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나라 뺏긴 슬픔 ‘주막’에 비유… 어느 날짜 오시겠소…희망담아 |
(22)박영호·백년설의 ‘번지없는 주막’ |
우리 민족은 유목민이 아닌데도, 일제강점기 때, 어쩔 수 없이 집시처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궂은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 구려/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이 부른 이 노래, ‘번지 없는 주막’은 당시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동포들의 통한(痛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주거할 집이 있겠는가. 그래서 주막에도 문패와 번지수가 없었다. 1940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불사조)는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 부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다. 힘든 등산길이었다. 백두산은 역시 민족의 성산(聖山)답게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와 골짜기가 앞을 막았다. 일행이 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비를 만났다. 그들은 지친 나머지, 비도 피할 겸 해서 어느 주막에 들렀다. 이른바 ‘아리랑 술집’…. 백두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이름 모를 주막집이었다. 통나무를 베어 흙을 발라 추위와 비바람을 겨우 막을 수 있을 만큼 얼기설기 지은 집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주막 주인은 그래도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하여 밤이 으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인다. 도토리 술은 도토리를 가루로 빻아 누룩에 담근 술이다.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술에는 피가 터졌소/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밖에는 여름비가 줄줄이 퍼붓고 있었다. 호롱불을 줄이면서 비를 바라보고 있던 박영호는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시를 쓴다. 기가 막힐 심정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맨 먼저 해방가요 제1호 ‘사대문을 열어라’를 쓰게 된다. 이때의 비참한 울분을 노래에 쏟았던 것이다. ‘사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반만년 옛터에 먼동이 튼다/노동자야 농민아 청년 학도야/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쇠사슬을 끊어라 날개를 펴라/반세기 눈물이 아랑곳이냐/자유민아 동지여 해외 동포야/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태양 위에 걸어라 우리의 이상/자유와 평등의 징을 울려라. 용광로야 괭이야 무쇠 마차야/새 세상은 우리의 것 앞으로 앞으로.’ ‘만주 이민사’를 다룬 ‘등잔불’을 희곡으로 썼던 작사가 박영호는 황폐한 조국 산하를 두고 노래시로 이렇게 읊었다. 피폐하고 황폐한 우리 사회를 번지 없는 주막에 비유한 것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박영호는 희곡 ‘장님의 동생’을 시작으로 ‘팔백호 갑판상’ ‘정어리’ ‘등잔 불’ ‘겨레’ 등 많은 공연 작품을 썼다. 왕평과 이서구의 권유로 1932년 폴리돌 레코드사에 ‘세기말 노래’(김탄포 작곡, 이경설 노래)를 발표한다. 작사로서는 데뷔작이었다. ‘명색이 사나이라 울긴들 하랴/울음을 웃음삼아 노래 부른다/내 가슴 벌판위에 재를 뿌린 그대는/오늘밤 어느 땅에 잔을 들고 우느냐.’ 1939년에 발표한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채규엽이 부른 ‘기타에 울음 실어’라는 노래이다. 얼마나 지독한 가슴앓이인가. 울려야 울 수 없는 한(恨)과 울분이 쌓였는 데도 소리내어 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 않겠는가. ‘기차는 떠나 간다 보슬비를 헤치며/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마음 달래자/공수래 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이 노래 ‘정한의 밤차’는 ‘만주 이민사’를 다룬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박영호의 작사활동은 그가 ‘시에론’ ‘OK’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장 시절 이뤄진다. ‘짝사랑’ ‘요핑계 조핑계’ ‘연락선은 떠난다’ ‘유랑극단’ ‘인생극장’ ‘북국 5천킬로’ ‘만포선 길손’ ‘세세연연’ ‘화물선 사랑’ ‘아리랑 낭랑’ ‘망향초 사랑’ ‘직녀성’ 등이 그것이다. 