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學兵으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삼촌 ‘물레방아 도는’ 고향 얼마나 그리웠을까 |
(53) 박춘석-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
나훈아(본명 최홍기)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물레방아 도는데’. 이는 내 고향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가 배경이다.그곳, 금오산(일명 소오산) 산자락은 내 유년기의 기억이 묻힌 곳이다.객지 생활 수십 년이 지났건만 나는 이따금씩 내 고향의 꿈을 꾼다. 금오산 산자락 밑을 길게 감도는 주교천, 징검다리가 있고 물레방아가 있는…. 아, 나는 눈만 감으면 지금도 천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고향엘 간다. 팽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뽕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남해 삼천포 등을 잇는 ‘한려수도(閑麗水道)’가 한눈에 잡히는 곳이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패전위기에서 발악하던 일제는 당시 조선 학생들까지 모조리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이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주인공인 나의 숙부님도 그렇게 끌려갔다.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이던 삼촌은 우리 집안의 희망이었다. ‘학병’이라는 띠를 두르고 생가마을 성평리를 떠나던 날, 고향과의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젊은 날을 마감했다. 주교천은 소오산 산자락을 길게 휘도는 이 지역 고전면의 모천(母川). 돌담마을 성평리 앞을 흐르는 이 주교천의 징검다리는 시냇물을 건너가기 위해 놓여져 있었고, 물레방아는 저만치 살대밑(竹田) 물방앗간에서 돌아갔다. 주교천 시냇물을 안고…. 할아버지는 이날 이후부터 싸리문을 부여안고 아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 오나, 하마 오나….” 피를 말리는 그런 세월이 3년이나 지났건만 한번 간 삼촌은 영영 올 줄 몰랐다. “전쟁도 끝났다 카는데 가는 왜 못 오는고?” 기다림에 지쳐버린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때 국민학생이던 나와 머슴만을 데리고 금오산에 올랐다. 멍석을 깔고 마련해 온 음식을 그 위에 놓았다. 할아버지는 자식의 무사귀향을 산신령께 빌었던 것이다. 난 그때만큼 슬픈 얼굴을 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동네에 등꽃이 하나둘 필 무렵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 해, 감꽃이 무더기로 떨어지던 날, 삼촌은 하얀 천이 휘감긴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 ‘순식이 삼촌’은 그렇게 젊은 날을 마감했다. 전쟁터에서 삼촌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물레방아 도는 고향산천’을 떠올렸을 것이다. 삼촌의 꽃상여가 주교천을 지나던 날, 나는 불현듯 삼촌이 그리워 목이 터져라 삼촌을 불러댔다. “식이 삼촌, 식이 삼촌!” 무정한 메아리만 내 귓전을 맴돌 뿐 한번 간 삼촌이 부활하리는 만무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할아버지는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떴다. 70줄을 넘기면서 나는 점점 고향의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다. ‘하동포구 80리’며 ‘물새’며 ‘재첩국’이며 ‘김국’이며…. ‘물레방아 도는데’(사진)를 작사할 무렵 나는 이미 서울사람이었다. 1972년 봄, 나는 타향살이 6년 만에 길동에다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다. 본디 돈 버는 데는 젬병인 나를 따라 살며 모진 고생을 하던 아내는 집칸을 마련하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다섯 살짜리 큰딸아이와 두 살배기 둘째딸을 위해 방을 마련해 주고 예쁜 커튼까지 쳐 주었다. 내친 김에 내 방에까지도 커튼을 쳐 주고, 또한 어항도 들여놓았다. 봄 햇살을 이고 우리 집은 정말 근사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훈아를 위한 작사를 해야만 하는데, 단 한 줄의 가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구레코드사는 나훈아의 전속 기념음반을 준비하고 있어 아주 급박했다. 1968년 ‘낙엽이 가는 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바보같은 사나이’ ‘고향역’ 등을 불러 가수로 주가가 상승하고 있던 나훈아는 그 무렵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지구 레코드사로 막 전속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항 속에서 돌아가는 장난감 물레방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뽀르륵-’ 소리를 내면서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는 쉴새없이 맴을 돌았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물레방아 속에서 삼촌은 부활하고 있었다. 