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실패한 첫 앨범 ‘눈물의 해협’과 同曲 가사 다르게 애틋한 사랑 노래 인기 |
⑦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
1938년 무명가수 강문수(남인수의 본명)는 이부풍 작사·박시춘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일약 ‘가요황제’가 된다. 그의 나이 19세……. 하지만 불세출의 가수 남인수도 초기에는 무척 고전했다. 취입한 노래마다 불발탄이었다. ‘눈물의 해협’ ‘마지막 선물’ ‘희망의 노래’ 등은 박시춘 곡인데도 인기와는 인연이 멀었다. 그 뒤 손목인 작곡의 ‘사랑도 싫더라 돈도 싫더라’ ‘범벅 서울’ 등을 이어 취입했지만 역시 참패였다. 1938년 10월18일. 경남 진주 봉래골(동)에서 태어나 그 곳 보통학교(초등)를 졸업했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 진학은 애당초 포기해야만 했다. 양복 재단 기능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엔 가수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노래도 잘했지만 하모니카에서부터 장구나 북치는 솜씨도 걸출했다. 음악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 꼭두새벽……. 디벼리(현 진주농전과 준지농원 사이)에서 울창한 대숲을 향하여 터져라 발성법을 익혔다. 남강 건너 바위산을 향해 소리를 질러 그가 지른 소리가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거리는 100m 정도가 됐다. 이로써 그 자신의 성량을 가늠했다. 남인수는 한때 노래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일본으로 뛰기도 했다. 노래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구 공으로 실컷 고생만하다 귀국해야만 했다. 19세 되던 해 남인수는, 서울의 시에론레코드사(지금의 충무로에 있던)를 찾았다. 문예부장이자 작사가였던 박영호는 남인수의 노래를 듣고서는 즉석에서 전속가수로 받아들였다. 이 당시 문예부장의 끗발은 대단했다. 가수를 살리고 죽이고는 문예부장의 손안에 있었다. 박영호는 ‘정한의 밤차’ ‘물방아 사랑’ ‘번지없는 주막’ ‘세세년년’ ‘짝사랑’ 등 명가요의 가사를 썼던 사람이다. 박영호는 명작곡가 박시춘에게 쪽지를 전했다. ‘그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가수다. 타고난 목소리, 잘생긴 용모 등 가수로서의 자질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현해탄(玄海灘) 초록 물에 밤이 나리면/님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서글픈 파도 소래 꿈을 깨우는/외로운 수평선에 짙어 가는 밤/님 찾아 고향 찾아 흐른 이십 년/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물위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면/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남인수의 첫 취입곡이 결정됐다. ‘눈물의 해협’……. 망향의 한(恨)을 담은 노래였는데 반응은 허망했다. 이 쇼크로 박시춘은 작곡에 손을 떼고 ‘낭랑 좌극단’의 악단장이 돼 전국을 유랑한다. 이 때 눈물의 해협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은 OK레코드 사장 이철은 박시춘을 찾았다. “박 선생님, ‘눈물의 해협’곡에다 다른 가사를 붙여 봅시다. 좀 더 구슬픈 가사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작사가 이부풍에게 작사를 의뢰해 탄생한 것이 ‘애수의 소야곡’이다. 이부풍은 ‘외로운 가로등’ ‘해조곡’ ‘맹꽁이 타령’ 등을 작사했던 사람.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은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이로부터 ‘박시춘·남인수 30년 콤비’의 서막이 열린다. 그러니까 눈물의 해협과 애수의 소야곡은 곡목과 노래시만 다른 이명동곡(異名同曲)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가/모두가 흘러가면 덧없건마는/외로이 흐느끼며 우는 이 밤은/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남인수는 왜 전설의 가수인가. 노래는 바로 우리 삶의 정서……. 그래서 인생의 향기다. 고달프고 궁핍할 땐 노래가 있어 위안을 받고, 기쁘고 즐거울 땐 신바람이 나서 또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노래는 진실이기에 그런 것이다. 같은 곡에 똑같은 가수가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은 왜 ‘애수의 소야곡’에 더 감동을 받았을까. 노래의 내용 때문이다. 그 시대 현실을 직시한 메시지를 이 노래시는 간결하게 나타내지 않았는가.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단념하려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고백을…….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북간도 동포의 애환 고스란히 恨서린 가락으로 서러움 더해 |
⑨ 백난아의 ‘찔레꽃’ |