그는 당시, 조명암과 함께 우리나라 작사계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이었다. ‘타홍아 너만 가고 나만 혼자 버리기냐/너 없는 이 천지는 불 꺼진 사막이다/달 없는 사막이다 눈물의 사막이다/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두 바다 피를 모아 한 사랑을 만들 때는/물방아 돌아가는 세상은 봄이었다/한양(漢陽)은 봄이었다 우리도 봄이었다/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식은 정 식은 행복 푸른 무덤 쓸어안고/타홍아 물어보자 산새가 네 넋이냐/버들이 네 넋이냐 구름이 네 넋이냐/타홍아 타홍아 타홍아 아~ 타홍아.’ 일본 검열반으로부터 ‘한양은 봄이었다. 우리도 봄이었다’라는 노래시가 조선 민족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하여 사상문제로 금지곡이 된 ‘눈물의 백련화’이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떠날 때는 몰랐네∼ 그리울 줄은’ 고향 못가는 안타까운 마음 담아 |
(23) 백영호·배호의 ‘내 고향 남촌’ |
내 시와 노래는 금오산(일명 소오산) 자락에서 샘솟았다. 금오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최남단이 아닌가. 정상에 오르면 남해바다 한려수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남해, 삼천포, 거제, 통영, 사천, 진주. 그리고 광양과 여수가 손에 닿을 듯이 두루 보인다. 이뿐이겠는가. 전북 진안의 마이산 서편,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남해바다에서 긴 여정의 몸을 푸는 섬진강 하구도 보이는 것이다. 금오산을 길게 휘돌아 흐르는 주교천은 질펀한 들녘을 이루면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내가 태어난 성평마을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천리길이기에 고향에 가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두고 노래샘을 가슴의 항아리에 길어 올렸다. 성평리에서 학교는 시오 리 길. ‘매곡재’는 지름길이었다. 이 고갯길에 오르면 가슴이 뚫렸다. 학교와 면사무소가 보이고 주교천 따라 멀리 섬진강이 보였기 때문. 이뿐만 아니라 하동 장날이면 뱃고동소리도 아련히 들려왔던 것.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고향 학교로 전학한 나는 오뉴월 남풍이 부는 날은 매곡재에서 하모니카를 불어댔다. 뭉게구름이 궁전을 짓는 하늘은 너무나 눈부셨던 것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핀 들찔레조차….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젖나무와 상수리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룬 매곡재는 학교에서 귀가할 때면 나는 여기서 꼭 하모니카를 불곤 했다. 하모니카는 내 분신. 늘 나와 함께 동행했다. 그런 어느 날.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부산으로 전학 가기 위해 전학증명서를 떼고 집으로 가던 길. 그날따라 매곡재는 나를 슬프게 했다. 학교로 가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보따리 둘러메고 넘던 고갯길. 나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하모니카를 불어댔다. 그런데 매곡재 소나무 숲에서 누가 나타났다. 한 반에서 절친하게 지내던 쌍둥이 남매였다. “너 정말 하모니카 잘 분다. 나는 학예회 때 들어보곤 처음이야…. 한 곡 더 들려줄 수 있겠니?” 쌍둥이 누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도 곧 서울에 갈거야.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진학을 위해서…. 그동안 정들었는데 먼저 떠난다니 섭섭해….” “나는 방학 때면 만날 줄 알았는데….” “우리도 그러길 바라지만 서울에서 한번 오기가 어디 쉽겠니?” 그녀 남매도 나처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전란을 피해 서울에서 할아버지 댁으로 피란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난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 그녀는 눈이 맑았던 만큼 심성이 곱고 공부도 잘했다. 이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6·25가 발발하면서 소식이 끊겼다. 나는 시를 썼다. 노래시는 더 많이 썼다. 그녀에게 애타는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쯤 고향집에는 떠날 때 심어놓은/ 하얀 목련꽃이 달빛에 젖으면서 곱게 피겠네/ 몸은 떠나도 마음속엔 사무치는 고향/ 머나먼 남쪽 하늘에 구름이 흘러갈 때/ 아름다운 아름다운 사랑의 꽃을 피우리.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아련히 반겨주던/ 하얀 고향초가 이슬에 젖으면서 시들었겠네/ 몸은 떠나도 마음속엔 사무치는 고향/ 아득한 고향 하늘에 철새가 날아갈 때/ 내 마음은 고향 하늘에 여울져 흘러서 가네.’ 이미자는 역시 노래를 타고난 천재 가수. 