민족의 수난과 온갖 고초의 아픈 역사를 가슴으로 껴안으면서 남의 전쟁터에 끌려가야만 했던 숙부님이…. 순간적으로 나는 삼촌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시로 썼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서울로 떠나간 사람/천리 타향 멀리 가더니/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두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하며/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서울로 떠나간 사람/천리 타향 멀리 가더니/가을이 다 가도록 소식도 없네/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북녘 고향 향한 애끓는 그리움 절절히… 감미로운 음색에 슬픈 리듬 팬들 ‘매료’ |
(44) 김운하-오기택의 ‘고향무정’ |
1966년 설날. ‘고향무정’의 작사가 김운하(본명 김득봉)는 이북도 실향민들이 망향제를 올리고 있는 임진강에서 북녘 하늘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차츰 굵어지고 있었지만, 실향민들은 조상의 차례를 모시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김운하의 대학친구 김승철의 가족들도 그랬다. 1944년 일제 말기. 평양 숭실전문대 교수이던 승철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이때 고향 함북 웅기에 내려와 있었다. 어수선한 시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업을 하던 승철의 집안은 정어리 어장과 공장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어리 떼가 몰려다니는 서수라 바다에서 두만강이 끝나는 국경지대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승철과 일본 명지대 문학부 동창이기도 한 김운하는 학교를 졸업하자 이곳에 눌러앉게 됐다. 정어리 공장 감독관으로 김 교수의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김 교수도 이때는 어부로 변신, 아들과 김운하를 데리고 자주 고깃배를 탔다. “일본은 곧 망하게 돼! 이미 힘의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거든…. 그래서 더 힘센 강대국에 잡아먹힐 거야….” 바로 눈앞에 몰려다니는 정어리 떼나 명태를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두만강 하류가 끝나는 바다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던 원양어선들. 핏빛 낙조가 물들기 시작한 바다에 눈길을 주며 어느 날 김 교수가 들려주던 말이었다. 그런 김 교수의 예언은 얼마 가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마침내 일본은 손을 들었고 붉은 군대는 군화소리도 요란스럽게 웅기에 들이닥쳤다. 그 해방꾼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북녘 땅을 짓밟았다. 일제의 수탈로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은 것 없는 땅이건만 약탈, 강간, 체포, 처형, 유배 등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웅기 부근의 국경지대 경흥 아오지 탄광에는 끌려 온 사람들로 형무소가 넘쳐났다. “해도 너무 한단 말이야! 지금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고 미쳐 있어! 전에 일본이 그 짝이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야.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거든,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정말 큰일이야 큰일!” 한반도 허리에 38선이 그어지자, 김 교수는 아들과 김운하에게 월남하기를 권유했다.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정국에 젊은 두 사람을 붙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로 가는 게 좋겠어. 이러고 있다가는 누가 당해도 당하고 말 테니까!” 가난한 문학도에게 웅기를 떠나라는 건 괴로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떠나야만 했다. 승철과 함께 그는 38선을 넘은 것이다. 