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부른 ‘삼백리 한려수도’ 앨범 재킷 사진. | | |
‘삼백리 한려수도’는 한산섬에서 여수항에 이르는 청정해역 삼백리 바닷길을 말한다. 섬과 섬 사이로 흐르는 남빛 고운 바다는 마치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그러나 이 뱃길은 충무공의 거북선이 다니던 바다가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역사의 푸른 향기가 휘돈다. 구국(救國)의 혼령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과 ‘노량대첩’은 이 바다 한려수도에서 임진전쟁 때 승전고를 울렸던 곳.
이 때문에 유적지는 경승지와 함께 풍광에 빛나고 있다. 봄날이면 동백꽃은 새빨갛게 핀다. ‘호국의 넋’인 양 핏빛 그리움으로 거울처럼 맑은 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나폴리’라고 일컫는 충무항(통영)의 동백꽃은 유난히 붉다.
내 고향은 경남 하동.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방학 때면 한려수도 뱃길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곤 했다. 육로보다 수로가 발달했던 시대. 나는 배를 타고 많이 다녔다. 편리하기도 했지만 한려수도 경관이 좋았던 것. 풍광명미(風光明媚)는 한려수도를 두고 말함인가. 크고 작은 섬들이 촘촘히 박혀있고, 바닷물 속이 보일 만큼 맑았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통영(충무)에 접어들면 정말 아늑한 남쪽 항구와 만난다. 동백꽃 피는 통영항구. 허허바다 가덕도 앞바다는 거칠지만 거제도가 병풍처럼 에워싼 통영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아름다운 호수 같은 곳이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배가 닿기 때문인가. 그 유명한 ‘충무김밥’을 사려고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선상으로 몰려나온다. 현지에서 따뜻한 김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어느 봄날. 나는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다. 여인은 김밥을 사려고 선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여고생이었다.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있겠는가?’ 맑고 큰 눈에 오뚝한 코, 수려한 용모는 우아하고 빛났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배가 언제 삼천포 항구에 도착한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디서 내리겠는가…’ 하는 조바심 말이다.
이제 고향 금오산(일명 소오산)이 저만치 보인다. 나도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 그녀와 헤어지기는 싫었다. ‘하동 노량에 함께 갔으면….’ 나는 눈을 감았다. 간절한 기도로 내 소망을 빌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실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여수로 가는 것이었다.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는 내 가슴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동백꽃 피는 통영항에서 처음 보았던 그녀는 동백꽃 피는 남쪽 항구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저녁노을이 왜 바다에 가라앉지 못하고 붉게 타는지를 알 것 같았다.
‘노을 진 한산 섬에 갈매기 날으니/ 삼백리 한려수도 그림 같구나/ 굽이굽이 바닷길에 배가 오는데/ 임 마중 섬 색시의 풋 가슴 속은/ 빨갛게 빨갛게 동백 꽃처럼 타오르네/ 바닷가에 타오른다네. 달 밝은 한산 섬에 기러기 날으니/ 삼백리 한려수도 거울 같구나/ 굽이굽이 바닷길에 밤은 깊은데/ 섬 색시 풋 가슴에 피는 사랑은/ 빨갛게 빨갛게 동백 꽃처럼 피어나네/ 바위틈에 피어난다네.’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던 그날의 무심한 연락선과 이별의 여수 바다에 붉게 타오르던 저녁노을을 떠올리면서 쓴 ‘삼백리 한려수도’ 노래시이다. 1972년에 발표했지만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에 써놓은 것이다. 길을 가다가도, 책장을 펼쳐도 어른대던 그녀를 떠올리며 의인화해 한려수도의 바닷자락에 살아가는 ‘섬 색시’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던 그리운 여인에 대한 연가(戀歌)는 두고두고 내 노래가 된다. 아쉽고 허전할 때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을 때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움이 돼 내 노래는 남해 바다 한려수도에 넘실댄다.
‘남해바다 잔잔한 저 바다 위로/ 뱃고동을 울리면서 섬을 감돌아/ 오늘도 부산 배는 몇 번을 갔나. 다도해 사연 싣고 몇 번을 갔나/ 남해 섬 아가씨는 한(恨)이 맺히네. 남해 바다 꿈 같은 저 바다 위로/ 날 버리고 떠나간 무심한 배야/ 깨어진 그 기약은 몇 번이 되나/ 부서진 그 맹세는 몇 번이 되나/ 남해 섬 아가씨는 눈물 맺히네.’
이 노래, ‘남해섬 아가씨’는 정두수 작사, 서영은 작곡. 최숙자가 불러 크게 히트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편곡이 비탄조라고 해서 한때 금지곡이 된다.
1960년대는 가수 최숙자의 전성시대, ‘그러긴가요’ ‘개나리 처녀’ ‘눈물의 연평도’에 이어 크게 히트할 것을 기대했는데 정말 아쉬웠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비내리는 선창머리·뱃고동 소리… 노래 마디마디 애절함이 ‘절절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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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명암·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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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삼학도 ‘이난영 공원’의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 | | |
‘목포’하면 떠오르는 명소가 있다. 유달산, 영산강, 삼학도가 그렇다. 목포의 자랑이기 때문. 그래서 목포의 노래에는 이 명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1942년. 이난영이 부른 조명암 작사·이봉룡 작곡의 ‘목포는 항구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위에 놀던 옛날도/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부두.’