이 무렵 애틋한 내 마음을 마치 알기라도 하듯 가곡풍의 이 노래를 애절하게 불렀다. 1965년에 쓴 필자의 노래시 ‘고향의 꿈’에 박춘석 씨가 곡을 붙였던 것. 1972년 배호가 부른 정두수 작사, 백영호 작곡의 ‘내 고향 남촌’은 그때 고향에 못 가는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남촌이 그리워서 눈을 감으면/ 남풍 따라 스며드는 찔레꽃 냄새/ 황토길 10리 고개, 재 너머 오면/ 얼룩무늬 황소가 울던 내 고향/ 언제 다시 가보나, 내 고향 남촌. 남촌에 부는 바람, 꽃이 피는데/ 남풍 따라 밀려오는 고향 냄새/ 꽃구름 흘러가는 정든 포구/ 떠날 때는 몰랐네, 그리울 줄은/ 어이해서 못 가나, 내 고향 남촌.’ 살 땐 몰랐어도 고향은 떠나오면 그리운 것이다. 혼으로 노래하던 가수 배호. 그가 신장염으로 요절하자 나는 추모의 노래시를 썼다. 이미자가 부른 ‘석양’이 그것이다. ‘꽃피던 봄날은 어느덧 가고/ 낙엽의 가을마저 저물어 가네/ 인생은 나그네 나그네 인생길은/ 홀로 갈 머나먼 길/ 가슴 깊이 그려봐도 모두가 지나간 일인데/ 가신 님의 이름 불러보아도/ 석양은 말이 없네.’ |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형수와 시동생의 ‘맺지 못할 사랑…’ 밤비에 비유 |
(24) 남진의 ‘우수(雨愁)’ |
1967년에 상영한 영화 ‘형수’에 출연했을 때, 가수 남진은 이미 스타가 돼 있었다. ‘가슴 아프게’를 비롯, ‘별아 내 가슴에’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있어요’ 등, 그의 노래가 잇달아 히트하자 모두 영화화되고 따라서 남진은 그 영화의 주연 배우로 나왔던 것. 그래서 영화에서 그는 주제가를 불렀다. 영화 형수의 주제가 ‘우수(雨愁)’ 또한 그랬다. 영화 형수에서 시동생 역 남진에게는 누나같이 따뜻하고 심성이 고운 형수가 있었다. 이 형수 역은 고은아 그리고 형님 역은 남궁원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두 형제의 우애는 깊었다. 형님과 형수의 사이도 참으로 금실이 좋은 신혼부부. 두 형제와 형수는 한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어느 날 형님이 참변을 당한다. 교통사고였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형수는 그야말로 혼자 남게 된 젊은 과수. 시동생은 형수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연민에 빠진다. “형수가 과연 개가하지 않고 평생을 혼자서 살 것인가?” 그러기엔 형수는 너무 아름답고 젊었다. 시동생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아무리 형수가 시동생을 마치 친동생처럼 끔직이 사랑해 주었지만, 형님이 돌아가신 지금, 어찌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어느 날. 그날은 형님의 삼년 탈상이었다. 하루종일 비가 퍼붓고 있었다. 시동생은 집안에서 화초를 가꾸며 살아가는 형수에게 집에서만 계시지 말고 바깥 출입도 좀 하시라고 권한다. 하지만 형수는 웃기만 했다. “제 성격이 그런걸요.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시동생은 형수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용기를 내어 건의한다. “형수님, 개가해 주십시오. 저는 형수님이 정숙하신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 혼자서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개가해 주십시오. 하늘에 계신 형님께서도 아마 그걸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부담되세요? 저는 형님이 돌아가셨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아직 한 번도 없어요. 항상 형님은 제 마음속에 살아 계시니까요.” 그랬다. 형님에 대한 형수의 사랑은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시동생은 고개가 숙여졌다. 이 얼마나 눈부신 마음의 사랑인가. 집에서 뛰쳐 나오다시피한 그는 밤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방황한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퍼붓는 빗줄기. 그의 얼굴에는 빗물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린다. 집에서 나올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 ‘맺지 못할 인연일랑 생각을 말자/마음의 다짐을 받고 또 받아/한백 번 달랬지만 어쩔 수 없네/잊으려 해도 잊지 못할 그대 모습 그려볼 때/밤비는 끝없이 소리 없이/내 마음 들창가에 흘러내린다. 맺지 못할 사랑일랑 생각을 말자/ 아쉬운 미련만 남고 또 남아/잊으려 했었지만 잊을 길 없네/빗줄기 속에 추억 실어 그대 이름 불러볼 때/밤비는 끝없이 하염없이/마음의 슬픔처럼 흘러내린다.’(영화 형수의 주제가‘우수’) ‘형수’를 보고 나온 그날. 나는 또 한 편의 노래시를 쓴다. ‘빗속에서 누가 우나’가 그것이다. ‘흐느끼듯 쏟아지는 빗속에서 누가 우나/그 누가 저렇게도 사무치게 울려놓고/철새처럼 가버린 다시 못올 그 사람/메아리만 남기고 멀리 멀리 떠났기에/밤이 새도록 슬피 울고 있나/가슴이 메이도록. 상처뿐인 그 가슴을 달랠 길이 없건만은/그 얼굴 잊으려고 하염없이 울고 있나/꽃잎처럼 떨어진 마음 바친 그 사람/그리움만 남기고 멀리 멀리 떠났기에/찬비에 젖어 슬피 울고 있나, 가슴이 메이도록.’