남인수가 부른 ‘항구의 청춘시’, 이인권의 ‘눈물의 청춘’, 손인호의 ‘물새야 왜 우느냐’, 이미자의 ‘임이라 부르리까’ 등을 작사한 김운하는 이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떠오르는 김민규 교수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으로 오기택이 부른 서영은 작곡의 ‘고향 무정’을 작사하게 된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산 아래/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산골짝엔 물이 마르고/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산 아래/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고향무정’을 부른 저음 가수 오기택은 ‘영등포의 밤’을 비롯해 ‘등대지기’ ‘남산 블루스’ ‘우중의 여인’ ‘아빠의 청춘’ ‘마도로스 박’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힘 있는 가창력에서 쏟아내는 성량과 감미로운 음색은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던 것. 특히 초기에 부른 ‘영등포의 밤’과 ‘등대지기’는 절창이었다.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내 가슴에 안겨오는 사랑의 불길/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1965년 라희 작사, 김부해 작곡. ‘영등포의 밤’은 당시 석탄더미로 뒤덮인 영등포를 사랑과 낭만으로 정감에 넘치게 했다. 이어서 나온 강남평 작사, 김광 작곡의 ‘등대지기’는 서정의 분수령을 이룬다. ‘물새들이 울부짖는 고독한 섬 안에서/갈매기를 벗을 삼는 외로운 내 신세여라/찾아오는 사람 없고 보고 싶은 임도 없는데/깜박이는 등대 불만이 내 마음을 울려줄 때면/등대지기 이십년이 한없이 서글퍼라. 파도만이 넘나드는 고독한 섬 안에서/등대만을 벗을 삼고 내 마음 달래어보네/이별하던 부모형제 그리워서 그리워져서/고향 하늘 바라다보며 지난 시절 더듬어보니/등대지기 이십년이 한없이 서글퍼라.’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가면무도회서 만난 연인의 슬픈 사연… 가사 제의 이튿날 전화로 불러줘 탄생 |
(45) 유호-이봉조의 ‘떠날 때는 말없이’ |
198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있는 문화회관 앞길은 조객들로 붐볐다. 작곡가이자 색소폰 주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봉조의 장례식이 연예협회장으로 거행됐기 때문. 영결식장에는 이봉조의 대표곡. ‘떠날 때는 말없이’가 색소폰의 음율에 실려 흐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똑같은 그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즐거웠죠/아, 그 밤이 꿈이었나 비오는데/두고 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떠날 때는 말 없이 말 없이 가오리다. 아무리 불러도 그 자리는 비어 있네/아, 그날이 언제였나 비오는데/사무치는 그리움을 나 어이 달래라고/떠날 때는 말 없이 말 없이 가셨는가.’ 대학 축제, 그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두 사람. 둘은 사랑하지만 결국 비련으로 끝나고 만다는 내용을 이 노래는 담고 있다. ‘한 잎의 오동잎이 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는 옛 시인의 시구처럼 이봉조도 그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종점’ ‘맨발의 청춘’ ‘안개’ ‘꽃밭에서’ ‘무인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등을 작곡한 이봉조는 55세에 세상을 떴다. 실로 아까운 나이였다. 조객들은 생전의 그의 걸걸한 목소리와 색소폰 연주를 새삼 그리워했다. 이봉조는 경남 남해가 고향. 진주중·고교를 졸업했다. 중학 시절 색소폰을 익혀 악대부장을 지냈다. 그가 음악에 눈뜬 것은 당시 진주고 음악교사 이재호의 영향이 컸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일컫던 이재호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남강의 추억’ ‘불효자는 웁니다’ ‘만포선 길손’ ‘무정 열차’ ‘북국 오천킬로’ ‘세세 년년’ ‘대지의 항구’ ‘산유화’ ‘산장의 여인’ 등의 명가요를 남긴 작곡가. 그는 어려웠던 시절, 수십 번도 더 전당포에 잡혔던 바로 그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이때의 영향으로 이봉조는 한양대 건축과를 다니면서도 음악에 열정을 쏟았다. 마침내 1965년 그는 TBC의 악단장이 된다. 이때는 이미 작곡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몰고 다니던 청춘스타 신성일·엄앵란이 출연하는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영화 음악을 맡게 된 것이다. 영화주제가 작곡은 이미 마쳤으나 노래시가 문제였다. 작사가 유호는 언젠가 이봉조를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KBS의 ‘가요무대’에서 이봉조의 추모 프로그램을, 더구나 피날레에 현미가 부르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들으면서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이 노래를 그가 작곡할 무렵, 이봉조와 나는 똑같이 ‘TBC’ TV에 전속돼 있었다. 그는 악단장, 나는 드라마 작가로 자주 만났다. 성품에 걸맞게 그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가 나에게 작사를 의뢰할 때는 언제나 하는 말이 있었다. “작사하면 유 선생님밖에 더 있습니까.” 