목포는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항구이기 때문인가. 다도해의 절경과 함께 풍광이 빛난다.
1942년 어느 봄날. 작사가 조명암은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으로부터 목포 노래시를 청탁받는다. ‘목포의 눈물’이 민족가요로 승화되자 목포 출신 이난영으로 하여금 또 한번 목포의 노래를 부르게 할 야심찬 기획이었던 것이다.
목포에 내려온 조명암은 곧바로 유달산을 찾았다. 목포의 정경이 한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역시 소문대로 목포는 아름다웠다. 목포를 둘러본 다음, 그는 부두로 향했다. 바다에는 봄 안개가 자욱했다. 비 오는 선창머리…. 똑딱선 기적소리는 여기저기서 울고 있지를 않는가. 조명암의 수첩에는 노래시가 담긴다. 목포를 또 한 차례 가요도시로 빛나게 하는 노래였다.
‘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비오는 선창머리 돛대를 잡고/이별 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나중에 3절이 되지만 이 노래시를 먼저 쓴다. 봄비가 내리는 선창머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기 때문. 작사가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을 때, 창작 작품이 이뤄지는 것. ‘목포의 눈물’과 함께 ‘목포는 항구다’는 또 한차례 목포를 노래의 고향으로 부각시킨다.
당대 최고의 작사가 조명암은 시와 희곡도 썼지만 참으로 많은 명가요 노래시를 썼다. ‘낙화유수’ ‘꼬집힌 풋사랑’ ‘울며 헤진 부산항’ ’잘 있거라 단발령’ ‘화류춘몽’ ‘총각 진정서’ ‘역마차’‘눈 오는 네온가’ ‘서귀포 칠십리’ 등….
작곡가 이봉룡은 목포 출신으로 가수 이난영의 친오빠다. ‘낙화유수’ ‘고향설’ ‘정든 땅 포구의 인사’ ‘아주까리 등불’ 등을 작곡했다.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 토월회 단장 박승희가 픽업했다. 목포공연 때 이난영이 가수가 되기 위해서 찾아 왔었다. 소녀이지만 노래를 아주 잘했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두텁던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에게 소개를 한 것이다.
그녀는 훗날 ‘목포의 눈물’ ‘울어라 문풍지’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다방의 푸른 꿈’ 등 주옥같은 명가요를 남겼다.
‘육지로 천리길을 누굴 찾아 왔던가/뱃길로 천리 바다 누굴 믿고 왔던가/종착역 앞에 두고 파도는 철썩이고/기적도 울다 멎고 뱃고동도 잠이 든/서글픈 종착역 서글픈 종착역.’
1966년 이른 봄날. 가수 남진을 위해 쓴 필자의 노래시 ‘서글픈 종착역’의 1절이다. 물론 목포를 떠올리면서 썼다. 작곡은 박춘석. 노래는 남진이 불렀다. 그로부터 4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2012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한국가요사 편찬위원’들과 함께 목포에 갔다. 흑산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열차가 종착역 목포에 도착했을 때, 일행 중에 문치갑, 하장근, 박대호, 김청일 씨는 한동안 플랫폼에 서 있었다. 이난영 씨의 노래 ‘목포는 항구다’가 스피커에서 애절하게 흘러 나왔던 것이다. 얼마나 절실한 ‘목포의 노래’인가. 그리움처럼 애틋한 ‘목포의 연가’인가. 일행들은 애절한 노래의 봄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노래시도 서정적이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가 누구인가. 가요계의 여왕, 이난영 씨가 아닌가. 우리 가요사를 빛낸 목포 출신의 ‘엘레지 여왕’이 아니겠는가. 현지에서 들으니 노래는 더 정서적이었다. 노래 마디마디가 우리 ‘한국 가요사 편찬위원’들의 가슴을 봄비처럼 흠뻑 적셨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시대 상황 맞물린 ‘첫사랑 연가’ 고국방문 조총련교포 심금 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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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황선우·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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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앨범 재킷 사진. 재일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큰 인기를 끌었다. | | |
“차갑고 감정이 없을 것 같은 외모 탓인지 스릴러, 공포 같은 어두운 느낌의 영화가 많이 들어와요. 하지만 제 본래 성격은 밝고 털털해요.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죠.” ‘차도녀’(차가운 도시여자) 박한별(28)이 ‘요가학원‘(2009) 이후 3년 만에 다시 공포물로 돌아왔다. 12일 개봉 예정인 ‘두 개의 달’을 통해서다. 숲속 낯선 집 지하실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세 남녀(박한별·김지석·박진주)가 그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호러 영화다. 박한별은 영화에서 비밀을 간직한 공포 소설 작가 ‘소희’ 역을 맡았다.