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때는 남진의 전성기.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했다. 준수한 용모, 뛰어난 가창력 그리고 활달한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했다. 극장 쇼는 물론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폭발적인 위력과 인기는 한시대를 풍미한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리운 눈동자로/별아 내 가슴에 안기어다오/당신을 못 잊어서 자나깨나 애타는/내 마음에 아로새긴 사랑하는 그 얼굴/아 - 별아 내 가슴에 영원히 비춰다오. 저 멀리 떠나가는 정다운 눈동자로/별아 내 가슴에 속삭여다오/낮이나 밤이나 못 잊어서 그리운/내 마음에 젖어드는 사랑하는 그 모습/아 - 별아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다오.’ 1967년에 발표한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이 부른 영화 ‘별아 내 가슴에’의 주제가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험한 고갯길에서 이별하는 두 남녀, 질박한 노랫말에 애달픔 더해 ‘울컥’ |
(26) 반야월 ―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
충청북도 충주시와 제천시를 잇는 큰 고개 하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제천시에서 충주로 넘어가려면 우뚝 선 재가 ‘천등산 박달재’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일부러 가지 않으면 못 가는 박달재. 하지만 1948년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 험한 재를 넘어야만 했다. 지름길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의 박달재를 넘어 가려면 차가 고장 나기 예사였다. 낡은 트럭에 짐을 가득 싣다 보니, 낡은 엔진이 어찌 말썽을 부리지 않으랴. 그래서 운행 중에 엔진이 꺼져 부속품을 갈아 끼우는 등 몇 시간을 보내야 겨우 출발할 수가 있다. 1948년 어느 가을날. 반야월 순회 공연단원들은 박달재를 넘다가 트럭이 멈췄다. 고장을 일으킨 것이었다. 운전수와 조수가 트럭을 손보는 동안에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기다려야만 했다. 일행 중에는 당시 악극 배우 김진규, 이예춘, 허장강 등이 있었다. 반야월은 ‘떡 입을 벌리고 떨어지는 알밤과 굴러 떨어지는 도토리를 보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그는 한 곳을 응시한다. 산 중턱에서 젊은 부부가 이별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낭군의 허리춤에 도토리묵을 싸서 달아주는 여인. 먼 길에 요기라도 하라는 것일 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 차마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었다. 반야월은 이 광경을 숙소에서 노래시로 썼다. 낭자의 마음이 되어….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도토리묵은 요기도 된다. 그때 식량난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그랬다. 먹을 수 있는 건 모두 다 먹는 게 해방 정국이었다. 그런데 여기 ‘박달재의 금봉’이가 누구인가? 이광수의 소설 ‘사랑’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다. 반야월은 문학도, 그는 문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노래를 공부했다. 그런 그가 사랑의 주인공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리라. ‘박달재와 물항라 저고리’ 그리고 ‘궂은비’와 ‘왕거미’. 이 어휘는 토속적이면서도 무속적이다. 향토성이 물씬 나는 서정미는 소박하다 못해 질박(質朴)하다. 이 뉘앙스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달인의 경지에서 찾은 안목(眼目)이며, 사고(思考)이다. 특히 2절에서의 절창을 보라.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그렇다. 부엉이 우는 산골은 깊은 산속? 그래서 성황당 돌탑이 있다. 고개에서 소원성취를 손 모아 비는 마음은 간절하다 못해 눈물 날 만큼 애달픈 것이었다.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돌부리에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굽이마다/금봉아 불러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이 노래의 백미는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의 시구(詩句). 산울림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산울림이 왜 그렇게 외로운지를 터득했으리라. 아무렇지 않게 쓴 것 같아도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을 반야월은 쓴다. 