‘찔레꽃’은 그 이름처럼 가시가 있는 꽃. 하지만 우리는 궁핍했던 어린 시절에 밭두렁에서 언덕 위에 핀 찔레꽃에 처음 돋는 새순(筍) 껍질을 벗겨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인가, 눈물겹도록 정다운 꽃이 찔레꽃이 아니던가. 1943년 8월 어느 여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패전 위기에 발악하던 일제는 강제징병제 동원령을 내린다. 학생은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사지(死地)에 내몰리고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갔다. 징집과 함께 징용이 실시돼 한반도에 젊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징용 영장을 받은 우리 동포들은 비행장 노역자로, 탄광 광부로, 부두에서 막노동하는 잡부로 일하면서 혹사당했다. 찔레꽃은 우리 민족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꽃이다. 빛깔이 호들갑스럽지도 않은 은은한 향기로 열정과 끈기를 나타낸다. 북간도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 질곡의 역사 속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동포들의 개척지다. 물론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이기도 했다. 만주 지린(吉林)성은 남동쪽의 왕칭(王淸), 옌지(延吉), 허룽(和龍), 훈춘(琿春)의 4현을 말하며, 북간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함경북도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동해 바닷가의 연해주(沿海州)를 끼고 있는 것이다. 1943년. ‘불효자는 웁니다’의 작사가 김영일이 북간도에 갔을 때는 음력 5월쯤, 그러니까 6월이었다. 찔레꽃이 한창 피는 모내기철에 함경북도를 통과하는 간도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북간도에 사는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리 동포들의 삶의 역사가 밴 터전이라서 그런가. 북간도 찔레꽃은 유난히 붉고 아름다웠다. 민족의 애환이 꽃잎마다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좀 보게나. 이 아이가 그토록 자네를 따르던 정순일세. 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해서 내가 서둘러서 시집을 보냈지…. 큰오빠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 가장으로서 말일세.” 보통학교 졸업 때 찍은 사진에서는 정순이가 세 동무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꽃송이 같은 처녀들의 탐스러운 얼굴이었다. “정순이 친구 중에서 한 처녀는 정신대로 끌려갔다지 뭔가….” 서울에 돌아와서도 김영일은 친구의 이야기를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북간도 찔레꽃과 함께 사진 속의 세 동무를 떠올리면서 노래시를 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배긴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날아드는 북간도(北間島)/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백난아는 제주도 태생이다. 그러나 함경북도 청진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가족이 모두 청진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풍부한 성량과 구성진 가락의 소녀가수 오금숙(백난아의 본명)은 15세 나이로 태평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콩쿨대회’에서 1등으로 뽑힌다. 심사위원은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작사가·시인·희곡 작가)를 비롯하여 천아토(작사가 겸 레코드사 기획담당), 김교성(작곡가), 이재호(작곡가), 그리고 가수 백년설 등이 맡았다. 당시 태평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백년설은 오금숙에게 백난아(白蘭兒)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난초처럼 곧고 순결한 품위를 항상 지니라는 뜻에서다. 난초처럼 한평생을 청아하게 살다가 찔레꽃같이 아름답게 그리운 노래들을 쏟아 낸 가수 백난아. ‘아리랑 낭낭’을 부르고, ‘직녀성’ ‘갈매기 쌍쌍’ ‘낭랑 18세’ ‘금박댕기’ 같은 명곡을 남기고 그녀는 갔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찔레꽃은 피었다. 찔레꽃의 작곡가 김교성의 별명은 ‘콩쿨대왕’이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인가수 선발전을 하도 많이 열었기에 붙여진 것이다. ‘등외 입상’이라는 제도는 그가 만든 것이다. 설령 노래는 당선권에 못 들어도 상을 많이 배려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것이라 하겠다. 작사가 김영일. 작곡가 김교성. 가수 모두 타계했지만, 노래는 무엇이기에 이렇듯 가슴을 저미는가. 찔레꽃 한(恨)이여, 서러움이여, 그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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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동생 잠든 국군묘지 다녀온 날 밤 6·25참전용사 진혼곡으로 만들어 |
⑩ 전오승의 ‘전우가 남긴 한마디’ |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그리고 내일은 현충일이다.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야/정말 그립구나 그리워/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정의의 사나이가/마지막 남긴 그 한마디가/가슴을 찌릅니다/이 몸은 죽어서도 정말/조국을 지키겠노라고.’ 이 노래 ‘전우가 남긴 한마디’가 말하듯 6·25전쟁 참전용사들은 ‘전쟁에 핀 꽃’이었다. 그리고 ‘평화의 나팔수’였다. 작곡가 전오승 씨의 동생 전기승 씨도 그랬다. 공산주의가 싫어 평안북도 진남포에서 월남한 전오승 씨 가족들은 서울로 와서 살았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생은 전쟁터에 참전한다. 의로운 자기희생 없이 조국을 지킬 수 없었기에. 그러나 북진하던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친다. 유엔군의 전차포가 북쪽을 향해 작렬했지만 갈까마귀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오는 저들 중공군들의 인해전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죽여도 죽여도 밀려오는 갈까마귀떼 군단…. 하늘에서는 네이팜탄이 떨어지고 참호 속에서 적을 향해 갈겨대는 총탄이 빗발친다. 뿐이겠는가. 실탄이 떨어지면 육박전. 서로 엉켜서 나뒹굴었다. 그야말로 피가 튀는 목숨을 건 싸움터였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전사자가 속출했다.