오늘의 조용필을 있게 한 첫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게 된 배경에는 시대상황이 맞물려 있었다. 1970년대의 남북관계는 극도의 긴장상황.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미친개는 몽둥이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할 만큼 북한의 도발이 잦았다. 특히 북한 추종세력, 일본 조총련계는 우리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무조건 헐뜯거나 비난을 일삼았다. 광복절 행사장에서는 문세광 총에 영부인이 운명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들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조국을 방문하도록 해. 그래야만 사고방식이 바뀔 게 아닌가.”
완강하게 거부하던 조총련계 동포들은 끈질긴 우리 정부의 설득으로 마침내 모국방문길에 오른다. 박정희 대통령은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군가에서부터 삶의 정서가 물씬 묻어나는 연가(戀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악 장르를 사랑한 것이다. ‘새마을 노래’는 그의 작사·작곡. 박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새마을 사업’에 새마을 노래를 기치로 들었다. 국민들의 사기 진작과 정서 함양을 위해서는 노래의 힘이 위대하다는 걸 대통령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1970년에 처음 취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작사·작곡가 황선우는 부산 영도 출신. 음악도이던 그는 기타를 들고 부산 바닷가를 즐겨 다녔다. 작곡도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바닷가에서 만난 여인으로부터 강인한 연정을 받고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태종대며, 을숙도, 그리고 해운대 동백섬을 거닐었다. 하지만 한창 사랑이 익을 무렵 그녀는 목포로 이사하게 된다. 해양연구소에 근무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목포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헤어지는 일은 안타깝고 애틋하다. 목포로 떠난 그녀에게서 몇 차례 편지가 왔지만, 그것도 잠시 소식이 뚝 끊기고 만다. 황선우는 작곡에 전념하면서 그녀를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녀를 못 잊어하는 ‘첫사랑 연가’였다.
1978년 2월 어느 날, 재일교포 모국방문단이 대거 한국으로 몰려왔다. 포항제철은 물론 울산공단, 구로공단, 부천공단, 창원 산업단지 등을 두루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
“못 사는 줄 알았던 조국 대한민국이 어느새 이렇게 성장했는가. 이건 기적이다. ‘한강의 기적’이다. 대한민국 만세! 우리나라 만세!”
이때 한몫을 한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모국 방문단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조용필의 절창이 감동을 주었던 것. 특히 2절 가사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가고파 목이 메여 부르던 이 거리는/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1972년에 음반이 나오면서 음악실의 DJ들 손에 의해 조용필의 노래는 조총련의 모국방문 이후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해진다. 노래는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 그래서인가. 재일교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노래는 시대상황과도 맞물려 크게 히트한다. ‘대통령이 히트시킨 돌아와요 부산항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조용필의 공연무대는 웅휘롭고 현란하다. 그래서 작은 거인이 쏟아내는 열정의 노래로 무대는 뜨거웠다. 팬들은 환호하면서 행복하고….
‘한오백년’을 비롯해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잊기로 했네’ ‘일편단심 민들레야’ ‘뜻밖의 이별’ ‘친구여’ ‘허공’ ‘미워 미워 미워’ ‘그 겨울의 찻집’ 등은 그의 황금 레퍼토리다. 라디오 드라마 ‘창밖의 여자’를 처음 작곡하면서 자작곡에 전념하게 된 그는 이후 많은 히트곡을 낸다.
“나도 민요를 부르지만, 조용필은 ‘한오백년’을 정말 잘 불렀어….”
음반 녹음실에서 민요를 취입하던 나훈아가 내게 한 말이다. 대가수가 대가수의 노래에 탄복했다는 이야기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타국만리 독일로 외화 벌이 떠나던 시절 연인끼리 가족끼리…‘이별의 아픔’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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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박춘석·문주란의 ‘공항의 이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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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스키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기를 끈 가수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이 수록된 앨범 재킷 사진. | | |
문주란은 남자의 키로 노래한다. 그만큼 음폭이 넓기 때문이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색. 그래서 ‘부드러움보다 더 강한 건 없다’는 말을 우리는 그녀의 노래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저 부산 가시나 아임니꺼…. 마, 잘 봐 주이소.” 무뚝뚝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노래는 세련미가 넘친다. 고음을 내 지를 땐 포박당한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처절한 목소리에 휘감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5세의 소녀가수 문주란은 뛰어난 가창력으로 가요계를 흔들었다. 데뷔곡 ‘동숙의 노래’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게 그녀의 한계인가. 워낙 제1탄이 빅 히트이다 보니, 그 진동 여파로 제2탄이 문제였다. 웬만해서는 제1탄을 압도하지 않으면 그 그늘에 묻히기에…. 큰 히트송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는 지난 베트남 파월장병 이후, 또 한 번 인력을 수출하기 시작한다. 서독으로 가는 광부와 간호사들. 이들은 외화를 벌려고 타국 만리로 떠난다. 그러나 지원한다고 다 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을 거쳐서 합격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광부 경험이 없었던 대학생 출신은 광부의 거친 손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연탄재와 석탄 더미에 손을 문질러댔다. 간호사 또한 서독으로 가기 위해 병원에 임시 취직해 혈관 주사 및 마사지 등을 배워야만 했다.