세련미와 노련미를 때에 따라 부리고 안 부린다. 이건 타고난 문재(文才)만이 할 수 있는 것.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향 찾아서/너 보고 찾아 왔네 두메나 산골/도라지꽃 피던 그날/맹세를 걸고 떠났지/산딸기 물에 흘러 떠나가도/두번 다시 타향에 아니 가련다/풀피리 불며불며 노래하면서 너와 살련다. 재를 넘어 영을 넘어 옛집을 찾아/물방아 찾아 왔네 달뜨는 고향/새소리 정다운 그날 맹세를 걸고 떠났지/구름은 흘러흘러 떠나가도/두번 다시 타향에 아니 가련다/수수밭 감자밭에 씨를 뿌리며 너와 살련다.’ 이 노래 ‘두메산골’에서 보듯이 반야월의 작품은 향토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섬처녀’ ‘소양강 처녀’ ‘삼천포 아가씨’ ‘단장의 미아리 고개’ ‘외나무 다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가수 박재홍은 인천 출신. ‘눈물의 오리정’ ‘마의 태자’ ‘내가 심은 해당화’ ‘화랑의 후예’ ‘마음의 사랑’ ‘경상도 아가씨’ ‘물레방아 도는 내력’ ‘마음의 고향’ ‘향수’ 등을 남기고 타계했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이틀밤 녹음실서 꼬박 산고끝 탄생… 꾹꾹 참고 견디는 남자의 마음 노래 |
(26) 김병걸 ― 조항조의 ‘사나이 눈물’ |
1991년 여름 어느 날. 작사가 김병걸은 서교동에 있는 음반 녹음실에서 이틀째 밤을 새운다. 가수 조항조가 부를 노래시를 쓰기 위해서다. 창작은 작가(시인)의 피를 말리는 작업. 고수 김병걸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피우다가 만 담배.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꽁초. 열댓 장은 족히 될성싶은 파지엔 깨알 같은 사연들이 얼마나 고쳐 썼다가 지웠는지 그 흔적이 참혹했다. 기획자 장고웅 사장과 가수 한혜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병걸은 벌써 2시간이 넘었는데도 꼼짝 않고 벽만 응시하고 있었다. 단 한 줄. 12자. 노래의 도입부인 이 12자의 확정을 위해 작사가는 무려 이틀을 녹음실에서 보냈다. “내 오늘은 기필코 끝낼 것이다.” 결의에 찬 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담배를 연신 피워댄다. 기침을 쿨룩대면서도 연거푸 입에 무는 담배…. ‘지금 가지 않으면 못 갈 것 같아/아쉬움만 두고 떠나야겠지/여기까지가 우리 전부였다면/더 이상은 욕심이겠지/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까만 숯덩이 가슴 안고/삼켜버린 사나이 눈물/이별할 새벽 너무 두려워/이대로 떠납니다. 돌아서서 흘린 내 눈물 속에/우리들의 사랑 묻어 버리면/못다 부른 나의 슬픈 노래도/바람으로 흩어지겠지/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까만 숯덩이 가슴 안고/삼켜버린 사나이 눈물/아침이 오면 너무 초라해/이대로 떠납니다.’ 고통의 산고 끝에 ‘사나이 눈물’이 탄생됐다. 살면서 까맣게 숯덩이가 된 가슴이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들 삶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 김병걸 작사, 이동훈 작곡, 조항조의 이 노래는 대박이었다.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꾹꾹 참고 견디는 남자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리하여 조항조는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노래에 이어 ‘남자 시리즈’를 발표하게 된다. 1990년대의 큰 수확이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것. 작사가이면서 작곡가인 김병걸은 필자의 문하생 중에서도 걸출했다. ‘낙동강’ 등 시집을 상재하기도 한 그는 ‘다 함께 차차차’ ‘찬찬찬’ ‘도시의 삐에로’ ‘그 사람 찾으러 간다’에서 비범한 재주를 보이기도 했다. 문학성과 음악성의 조화를 이룬 결실이라고 하겠다. 작곡가 이동훈은 경남 고성 사람. 최진희의 노래 ‘카페에서’의 작곡에 이어 ‘사나이 눈물’로 명성을 떨친다. 김병걸과 조항조의 만남은 1989년에 이뤄진다. 김병걸이 찬불가를 만들면서 조항조가 동참했던 것. 당시 ‘아세아 레코드사’ 박성호 전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병걸에게 “김 대감(김병걸). 우리 원표(조항조 본명) 노래 너무 아깝지 않아요. 김 대감이 어떻게 좀 해봐요”라며 조항조의 홍보를 했다. 만날 사람은 기어이 만난다고 했던가. 인연은 엉뚱한 곳에서 비롯되었다. 가수 이은하를 키운 매니저 박영걸이 다리를 놓아 조항조에게 악보를 건네준 것이었다. ‘아쉬움에 울던 이밤이 가면/우린 이제 영원히 타인인 것을/그대 눈빛 속에 비치는 것은/여기 내가 아니었나요/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너/그 마음에 누가 있나요/믿고 믿어왔던 우리 사랑/촛불 되어 꺼져 가는데/이별할 새벽 너무 두려워/이대로 떠납니다.’ 악보를 건네받은 조항조는 곡은 마음에 드는데 노래 내용을 다른 테마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노래시는 노래의 핵심. 작곡가 못지않게 가수가 노래시를 가장 잘 알기 때문. 