ‘비 내리는 호남선’ ‘마음의 자유천지’ ‘짝사랑’ ‘백마강’ ‘경상도 아가씨’ ‘샌프란시스코’ ‘홍콩 아가씨’ ‘인도의 향불’ ‘마음의 고향’ ‘엘레나가 된 순이’ 등 참으로 많은 명가요를 남겼다.

 

내달 3일 KBS 가요무대 ‘정두수 특집’
문화일보 ‘가요따라 삼천리’ 연재
김고금평기자 danny@munhwa.com
오는 12월 3일 오후 10시 방영되는 KBS 1TV ‘가요무대’는 ‘정두수 특집’ 편으로 꾸며진다. 정두수(75)는 지금까지 3500여 편의 시와 가사를 통해 국내 대표 가수들의 국민 작사가로 이름을 떨친 가요계의 산증인이다.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들고양이들의 ‘마음약해서’,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번 특집 방송 ‘가요 산맥’에서는 이미자, 남진, 문주란, 하춘화, 진송남, 김연자, 김상진, 여운, 김용임 등 가수들이 대거 출연해 정두수가 작사한 노래들을 재음미한다.

정두수는 4권의 시집을 비롯해 ‘알기쉬운 작사법’ ‘한국 가요 걸작선 해설’ 등의 저서도 내놓았다. 또 전국에서 가장 많은 노래비(13곳)가 세워진 작사가로 기록되기도 했다. 현재 문화일보에 ‘가요따라 삼천리’를 연재 하고 있는 정두수는 가사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시대 대중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는 “해맑은 고향 하동이 나를 이렇게 키웠다”며 “모두 고향의 은혜”라고 말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늘 가슴을 짓누르던 고향 노래의 꿈… 10년만에 금의환향 열차서 恨 풀어
(35) 손석우-남인수의 ‘내 고향 진주’
“난영아. 그 노래를 좀…. 불러다오.” 1962년 6월 26일. 가수 남인수는 을지로에 있는 백병원에서 동료들이 부르는 ‘황성옛터’를 들으면서 운명한다. 가수 이난영, 장세정, 백설희, 현인 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4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황성옛터’는 그가 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애창곡. 당시 일본인들조차 ‘조선의 세레나데’로 일컫던 우리민족 가요이지 않은가. 특히 노래시 3절은 남인수가 두견새 울음처럼 피를 토하듯 가슴이 찢어지게 불렀던 것.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어도/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묻고/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촉석루와 의암바위, 진주성과 남강은 우리 역사를 말한다. 그래서인지 진주는 예부터 역사와 문화 예술의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서부 경남의 중심지로 교육과 행정, 교통이 편리한 선비 고을이기도 했다.

진주에 태어나서 진주 노래를 못 부른 가수 남인수. 그는 누구보다도 애향심이 강했다. 손목인 이재호 등 진주 출신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는 있었지만 레코드회사의 소속이 저마다 달라서 ‘고향 사랑’의 노래를 못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고향 노래의 꿈은 진주로 가는 열차에서 이뤄진다

1955년. 이 무렵은 연예인 지방 공연이 활발하던 시기. 남인수 또한 지방 순연을 하고 있었다. 엄토미, 손석우, 노명석, 김창호 등이 악단 멤버. 열차가 마산을 지나 진주로 가고 있을 때, 손석우의 여사(旅舍) 방문을 누가 두드렸다. 남인수였다

“손형. 이번 ‘진주 공연’이 나에겐 10년 만입니다. 나는 여태껏 고향 노래를 부른 적이 없소. 손형이 아시다시피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의 걸림돌이 되어 마치 고향의 죄인처럼 진주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소. 진주 노래를 이번 방문 때 꼭 부르고 싶소. 노래를 부탁합니다.”

남인수는 너무 진지했다. 누가 들어도 감동을 느낄 만큼 고향 진주에 대한 절실한 사무침이었다. 그러나 손석우는 진주를 잘 몰랐다.

“진주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산이며 강이며 역사, 그리고 유래며 전설…. 들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석우는 상념에 잡혔다. 그 스스로가 망향의 강렬한 일념에 사로잡힌 남인수의 심정이 되어 기타를 잡았다. 남인수가 들려준 진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노래시와 곡을 동시에 진행했다.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 간 곳 없다마는/비봉산 품에 안겨 남강이 꿈을 꾸는/내 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해라/유랑 천리 십 년 만에 고향 찾아왔노라/마음의 채찍치며 달려왔노라. 고향에 누구라서 가고 싶지 않을까만/의곡사 종소리에 남강이 슬피 자는/내 고향 진주만은 진정 가고파/뛰는 가슴 달래면서 고향 찾아 왔노라/옛 이름 부르면서 물어 왔노라. 강산도 변하는데 의구하길 바랄까만/촉석루 어디 가고 이 마음 울리느냐/내 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 잊어/삼백 예순 사시절을 그리다가 왔노라/환고향 그날만을 바라왔노라.’

남인수의 진주 공연은 그를 기다리던 고향 팬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이었다. 진주 팬들은 물론 인근의 사천 삼천포 하동 남해 의령 고성 산청 함양 팬들까지 찾아와서 입추의 여지가 없었던 것.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 속에서 남인수가 ‘내 고향 진주’를 끝 곡으로 불렀을 때 팬들은 눈물을 글썽대며 숙연해지기도 했다. 남인수는 이어서 그 자신이 취입을 못한 진주 노래도 불렀다.

‘물소리 구슬프다, 안개 내린 남강에서/너를 안고, 너를 안고, 아∼ 울려주던/그날 밤이 울려주던 그날 밤이/음∼ 파고드는 옛 노래여. 촉석루 옛 성터에 가을달만 외로이/낙엽소리, 낙엽소리, 아∼처량쿠나 그날 밤은/너를 안고 울었소/음∼ 다시 못올 꿈이여. 고향에 임을 두고 타향살이 십여 년에/꿈에라도 꿈에라도 아∼잊을소냐 그대 모습/정들자 헤어진 임, 음∼ 불러라 망향가를.’

‘남강의 추억’을 작사·작곡한 이재호는 남인수의 고향친구. 남인수는 남강의 추억을 부른 다음, ‘진주라 천리길’을 부른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촉석루엔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아∼ 타향살이 심사를/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남강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아∼ 모래알을 만지며/옛 노래를 불러 본다.’

1941년. 이규남이 부른 이가실(조명암) 작사, 이운정(이면상) 작곡의 ‘진주라 천리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