그날. 이들이 떠나는 김포공항은 눈물의 부두가 되고 만다. 누가 가고 싶어서 가고, 헤어지고 싶어서 보내겠는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가족끼리, 또는 젊은 연인들끼리…. 당시 김포공항은 눈물이 넘치는 이별의 부두였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한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을/ 이제 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구름 저 멀리 사라져간/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허전한 발길 돌리면서/그리움 달랠 길 없어/나는 걸었네. 수많은 사연들이 메아리쳐도/지금은 말 못하고 떠나가는 당신을/이제 와서 뉘우쳐도 허무한 일인데/하늘 저 멀리 떠나버린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쓸쓸한 발길 돌리면서/그리움 참을 길 없어/나는 걸었네’
공항의 이별은 한 시대의 아픔. 그리고 오늘의 우리 경제가 있기까지의 고통이었다. 나는 이 노래를 역사에 남기고 싶었다. 가요는 시대의 지문이 아니겠는가…. 그때 예술윤리위원회는 나중에 공연윤리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지만 사전심의가 유별났다. 퇴폐풍조 조성이라는 미명 아래 웬만한 것은 모두 잘랐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維新體制)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날 가족을 보낸 탓일까? 나는 공항의 이별에 이어 ‘눈물로 끝난 사랑’에 노래시를 다시 붙였다. 도무지 충동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도 떠나기를 아쉬워한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는 김포가도/ 창밖을 스쳐가는 싸늘한 바람/ 쌓이고 쌓였던 지난 사연/ 구름 속에 사라졌네/ 수많은 별 같은 추억을 안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밤 깊은 김포가도. 그렇게도 헤어지길 망설이던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는 김포가도/ 두 눈에 아롱지는 가버린 얼굴/ 쌓이고 쌓였던 지난 사연/ 구름 속에 사라졌네/ 수많은 별 같은 추억을 안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밤 깊은 김포가도.’
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 남진이 부른 ‘김포가도’이다. 문주란은 ‘공항의 이별’로 재기한다. 작품(작사·작곡)도 주효했지만, 무엇보다 가수가 지닌 잠재력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작가(작사·작곡)의 몫은 가수의 숨겨진 능력을 찾는 데 있다. 문주란 특유의 개성, 문주란만이 가지고 있는 호소력을 살릴 때, 노래뿐만 아니라 작품도 살아나는 것이다.
재기곡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시대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낙조’에서도 비애와 허무함을 깔고 사랑의 선율로 전개한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삶의 응어리’는 노래로 풀어야 하는 것. ‘익자삼우(益者三友)’란 뜻은 세 사람 모두 자기에게 유익한 이득을 보자는 게 아니던가. 가수는 가수대로, 작곡가는 작곡가대로 작사가는 작사가대로의 합심(合心). 그리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엮는 하모니는 히트의 비법인 것이다.
문주란이 잘 부른 ‘동숙의 노래’ ‘공항의 이별’ ‘돌지 않는 풍차’ 이외도 ‘백치 아다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얼마나 잘 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말한다. 문주란에게는 목가풍이나 연가 같은 세미 트로트 풍의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테면 ‘봄날은 간다’ ‘덕수궁 돌담길’ ‘외나무다리’ 같은 노래 말이다. 가수가 되지 않았으면 문학을 했을 그녀. 그만큼 문주란은 문학 재능도 있고 기질도 있다. 사색과 고독을 즐기는 독신녀 문주란….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일제강점기 만주로, 남양군도로… ‘시대의 아픔’… 친일가요 논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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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해림·백년설의 ‘대지의 항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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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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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의 항구’가 수록된 가수 백년설의 앨범 재킷 사진. 이 노래는 친일가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 |
말을 타고 달리던 옛날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발견하면 곧장 말에서 내렸다. 우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먼 길을 오느라 사람도 말도 목이 탔던 것. 버드나무 밑에는 으레 샘물이 있었고, 이정표도 세워져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잠시 쉬고 있는 나그네.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1941년. 남해림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이 부른 ‘대지의 항구’의 노래시는 이런 낯익은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다.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느냐/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달빛에 길을 물어/ 꿈에 어리는 꿈에 어리는 항구 찾아가거라.”
서정적인 노래시와 작곡이 조화를 이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친일가요’라는 불명예도 안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만주 이민사’를 다룬 국책 영화 ‘복지만리’ 삽입가였다는 것이다.
1930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이듬해 만주국을 세워 중국대륙을 넘보기 시작한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야욕이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척박한 황무지를 개척해 군량미를 확보하겠다는 게 저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만주 땅은 본디 우리나라의 옛터가 아니던가. 파묻힌 성터, 깨어진 기왓장 그리고 주춧돌은 무엇을 말함이던가. 우리 조상들의 혼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고구려의 정신이 스며 있었다. 높은 기상과 기개. 광개토대왕의 호랑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흐르는 주마등 동서라 남북/ 피리 부는 나그네야 봄이 왔느냐/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꽃 잡고 길을 물어/ 물에 어리는 물에 어리는 항구 찾아가거라.’