그래서 ‘이대로 타인’이라는 노래가 ‘사나이 눈물’이 된 것이다. 가수 조항조는 ‘서기 1999년’이란 보컬의 리드 싱어. 1970년대 말 ‘포구’라는 노래로 데뷔했다. 서정성 짙은 매혹적인 음색, 뛰어난 가창력. 이제 그는 폭발적인 인기로 정상에 올랐다. ‘신 트로트 황제’ ‘가슴으로 노래하는 남자’ 등으로 불리는 조항조는 다양한 무대에서 애절한 음색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올해 초에는 한 텔레비전 방송의 특집프로그램에서 나훈아의 ‘영영’을 랩을 가미시킨 폭발적인 느낌의 곡으로 바꿔 불러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세대를 넘나드는 화합의 노래였다는 평가를 들었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이별한 남친 못잊는 친구딸 이야기 기다림에 사무친 애절한 심정 노래 |
(27) 반야월-송운선의 ‘삼천포 아가씨’ |
1961년 초. 작곡가 송운선은 반야월(작사가·가수명 진방남)로부터 노래시 한 편을 건네받는다. 노래 제목은 ‘삼천포 아가씨.’ 가사 내용이 애절했다. 이별한 임을 부두에서 기다리는 안타까운 여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던 것. “이건 실화야. 둘도 없는 내 친구의 딸 이야기거든…. 삼천포에서 약국을 하며 혼자 살아. 처녀로서….” 노래시에서 감동을 받은 송운선은 가수 은방울 자매를 떠올리며 그 자신이 주인공이 돼 곡상을 다듬는다. 그리하여 발표가 되자마자 ‘삼천포 아가씨’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야말로 빅히트였다.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어린 나를 울려놓고/떠나가는 내 님이시여/이제 가면 오실 날짜/일 년이요, 이 년이요/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삼천포 내 고향으로. 조개껍질 옹개종개/포개놓은 백사장에/소꿉장난 하던 시절/잊었나 내 님이시여/이 배 가면 부산 마산/어디든지 가련마는/기다려요 네, 기다려요 네/삼천포 아가씨는.’ 1950년대 후반. 가수 진방남(반야월)일행은 진주에서 삼천포로 향한다. 공연을 위해서였다. 삼천포는 우뚝 솟은 와룡산을 뒤로하고 한려수도와 마주한 항구.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부산, 마산, 통영, 고성, 남해, 하동, 여수로 가는 여객선과 연락선은 뱃고동을 울리며, 잔잔한 바다를 다니곤 했다. 이뿐만 아니라 통통배며, 고기잡이 어선들이 그림처럼 떠있었다. 진방남은 삼천포 수산 시장에 들려 친구의 딸이 좋아한다는 전어 멸치 갈치 젓갈을 사 들고 약국을 찾았다. 친구의 딸은 초췌해 있었다. 큰 눈에는 어딘가 수심이 가득했다. 한 남자를 못 잊는 빛이 얼굴에 역력했던 것. 여고를 갓 나와 사귀게 된 삼천포 청년. 그러나 풋풋하던 이 사랑은 오래가질 못했다. 방학 때면 고향을 찾아오던 청년은 고시를 핑계로 소식을 뚝 끊었기 때문.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돌아올 사람을 위해 약국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기다렸으면 됐지. 언제까지 이러면서 살래? 올 사람이면 벌써 왔지…. 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이참에 정리하고 서울에 가려무나.” “전 기다릴래요. 그 사람이 올 때까지.” 1960년. 친구가 지병으로 별세하자 진방남은 친구에 대한 애도의 노래시로 ‘삼천포’ 아가씨를 쓴다. 청순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에 감동한 나머지…. 이 노래의 작곡가 송운선은 법대를 졸업했지만 음악을 접을 수 없었다. 연가곡의 달인 그는 ‘쌍고동 우는 항구’ ‘삼천포 아가씨’ ‘무정한 그 사람’ ‘영산강 처녀’ ‘하동포구 아가씨’ 등 히트곡을 쏟아낸다. ‘쌍고동 우는 항구/ 쌍고동이 울어대면 갈매기도 울었다네/ 마도로스 사랑이란 이별도 많드란다/ 파이프 입에 물고 /잘있거라 손짓하던 정든 님도 울었다네 갈매기도 울었다네’ (‘쌍고동 우는 항구’ 중에서) 가수 은방울 자매는 그리움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 마치 은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듯 고운 음색은 조화를 이뤄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반. 솔로 가수로 각각 활약하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부산 송도 바닷가에서 듀엣을 결성한다. 동갑내기지만 박애경은 키가 좀 커서 큰 방울. 김향미는 작은 방울이 된다. 이제 박애경은 타계하고, 김향미는 캐나다에서 선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마포종점’을 마지막 히트송으로 남기고. 1997년엔 서울 마포구에 ‘마포종점’ 노래비가 세워졌고, 2005년에는 경남 사천 삼천포항에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졌다. 애잔하면서도 청아한 음색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은방울자매의 하모니를 기념하기 위한 노래비들이다. 2011년부터 열리고 있는 ‘삼천포 아가씨 가요제’는 올해로 두 번째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에서 실시되고 있다.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의 열정 없이 누가 이 행사를 추진하겠는가. 역사에 찬란하게 남을 ‘삼천포 아가씨’의 가요제를. 삼천포가 배출한 박재삼 시인의 문학관과 함께 삼천포 아가씨의 노래와 동상은 영원히 빛나리라. 삼천포 시민의 긍지를 모아 세워 놓았기에….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경상도 아가씨 끈끈한 순정 담아 부산 떠나는 피란민 애환 읊조려 |