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 뺏고 뺏기는 불바다 격전지에서는 주인이 따로 없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전기승 병사는 이 전투에서 머리와 다리에 부상을 입는다. 병원에 실려온 그는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냥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전우애로 뭉친 전우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하지만 이 전쟁터에서 그는 산화한다. 전우를 구출하려다 일어난 일이었다. 동생의 전사 통지를 받은 전오승 씨는 울 수도 없었다. 동생이 선택한 장렬한 죽음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 전쟁터에 나갔을 때부터 동생은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1978년. 전오승 씨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그러나 조국 땅 국군묘지에 잠들고 있는 동생을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민을 가기 전에 전오승 씨는 국군묘지를 찾았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전오승 씨는 그동안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진 한(恨)을 비로소 쏟아 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동생에 대한 그리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진혼곡이었다. ‘전우가 못다했던 그 소망/내가 이루고야 말겠소/전우가 뿌려놓은 밑거름/지금 싹이 트고 있다네/우리도 같이 전우를 따라 그 뜻을 이룩하리/마지막 남긴 그 한마디가/아직도 귀에 쟁쟁한데/이 몸은 흙이 되어도 조국을 정말/사랑하겠노라고―’ 전오승 씨는 이 진혼가를 만들면서 울었다. 아무리 과묵한 성격이지만 이 때만은 눈물이 쏟아졌다. 노래를 부른 허성희 씨는 전오승 씨의 애제자. 스승이 이민을 가자 그녀 또한 해외로 떠난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그녀가 부른 첫 노래이자 마지막 노래일지도 모른다. ‘과거는 흘러갔다’ ‘과거를 묻지마세요’ ‘방랑시인 김삿갓’ ‘효녀 심청’ ‘장희빈’ ‘경상도 청년’ ‘백마야 울지마라’ ‘휘파람 불며’ ‘사랑의 송가’ ‘푸른 날개’ ‘해피세레나데’ ‘인도의 향불’ ‘미사의 종’ ‘아리죠나 카우보이’ 등 많은 명가요를 남긴 전오승. ‘즐거웠던 그날이 올 수 있다면/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 돌아가서/지금 내 심정을 전해 보련만/아무리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잃어버린 그 님을 찾을 수 있다면/까맣게 멀어져간 옛날로 돌아가서/못다한 사연들을 전해 보련만/아쉬워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1967년에 발표한 정두수 작사, 전오승 작곡. 여운이 부른 ‘과거는 흘러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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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1·4후퇴… 피란민 넘친 부산… 시대 아픔 담은 ‘피맺힌 노래’ |
(11) 강사랑-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이 끔찍한 참상을 나는 눈을 뜨고서는 볼 수 없었다고 노래로 전하리라.” 1953년 어느 여름날. 작사가 강사랑 씨는 1·4 후퇴 당시 기록영화 ‘흥남부두 철수상황’을 보면서 격분한 나머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압록강 부근에까지 진격하던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의 추위와 또 보급로가 너무 길었기에 장진전투에서 후퇴한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들은 흥남부두에 대기 중이던 미해병대 L·S·J에 오르고 있었다. 무려 10만 명이나 넘는 우리 피란민 또한 이 배를 얻어 타려고 흥남부두에 구름떼같이 몰려들었다. 쌩쌩-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피란 봇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진 피란민들은 가족과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 속에서 그만 손을 놓치고 만다. 밀리고 밀리는 피란민의 행렬. 누가 이 인파를 막을 수 있겠는가. 아비규환. 그야말로 흥남부두 철수상황은 아비규환이었다. 헤어진 가족들을 찾는 처절한 목소리는 피맺힌 절규였던 것. 하지만 이 절규 역시 이내 눈보라 속에 파묻혀 버린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보았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 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이 노래에 응축된 ‘굳세어라 금순아’는 당시 피란민의 주제가였다. 임시수도 부산은 자유를 찾아 몰려든 피란민들로 넘쳐났다. 영도다리 부근과 용두산, 그리고 보수동 일대는 따닥따닥 붙은 판자촌이 됐다. 광복동과 남포동 거리, 또 영도다리는 헤어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헤매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찾는다. 그때 약속한 영도다리로 나오라, 기다리고 있겠다’라는 벽보가 즐비하게 나붙었다. 영도다리는 헤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기약한 곳. 그러니까 영도다리는 만남의 장소였다. 밤이 늦도록 사람들로 붐볐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데/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1절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의 철수상황을 그렸다면, 2절은 부산 피란생활의 참담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살고 있다는 건 바로 금순이 너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굳세게 살아다오 금순아! 