그날도 예의 말이 오간 후 그는 영화대본 ‘떠날 때는 말없이’를 디밀었다. “곡은 다 돼 있습니다.” 이봉조는 텅 빈 스튜디오로 나를 끌고 갔다. 불도 안 켠 그곳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뭔가 흥얼대면서. “어때요? 감이 잡힙니까?” “별로 안 잡히는데….” “작사하면 유 선생님 아닙니까.” “작곡하면 이봉조고?”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로 나는 작사에 들어갔다. 이튿날 그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가사 됐죠?” “아직 안 됐는데.” “급해요, 급합니다.” “알았으니 이따 만나지.” “그럼 전화로 불러 주십시오. 작사하면 유 선생님 아닙니까.” 나는 가사를 불러 주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마음에 안 드나?” “아닙니다. 이건 틀림없이 히트할 겁니다.” “노래는 누가 부를 건데?” “노래하면 현미 아닙니까.” “이젠 작사하면 유…”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유호는 1921년 황해도 해주 태생. 본명 유해준. 네 살 때 서울로 이사. 경북고와 일본 도쿄(東京) 미대 도안과를 다녔다. 그의 히트 작사는 ‘신라의 달밤’ ‘고향 만리’ ‘비 내리는 고모령’ ‘서울 야곡’ ‘전선 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럭키 서울’ ‘전우야 잘 자라’ ‘여옥의 노래’ ‘종점’ ‘길 잃은 철새’ ‘카츄샤의 노래’ ‘임은 먼 곳에’ 등 엄청나게 많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외할머니·이모에 대한 어린시절 情恨… “애틋한 그리움에 울컥…노래시로 읊어” |
(46) 은방울 자매 ‘하동포구 아가씨’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1941년 가을. 나는 외할머님과 이모님 손에 이끌려 머슴과 함께 하동장에 갔었다. 당시만 해도 하동포구는 포구의 구실을 톡톡히 했다. 섬진강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뗏목에는 지리산의 온갖 약초며, 집채만 한 산나물더미 그리고 채소, 과일, 토종벌꿀 등이 실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멧돼지, 고라니 산토끼 같은 산짐승과 산꿩, 메추리 등 날짐승도 함께 실려 흘러왔다. 인근 항구 통영, 삼천포, 여수 등지에서도 통통배로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 장날에 몰려들었다. 그래서인지 하동장은 북적댔다. 하동포구로 넘나드는 장배와 장꾼들로 파시를 이뤘기 때문. 내 나이 다섯 살. 그때 이모님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날 외할머님은 이모님과 머슴 그리고 나를 데리고 하동장에 온 것이었다. 혼숫감 가게에 들려 이모님의 결혼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 다음, 우리 일행은 재첩국집에 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어느 집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중절모자를 쓴 악기집 주인이 멋지게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기에…. 나는 그 오묘한 하모니카 소리에 넋을 잃고 말았던 것. “두야. 이걸 갖고 싶어? 하긴 내가 결혼해서 떠나면 얼마나 적적하겠니….” 이모님은 주인에게 하모니카 부는 법을 물으면서 사줬다. 이날 이후 나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하모니카를 불어댔다. 외갓집은 울창한 대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하모니카를 부는 게 일과였다. 부모 형제가 그립고 시집간 이모님이 생각날 때면 날이 저물 때까지 불어댔던 것이다. 산 위에 오르면 하동포구가 한눈에 펼쳐졌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어느 날. 외할머님은 “두야. 그렇게 엄마가 보고 싶어?” “응…정말 많이 보고 싶어.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형과 동생…그리고 이모도 많이 보고 싶어….” “좀 참거라. 니가 일곱 살이 되면 부산 학교로 보내기 위해 아버지가 널 데리러 온다….” 나는 다섯 살 때 외갓집에 와서 일곱 살까지 삼 년간을 자랐다. 손이 귀한 외가에 차출된 셈이었다. 외갓집은 드넓었다. 안채는 외할머님과 내가 기거했고 사랑채는 외조부님이 거처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랑채는 머슴들과 그 가족들이 살았다. 청소년이 되면서 나는 동요와 동시를 쓰게 된다. 그리하여 세월만큼이나 겹겹이 쌓인 외할머님과 이모님에 대한 정한(情恨)을 훗날 노래시로 썼다. ‘하동포구 아가씨’와 ‘쌓인정’이 그랬다. 특히 ‘하동포구 아가씨’는 두 편을 써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었다. ‘하동포구 80리에 달이 뜰때면/정한수 떠놓고 손모아 빌던 밤에/부산 가신 우리 임은 똑딱선에 오시려나/쌍계사의 인경소리 슬프기도 한데/하동포구 아가씨는 잠못들고 울고 있네. 쌍돛대가 임을 싣고 섬진강 따라/정다운 포구로 돌아올 그날까지/새벽꿈에 아롱아롱 우리 임은 오시려나/쌍계사의 인경소리 임마중을 하는데 어이해서 못 오시나, 어느 날짜 오시려나.’ 