(28) 남인수-박시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
‘판문점 회담’이다, ‘휴전 회담’이다 하면서 질질 끌던 6·25전쟁은 이제 이쯤에서 끝내려는 모양이다. 생각하면 무엇을 위해서 싸웠던가. 이참에 통일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더 많은 피를 흘려야겠지만…. 1952년 어느 가을날. 유호와 박시춘 명콤비는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생각대로 부산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유호 씨. 우리도 언젠간 서울로 돌아갈 것 아뇨? 피란민들 참 고생 많았지. 물도 귀해서 제대로 못 마시고, 단칸방이나 판잣집에서 10여 명의 가족이 새우잠을 자고….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울고 불고, 국제시장엔 발붙일 곳도 없고…. 그렇지만 말이오. 살면 고향이라고 부산에 정을 붙인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래서 잊지 못할 사연이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거요. 부산 사람들한테 신세도 많이 지고 떠나기는 하겠지만, 그동안에 이렇게 저렇게 얽힌 정(情)…. 그런 노래를 하나 남기고 갑시다.”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를 상태였지만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숙소로 오자 박시춘은 기타를 잡았다. 멜로디가 튕겨져 나왔다. 유호는 노래시를 가다듬었다. 부산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떠올리면서 노래시를 써내려 갔다. “서울 가는 12열차에 홀로 앉은 젊은 나그네….” 12열차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8열차니 30열차니 하면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엔 등불이 존다….” ‘삐익ㅡ’ 하고 기적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경상도 아가씨가 슬피 우네/이별의 부산 정거장….” 박시춘은 남인수에게 곡을 주었다. 한두 번 나직이 불러보고 난 남인수는 빙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는 목청을 돋우어 정식으로 불렀다. 남인수 특유의 그 맑은 목소리가 부산을 떠나는 피란민들과 보내는 경상도 아가씨의 이별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박 선생님 좋습니다.” 남인수는 앉은 자리에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연거푸 불렀다. 그것이 나중에 취입이 되어서 폭발적인 히트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호가 말하는 ‘남인수가 빙긋이 웃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남인수가 악보를 받고 몇 번 노래를 흥얼대다 빙긋이 웃을 땐 이미 노래가 자신의 마음에 든다는 메시지. 그리고 히트의 조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한 많은 피란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이별의 부산 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기적이 운다/쓰라린 피란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이별의 부산 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이별의 부산 정거장.’ 1953년에 발표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어려 있었다. 이뿐이겠는가. 경상도 아가씨의 끈끈한 순정도 담겨 있었다. 유호와 박시춘과의 우정은 3년간의 피란살이를 함께할 만큼 돈독한 사이였던 것. 작품상으로서는 바늘과 실. 그리고 찰떡 궁합이었다. 남인수 또한 그랬던 셈이었고…. “내 그럴 줄 알았데이. 남인수 씨가 빙긋이 웃으면 대박이 터진다니까…. 일제강점기 때 ‘울며 헤어진 부산항’을 장세정 씨에게 주려고 연습시키는데, 이게 도무지 안 되지 뭐야. 옆에 있던 남인수 씨가 곡을 듣고 빙그레 웃기에 남인수 씨더러 불러보라고 했지. 그런데 이게 일을 냈어. 대히트였지 …. 헛헛.” 역시 대박이 터졌다. 당시 레코드 사상 초유의 판매 기록을 내고 말았다. 이 노래, ‘이별의 부산 정거장’….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이야기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가슴에 흐르는 江에 띄운 꽃편지… 그립고 애틋한 고향의 향수 달래 |
(29) 박춘석-나훈아의 ‘감나무골’ |