만주는 드넓다. 이 광활한 대륙에서 동서남북을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그네와 고향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하지만 이 노래는 ‘항구를 찾아가라’고 강조하지 않는가. 그것도 유자꽃 피는 항구를….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나 남해지방에서는 유자꽃이 핀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의 이미지와 뉘앙스는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연상시킨다.
‘구름도 낯설은 영을 넘어서/ 정처 없는 단봇짐에 꽃비가 온다/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바람을 앞세우고/ 유자꽃 피는 유자꽃 피는 항구 찾아가거라.’
노래의 정서는 작품성에 있다. 매끄러운 시어(詩語)들이 빛나면서 점입가경으로 들어서는 이 노래, ‘대지의 항구’. 신선미가 넘치면서 정감이 있는 건 바로 한국적 정서로 다가서기 때문.
‘달 실은 마차다 해 실은 마차다/ 청대콩 벌판 위에 휘파람을 불며 불며/ 저 언덕을 넘어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기층 대륙길에/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 백마를 달리던 고구려 싸움터다/파묻힌 성터 위엔 청노새는 간다 간다/ 저 고개를 넘어서면 새 천지엔 종이 운다/ 다함 없는 대륙길에/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
남해림(본명 김영수·1911~1979)은 서울 태생.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서 ‘동맥(動脈)’이 당선된다. 그리고 1939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소복(素服)’이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작사로서는 1940년에 발표한 이용준 작곡, 남해연이 부른 ‘비오는 부두’가 데뷔작이다. 이밖에 ‘꽃피는 마음’ ‘대지의 항구’ ‘복지만리’ 등이 있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그가 쓰고 연출했던 것.
작곡가 이재호(1914~1960)의 본명은 이삼동. 경남 진주 태생이다. 대표곡으로서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만포선 길손’ ‘불효자는 웁니다’ ‘울어라 기타줄’ ‘남강의 추억’ ‘북국 5천킬로’ ‘기타에 울음 실어’ ‘단장의 미아리 고개’ ‘고향에 찾아와도’ ‘귀국선’ ‘세세연년’ ‘산유화’ ‘무정열차’ 등이 있다. 진주고보를 졸업한 그는 1937년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항구에서 항구로’란 자작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한때 진주에서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 1951년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 KBS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다. ‘무적인’이라는 그의 필명은 등대수라는 뜻이다.
가수 백년설의 고향은 경북 성주. 본명은 이창민이다. 그가 예명을 백년설(白年雪)이라고 자작한 건,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에서도 백두산에 쌓인 흰 눈처럼 기상을 지키자는 이유에서였다. 한때 연극지망생이던 그가 가수가 된 건 주위 사람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보리 숭늉같은 구수한 음색은 특유의 멋이 있었다. ‘유랑극단’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만포선 길손’ ‘눈물의 백련화’ ‘산팔자 물팔자’ ‘어머님 사랑’ ‘일자 일루’ ‘고향설’ 등 참으로 많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암울한 ‘시대의 아픔’ 달래준 저항가요, 청바지… 통기타… ‘포크송 시대’ 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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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김민기·양희은의 ‘아침이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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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이슬’이 수록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 재킷 사진. ‘아침이슬’은 1970~1980년대 저항가요의 대명사였다. | | |
1970년에 창작돼 그 이듬해에 발표한 싱어송라이터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양희은이 취입하자,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행진곡풍의 이 노래시는 당시 암울한 시대에 아파 하던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본래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변질됐다. ‘목적가요’가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창작한 작품이 ‘저항가요’로 불려졌던 것이다.
마치 시위를 하는 운동권의 주제가처럼 여기저기서 넘쳐난 것이었다. 그래서 창작인의 손에서 떠난 작품은 이미 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양희은은 ‘아침이슬’을 신선하게 불렀다. 맑고 고운 높은 소리로 카랑카랑하게 노래시를 읊듯 뛰어난 가창력으로 노래했다. 진솔한 마음의 울림은 노래를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줬다. 가슴속에 와 닿았던 것이다.
1971년의 어느 봄날. 서강대에 입학한 열아홉 살의 양희은이 종로에 있는 ‘청개구리’모임에 갔을 때다. ‘아침이슬’을 취입한 김민기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노래이지만 그녀는 반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은 서정적이면서도 젊은 패기가 넘치는 노래였다. 특히 ‘거친 광야에 나 이제 가노라’의 노래시 대목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양희은은 친구에게 부탁해 ‘아침이슬’을 취입한다. 김민기와 양희은의 운명적인 만남은 포크송 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청바지와 통기타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관통하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자 이 노래는 지하로 스며든다. 작가 김민기 또한 기관에 연행돼 곤혹스러운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집념은 접을 수 없어 그는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남의 이름을 빌려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을편지’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작은 연못’ ‘새벽길’ 등이 그것이다.