전쟁이 만들어 낸 전쟁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실향민의 주제가로서 이산가족을 찾는 피란민의 노래로서 부산항 하늘에 울려 퍼졌다. 아니, 핏빛 노래 바람으로 뒤덮은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현실이기에 너도 나도 목청껏 불렀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살아만 다오/ 북진통일 그 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 보자’ 이 노래의 작사가 강사랑 씨는 언론인 출신으로 마당발이었다. 가요계와 레코드계에도 친한 사람이 많았다. 작곡가 박시춘 씨와도 절친해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노래시를 쓰게 된다. ‘감격시대’ ‘서귀포 사랑’ ‘아리랑 목동’ ‘뒤져본 사진첩’ ‘사랑찾아 칠백리’ 등이 있다. 가수 현인은 부산 영도 출신으로 이 노래 무대가 바로 그의 고향이었다. ‘초록바다 물결위에 황혼이 오면/ 사랑에 지고 새는 서귀포라 슬픔인가/ 임떠난 부두에 울며불며 새울 때/ 칠십리 밤 하늘에 푸른 별도 슬피 운다 그리워도 보고파도 아득한 바다/ 물새도 울며새는 서귀포라 눈물인가/ 동백꽃 향기에 휘감기는 옛 추억/ 칠십리 해안선에 서리서리 서린다.’ 1958년에 발표된 강사랑 작사, 나화랑 작곡에 송민도가 부른 ‘서귀포 사랑’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제 영도다리 위에 노래비가 세워져 그 시절 참담함을 말해주고 있다. 작사가 강사랑, 작곡가 박시춘, 가수 현인. 세 사람 모두 타계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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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포성멈춘 戰場, 잠시 고향생각… 구슬픈 노래시로 그리움 달래 |
(12) 신세영의 ‘전선야곡’ |
1952년 여름 어느 날.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은 부산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제주도 훈련소의 군예대가 부산을 찾아와서 군인과 경찰 가족, 그리고 시민을 위한 사기 진작 및 단합을 위해서였다. “유호 씨. 우리 군가라기보다 진중가요 같은 것을 하나 만듭시다.” 유호는 얼핏 생각이 나질 않았다. “지금 일선에서는 서로 밀고 밀리고 하는 모양인데, 전투가 소강 상태일 땐 군인들이 어떻게 지낼까?” “글쎄요?” “일선과 후방, 군인 나간 사람과 그 가족들….” 박시춘은 기타를 퉁겼다. 단칸짜리 어두컴컴한 방…. 유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어린 나이에 일선 참호에서 적진을 노려보고 있을 우리 국군들이 떠올랐다. 가을이 되면 가랑잎도 날릴 것이고, 겨울이면 눈보라도 칠 것이다. 총을 겨드랑이에 껴안은 채, 잠시 고향 생각도 할 그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노래시는 쉽게 나왔다. 2절도 함께 이어졌다. ‘전선야곡’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3절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노래의 마무리이기 때문. 노래는 언제나 3절이 압권이어야 한다. 백미는 모두 거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유호 씨. 내친김에 3절까지 완성해야 할 게 아니오. 퍼뜩 쓰고 우리 나가서 한잔 쭉 들이켭시다. 허허….”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한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 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 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어/ 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 아- 다시 한번 보았소.’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이 부른 ‘전선야곡’이다. 가수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해방가요 ‘귀국선’을 맨 처음 취입했지만 음반 상태가 나빠 음반을 못 내고 말았다. 그래서 선배 가수 이인권이 다시 불렀다. 그리하여 신세영의 데뷔곡은 ‘영너머 고갯길’로 기록된다. ‘영너머 고갯길 이백 팔십리/ 임 보고 싶은 마음에 달려왔건만/ 샛별 같은 두 눈이 너무도 차가워/ 말없이 떠나가네/ 아, 서러운 바닷길. 조국과 더불어 싸우는 몸은/ 가시밭 언덕인들 못 넘으련만/ 거짓 없는 그대 눈 못 보고 가는 게 한이 되어/ 아, 날으련다 아, 비 오는 부두야.’ 음악 재능이 뛰어난 신세영은 작곡도 했다. ‘청춘을 돌려 다오’가 그것이다. 다정다감했던 신세영. 참 열정적인 가수였다. 작사가 유호 선생과 작곡가 박시춘 선생은 누구인가. 가요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천재 작사·작곡가.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낭랑 18세’ ‘럭키 서울’ ‘고향은 내 사랑’ ‘전우여 잘 자라’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주옥같은 명가요를 탄생시킨 콤비다. 유호 선생은 극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당시 동양방송국에 ‘유호극장’이 있을 만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특히 해방가요 ‘신라의 달밤’은 고도 경주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비 내리는 고모령’은 옛날 ‘고모역’에 세워져 있다. ‘아아ㅡ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 위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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