소년 시절 나는 방랑벽(放浪癖)이 있었다. 특히 가을이면 더 그랬다. 가을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보게 되면 나도 구름 따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내 고향은 백두대간의 남쪽에 솟은 금오산(일명 소오산) 아랫마을. 팽나무, 뽕나무, 감나무로 둘러싸인 돌담투성이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서 있는 감나무에서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탐스럽게 익을 무렵이면 소나무 숲을 스치던 솔바람 소리도 숨을 죽였다. 그때 가을은 내 마음의 풍금. 고요한 밤이면 산 너머 한려수도에서 아련히 뱃고동 소리가 들려 왔다. 주교천을 따라서 섬진강에 이르는 갈대숲은 서로 살갗을 맞대면서 가을바람에 흐느꼈다. 내 나이 열한 살. 나는 초등(국민)학교 5학년. 어느 날 금오산에서 둥근 달이 솟아오르자 달빛을 따라 섬진강에 이른다. 주교천 뚝길을 걸어 매곡재를 넘었다. 그리하여 다시 들길을 걸어 섬진강에 이르는 길은 30리나 됐다. 하지만 나는 지루하지가 않았다. 달밤에 취했고 이름 모를 들꽃에 취해서 걸었던 것이다. 이뿐이겠는가. 달빛과 함께 메밀꽃 향기는 마냥 나를 취하게 했다. 그 무렵. 나는 한 소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동급생.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전란을 피해 서울에서 전학 왔던 것. 나 역시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왔기에 우리는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조숙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문학 재능 또한 뛰어났다. 작문시간이면 언제나 장원. 멋진 동시를 써서 교실 학우들을 여러 번 놀라게 했다. 아무래도 문학책을 많이 읽은 것 같았다. 그녀의 부모는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교실에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너 문학책 많이 읽었구나. 책 있으면 나 좀 빌려 줘.” 무슨 명령이라도 하듯 나는 다그쳤다. 그녀는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고, “그래, 좋아. 한번 우리 집에 와. 나는 강마을 할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녀.”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나는 방학 때 한번 찾아갈 마음이었다. 걸어서 가기엔 너무 먼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나는 달빛에 내 그림자를 앞세우고 힘든 길을 걸었다. 하지만 강마을에 이르렀을 땐 밤이 으슥했다. 세상은 그야말로 적막강산. 감나무가 유달리 많은 강마을은 등불이 꺼진 지 오래된 듯, 달빛에 휩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가에 나와 마른 갈대꽃을 접어 흐르는 강물에 띄웠다. 고운 사연을 접은 마음의 풀잎 편지를 강마을에 사는 그녀에게 띄워 보낸 것이었다. ‘흐르는 저 강물에 띄워 보낸 꽃잎편지/고운 사연 적어서 그 님에게 보냅니다/아름다운 강마을에 뻐꾹새가 다시 울면….’ 그때 이런 애틋한 연가는 나중에 ‘꽃잎 편지’라는 노래시로 발표한다. ‘가을밤’이라는 노래시 또한 그랬다. ‘달빛마저 싱그러운 들길을 혼자 가면/나락단 묶음마다 흐르는 고운 달빛/오늘처럼 오롯이 행복한 푸른 밤엔/호수 깊이 파묻힌 저 별들을/조리로 그대 함께 건지고 싶어라. 마른 잎 떨어지는 가을 길 혼자 가면/등불이 켜져 있는 마을엔 푸른 달빛/오늘처럼 그대가 그리운 가을밤엔/언제까지 호수에 조각배 띄워 놓고/가을밤이 다 새도록 노젓고 싶어라.’ 내 소년 시절은 수난시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관통한 시대. 1950년대 중반 나는 고향에 대한 많은 시와 노래를 썼다. 1971년에 나훈아가 부른 박춘석 작곡의 ‘감나무골’도 그랬다. ‘산제비 넘는 고갯길, 산딸기 피는 고갯길/재 너머 감나무골 사는 우리 님/휘영청 달이 밝아 오솔길 따라/오늘밤도 그리움에 가슴 태우며/나를 찾아오시려나 달빛에 젖어. 산까치 울던 고갯길, 산국화 피던 고갯길/재 너머 감나무골 사는 우리 님/메밀꽃 향기 따라 오솔길 따라/오늘밤도 풋 가슴에 꽃을 피우며/나를 찾아오시려나 달빛에 젖어.’ ‘꽃잎 편지’‘도라지 고갯길’‘하동포구 아가씨’‘내 소년 시절’‘사랑이 스쳐간 상처’‘고향의 꿈’‘고향의 그 사람’‘내 고향 남촌’‘목화 아가씨’‘어린 시절’‘순이 생각’‘한번 준 마음인데’‘너를 못 잊어’‘별아 내 가슴에’‘섬진강’‘고향의 그 사람’‘감나무골 ’등. 그립고 애틋한 고향 연가를 그리고 못 이룬 사랑의 시와 노래시를 써서 나는 발표했다. 내 가슴에 흐르는 고향의 강, 섬진강에 띄운 꽃편지였다. 가수 활동을 접고 있는 나훈아. 그는 지금 은둔생활을 하면서 창작에 집념하고 있다. 강화도와 하와이는 그의 창작산실. ‘여자이니까’‘사랑’‘연락선’‘홍시’ 등은 최홍기(나훈아 본명)의 작사·작곡 노래. 그러나 작가로서의 창작은 좋지만 나훈아는 다시 무대에 서야 한다. 국민가수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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