1972년. 김민기는 고은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시에 곡을 붙인다. 최양숙이 부른 ‘가을편지’가 그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낙엽이 쌓이는 날/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낙엽이 흩어진 날/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모든 곳을 헤매인 마음/보내 드려요/낙엽이 사라진 날/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세노야 세노야/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산과 바다엔 우리가 가네/세노야 세노야/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1972년. 외국곡에 노래시를 붙인 고은 작사, 양희은의 노래다. 암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고도 한국 가요계에 우뚝 솟은 양희은.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차가운 네 눈길에 얼어붙은 내 발자욱/돌아서는 나에게 사랑한단 말 대신에/안녕 안녕 목 메인 그 한마디/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음-. 밤새워 하얀 길을 나 홀로 걸었었다/부드러운 네 모습은 지금은 어디에/가랑비야 내 얼굴을 거세게 때려다오/슬픈 내 눈물이 감춰질 수 있도록/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음-. 미워하며 돌아선 너를 기다리며/쌓다가 부수고 또 쌓은 너의 성/부서지는 파도가 삼켜 버린 그 한마디/정말 정말 너를 사랑했었다고/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음-’
양희은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원하다. 기도처럼 마음을 열고 우러나는 감정을 진솔하게 노래하기 때문이다. 가장이 없고 꾸밈이 없는 노래가 바로 양희은의 매력이다. 화려하지 않은 이 특유의 정감에 그녀의 팬들은 사로잡힌다. ‘들길 따라서’ ‘내 님의 사랑은’ ‘일곱 송이 수선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한계령’ ‘한 사람’ ‘하얀 목련’ ‘아름다운 것들’ ‘숲’ ‘못 다한 노래’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 그녀의 명가요는 참으로 많다. 삶의 거친 바다를 헤치고 나온 그녀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중년에 와서는 음폭이 넓어지고 중량감이 실린다. 깊고 오묘한 신비의 맛이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한계령’이다.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하고 돌아온 양희은에게 한계령이 다가섰다. 팬들의 사랑의 금자탑으로 솟아난 것이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같은 노래… 불황 음반계 메들리 붐 이끌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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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영광·들고양이들의 ‘마음 약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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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고양이들’의 앨범 재킷 사진. 리드보컬 임종님의 비음이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1979년 가요계를 강타했다. | | |
1978년 어느 여름날. 나는 청계천 3가에 있는 호텔에서 작곡가 김영광 씨와 함께 투숙하고 있었다. “… 물론 빠를수록 좋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빡빡하게 시간에 쫓기지는 마십시오. 문제는 대박을 터뜨리는 데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김영광·정두수)에게 작품을 청탁하고 있는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나현구 사장은 목이 타는지 연신 술잔을 비웠다.
연세대 음대 작곡과를 나온 그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했다. 그래서 레코드회사를 차리고, 그 자신이 녹음기사로 일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나현구 씨는 작곡가 나운영 선생의 조카. 그리고 가수 김세환 씨와는 이종 간이다. 또 나와는 동갑내기 친구 사이….
“두 분이 누구십니까. 당대 최고의 작사·작곡가가 아니십니까. 지금 이 불황을 타개해야 합니다.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단비….”
융숭한 대접을 받은 우리는 그날로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창작은 처음부터 비어 있는 창고가 아니던가. 없는 데서 곳간을 가득 채운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
“허- 이거 죽겠구먼. 뭐가 나와야지….”
곡상이 잘 안 떠오르자 김영광 씨는 애꿎은 기타만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곤 한 잔에 또 한 잔, 그렇게 마셔댔다. 작곡가는 작사가의 노래시가 먼저 탄생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곡이 먼저 나오면 거기에 맞춰서 노래시를 붙일 생각이었다. 누가 먼저 히든카드를 뺄 것인가. 술타령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심기는 착잡했다. ‘작사가 먼저 나오느냐. 아니면 작곡이냐.’
그런 어느 날 밤. 창밖에 내리는 밤비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길이 강렬하게 부딪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밤엔 끝낸다. 그리하여 창살 없는 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거다.’
“어때? 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 잡지 못했네/돌아서던 그 사람/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내 마음 허전하네요/생각하면 그 얼마나 정다웠던가/나 혼자서 길을 가면 눈앞을 가려/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나는 너를 잡지 못했네’
작곡가의 눈에서는 갑자기 광채가 났다. 기타 줄에서는 곡이 튀어나왔다. 일사천리…. 나중에 메들리 붐을 일으키는 ‘짜라짠짜 마음 약해서’의 탄생이었다.
이 노래시가 나오기까지는 아랍말인지, 일본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문 외우듯 중얼거리면서 작곡을 하던 김영광 씨가 아니던가. 작품이 완성되자 그날 밤으로 우리는 호텔을 뛰쳐나왔다.
임종님과 들고양이들이 부른 이 노래는 가뭄 끝에 단비. 노래의 폭발력은 참으로 위대하다.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음반계는 메들리 붐으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신인가수 주현미는 ‘쌍쌍파티’라는 이름의 메들리로 스타가 되고, 이 여파는 훗날 장윤정으로 하여금 ‘짠짜라’의 히트곡을 남긴다.
‘마음 약해서’ 히트 이후, 김영광 씨가 타고 다니던 너덜너덜한 고물차는 문짝도 잘 닫히는 새 차(車)로 바뀌었다. 빛깔이 반짝반짝 빛나는 신형차로….
“신칼라, 신칼라….” 김영광 씨의 입에서는 신형차도 ‘신칼라’, 신곡(新曲)도 ‘신칼라’라 해서 ‘신(新)칼라’라는 별명을 듣는다. 4중창단 ‘키보이스’의 창단 멤버이던 김영광 씨는 ‘정든 배’ ‘울려고 내가 왔나’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내 곁에 있어 주’ ‘여고시절’ ‘무정 블루스’ ‘잊기로 했네’ ‘잊지마’ ‘사잇길’ ‘뜻밖의 이별’ 등 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이게 뭡니까- ‘메들리 붐’이 일어났습니다. ‘마음 약해서’가 해냈습니다. 메들리 화약고에 불을 댕긴 겁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울려 퍼지는 노래 메들리를 들으면서 그가 한 말이다. 김영광 씨는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우리말이 약간 어눌하다. 그랬다. 고속도로 휴게소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마음 약해서’가 쏟아져 나왔다.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마음 약해서’가 울려 퍼졌다.
‘마음 약해서 너를 보냈네/매달리던 그 사람/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내 마음 허전하네요/생각하면 그 얼마나 정다웠던가/나 혼자서 길을 가면 눈앞을 가려/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가는 너를 잡지 못했네’
김영광 씨와 나는 ‘마음 약해서’ 외에도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와 ‘뜻밖의 이별’ 그리고 주현미의 ‘마라도’ 등을 함께 엮었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노래 뺏기고 분 삭히려 오른 용두산서 ‘작곡 공부하자’ 결심해 만든 첫 자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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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고봉산의 ‘용두산 엘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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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늦은 봄날. 가수 고봉산(본명 김민우)은 부산 광복동에 있는 용두산 일백구십사계단을 단숨에 오른다. 숨은 찼지만 울화통이 치솟을 대로 치솟은 그는 어떻게 올라왔는지를 모르게 뛰어오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배신을 할 수 있어. 그동안에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이 노래를 연습했는데, 다른 가수에게 음반취입을 시키다니….”
고봉산은 부산 앞바다가 환하게 보이는 용두산 정상에 올라와서도 씩씩거렸다. 그가 연습하던 곡은 무적인 이재호 작사·작곡의 ‘울어라 기타줄’이었다. 그러나 지방공연을 오래 하다 보니, 그만 인기 가수 손인호에게 그 곡이 넘어갔다지 않는가.
“분하다 분해!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건데, 지방공연에 나서 이 망신을 당할 게 뭐람….”
생각할수록 고봉산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그 자신이 작곡을 못해서 생긴 일인데,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날 장탄식 이후, 고봉산은 작곡에 전념한다. 여가만 있으면 피아노 앞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세아 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에게 노래시를 의뢰했다. 그것이 바로 ‘용두산 엘레지’, 일명 ‘추억의 용두산’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디뎌 언약하던/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 사 계단에/사랑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 가고/나만 혼자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아- 못 잊어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 사 계단에/즐거웠던 그 시절은 어디로 가버렸나/잘 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아- 용두산 엘레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눈물 젖은 빵의 맛을 알 수 없다’던가…. 곡이 완성되자 고봉산은 죽어라고 연습을 했다. 팬들의 반응을 보려고 용두산 공원에서 노래를 불렀다. 여기가 ‘용두산 엘레지’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반응이 좋았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작곡기량이나 소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흡족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그는 젊은 시절에 품었던 가수에의 꿈을 이루려고 서울로 남하했다. 박시춘, 문호월, 손목인, 김해송에게 줄을 대어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래서 마도로스 물을 가지고 그는 악극단의 가수로 활약을 한다.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죄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더라/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아아아- 항구의 아가씨/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항구 제2부두/한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야속더라/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테이프가 끊어지면 사랑이 운다/아아아- 항구의 아가씨/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이 부른 ‘아메리칸 마도로스’다. 그러나 고봉산은 ‘용두산 엘레지’의 히트 이후 작곡에 전념한다. 1973년, ‘잘 했군 잘 했어’를 하춘화와 불러 못다 한 가수의 꿈을 한껏 펼쳤던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흘러 왔는지/돌아갈 고향 없는 서러운 가슴/바람 불면 바람 따라 비바람 따라/그리운 그 사람 잊지 못하고/낯 설은 하늘 밑을 헤매고 있네. 어이해 첫 사랑 맺지 못하고/흐르는 강물 따라 흘러서 가나/비가 오면 비를 맞고 세월을 따라/가슴에 새겨진 그 이름 부르며/오늘도 타향 길을 흘러서 가네’
정두수 작사, 고봉산 작곡의 이 노래 ‘철새’는 남진이 처음 부르고 나중에 나훈아가 불렀다. 철새는 철을 따라 서식지를 옮기면서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렇게 못 하는 새도 있다. 늙고 병든 새는 그만큼 세월에 상처도 깊어 기력(氣力)이 떨어진다. 팔팔하던 고봉산도 그랬다. 왕성하던 의욕과 집념은 어디로 가고,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다. ‘물새 한 마리’ ‘꽃 한송이’ ‘유달산아 말해다오’ ‘섬 처녀’ ‘항구’ ‘추억의 꽃나무’ 등 고봉산의 작곡은 매우 서정적이었다.
뻥이 세다 해서 고대포(高大砲)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도 아주 겸손해졌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 인생은 다 그런 것인가. 본디 심성이 착한 고봉산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타계하고 만다. 그의 나이 60세. 요즘 같으면 한창 전성기가 아닌가. 술 한잔도 마실 줄 모르지만 필자와 함께 있을 때면 곧잘 노래를 잘하던 고봉산. 그의 애창곡은 ‘철새’였다.
‘어디서 왔는지, 흘러 왔는지/돌아갈 고향 없는 서러운 가슴/바람 불면 바람 따라 비바람 따라/그리운 그 사람 잊지 못하고.’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버스안 두 여인 이야기서 詩想 포착… 들을수록 감칠맛 나고 정감이 물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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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정훈희의 ‘그 사람 바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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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어느 봄날. 킹 레코드사 박성배 사장님이 날 찾아왔다. “정 선생님 이 노래는 조애희 씨가 부를 건데, 기막히게 한번 노래 가사를 써주십시오. 꼭 크게 히트할 것입니다. 작곡은 그의 부군인 이동기 씨입니다.”
가수 조애희 씨는 목가풍의 노래를 잘했다.
감미로운 음색은 사람을 묘하게 이끄는 매력이 넘쳤다. ‘산에서 살리라’ ‘사랑해 봤으면’ ‘숲 속의 하루’ ‘내 이름은 소녀’ 등이 그것이다. 아주 매혹적이었다.
우리가 간 곳은 분위기가 있는 아늑한 술집이었다. 정열적인 클라리넷이 울리는 가운데 이동기 씨가 일하고 있었다.
“일부러 멀리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곡을 한번 들어 보시는 게 노래시를 쓰시는 데 다소 도움이 될까 해서….”
인사를 나누고 술이 몇 잔씩 오고간 뒤, 이동기 씨는 곡을 연주했다. 한마디로 감칠맛이 났다. 정감이 물씬 풍기지가 않는가. 이게 그때 내가 받은 곡에 대한 인상이었다.
‘대중가요의 묘미는 처음 들을 때 솔깃해야 한다. 그리고 인상적이어야 한다. 들을수록 정감이 가고 쉬워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시상(詩想)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 앞줄 좌석에서 두 여인의 이야기…. 두 여인이 나누던 이야기에서 작품 테마의 실마리가 잡혔다.
“얘. 그 사람 어땠니? 지난번 만났던 사람 말야.”
“괜찮았어. 그런대로…. 눈치 하나 없는 것 빼고는….”
“눈치라니?”
“사실은 말이야. 난 그날 미장원에 들러서 가노라고 아침을 걸렀거든…. 그래서 시장했지. 근데, 점심시간이 됐는데, 그 사람 밥도 안 사주고 그냥 가지 뭐니. 바보 같이, 눈치도 없이….”
나는 별반 내키지 않는 이야기로 들었지만 ‘바보같이, 눈치도 없이’라는 말이 흥미로웠다.
“이걸로 하자. ‘그 사람 바보야’로.”
‘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 살짝쿵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 다시 한번 윙크하면 웃어 줄 텐데/ 다시 한번 윙크하면 사랑할 텐데/ 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 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 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 살짝쿵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
음반 취입 이후, 조애희 씨는 가수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너무 이 노래에 집착한 나머지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1970년, 노래의 임자는 따로 있었을까.
정두수 작사·이동기 작곡의 ‘그 사람 바보야’는 정훈희 노래로 히트한다.
어느 대목에서 매료되었을까. 방송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노래방에서….
1967년 정훈희는 ‘안개’로 데뷔, 그해 신인 가수상을 모조리 휩쓴다.
음악 집안 출신인 그녀는 아버지 때부터 가보로 음악을 시작해서 재능을 날렸다.
‘나 혼자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박현 작사·이봉조 작곡·정훈희가 부른 ‘안개’다.
‘꽃밭에서’ ‘무인도’ ‘별은 멀어도’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진 정훈희는 ‘국제가요제’와도 아주 인연이 깊었다.
‘칠레 가요제’ ‘도쿄 가요제’가 그랬다. 작곡가 이봉조 씨와 함께 세 번 참가해 세 번 모두 상위권에 입상했다.
정훈희는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 호소력과 가창력은 당대의 절창. 꽃밭에서를 들어보라. 정훈희는 노래 맛을 아는 가수…. 그래서 노래를 맛깔스럽게 부른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 루루루루 루~.’
무인도를 쓴 이종택 작사, 이봉조 작곡. 정훈희가 부른 ‘꽃밭에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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