은방울 자매가 부른 송운선 작곡의 ‘하동포구 아가씨’다. 그러나 이 한 편의 노래로서는 당시 올올이 가슴에 맺힌 정을 지울 수 없었다. ‘쌍돛대 임을 싣고 포구로 들고/섬진강 맑은 물에 물새가 운다/쌍계사 쇠북소리 은은히 울 때/노을진 물결 위엔 꽃잎이 진다/80리 포구야, 하동포구야/내 님 데려다 주오. 흐르는 저 구름을 머리에 이고/지리산 낙락장송 노을에 탄다/다도해 가는 길목 섬진강 물은/오늘도 굽이굽이 흘러서 간다/80리 포구야, 하동포구야/내 님 데려다 주오.’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못 박힌 ‘쌓인 정’이 어찌 노래 몇 편으로 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길어 올려도 펑펑 솟아나는 고향의 샘물. 그건 눈물이었다. 정과 한(恨)이었다. 기부천사 가수 하춘화가 부른 노래만해도 ‘알고 계세요’ ‘첫사랑 이야기’ ‘옛성터’ ‘느티나무’ ‘대관령 아리랑’ 등 참으로 많다. ‘길이 아니면 오지 말 것을, 사랑의 그 먼길을/임 찾아 왔던 길, 임 따라 왔던 길/지금은 나 혼자서/날 저문 들녘에 떨고 있는 들꽃처럼/그렇게 그렇게 쌓인 정을 잊을 수 있나요. 임이 아니면 잊었을 것을 그리움의 세월을/임 찾아 왔던 길, 임 따라 왔던 길/지금도 못잊어서/바람에 날리는 이슬 젖은 낙엽처럼/그렇게 그렇게 쌓인 정을 잊을 수 있나요.’ 사람들은 저마다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한다. 나는 고향을 소재로 67편에 이르는 하동 연가(戀歌)를 시와 노래로 썼다. ‘하동포구 아가씨’를 비롯해 ‘물레방아 도는데’ ‘삼백리 한려수도’ ‘꽃잎 편지’ ‘목화 아가씨’ ‘감나무골’ ‘고향의 그 사람’ ‘하동으로 오세요’ ‘섬진강’ ‘지리산’ ‘아랫마을 이쁜이’ ‘긴 세월’ ‘섬진강 나그네’ ‘섬진강 연가’ ‘하동 사람’ ‘시오리 솔밭길’ ‘발꾸미 포구연가’ ‘자주댕기’ ‘노량대교’ ‘내 고향 하동포구’ 등이 그것이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난소암 대수술 앞둔 생사의 갈림길… 유서 쓰듯 짧은 인생 詩的으로 풀어 |
(47) 김희갑-양희은의 ‘하얀 목련’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1983년. 양희은이 부른 ‘하얀 목련’은 가수 자신의 생사(生死)의 길목에서 탄생한 생명의 노래이다. 그녀는 그때 지병인 난소암을 수술받기 위해 경희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머리맡에 성경과 찬송가를 두고 기도를 하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양희은은 하나님께 매달렸다. 모든 걸 그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를 하게 되면 그때까지 그를 짓눌러 오던 온갖 두려움과 번민이 사라졌다. 그런 어느 날. 기도를 마친 양희은의 눈길은 한곳을 응시하게 된다. 병원 창밖이었다. 거기엔 하얀 목련이 나른한 봄빛 속에서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을까만, 대수술을 앞둔, 그것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양희은 눈에 비친 하얀 목련은 눈물나게 아름다운 것이었다. 순간 양희은의 뇌리엔 그의 짧은 인생을 정리하는 시가 스쳤다. 그가 세상에 남기는 유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우리 따스한 기억들/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거리엔 다정한 연인들/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서정적인 노래시가 아닌가. 양희은은 아직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았던지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하얀 목련’은 김희갑의 작곡으로 이듬해 취입됐다. 노래는 물론 양희은이 불렀다. 하나님을 몸으로 느끼면서 양희은은 깊은 신앙에 빠지고 마침내 찬송가를 부른다. 그는 결혼해 미국 LA에서 살다가 귀국해 지금 맹활약을 하고 있다. 가수로서 방송 진행자로서. 경기여고를 다닐 때부터 양희은은 책보다는 기타를 대하는 시간이 많았다.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 이백천 이해성 등이 지도하던 ‘청개구리 모임’이 당시 YWCA에서 주말이면 열렸다. 양희은은 통기타를 들고 이 모임에 자주 얼굴을 디밀었다. 1970년 여고를 졸업한 그는 재수 끝에 서강대 사학과에 들어간다. 그러나 1972년, 휴학을 하고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위해 동아방송을 찾았다. ‘3시의 다이알’ ‘정오의 가요산책’ ‘영시의 다이알’ 등 인기 프로를 맡고 있던 이해성 신태성 김병우는 양희은을 위해 레코드 발매 기금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사보이 호텔 뒤에 있던 ‘OB’S 캐빈’에 양희은을 출연토록 주선해 주었다. ‘OB’S 캐빈’은 젊은 통기타 가수들의 집결처였다. 조영남 김세환 트윈폴리오의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이용복 등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희은은 드디어 김민기 작사 작곡의 ‘아침 이슬’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이후 그는 그 특유의 반향이 넓고 다이내믹하면서도 어딘가 애수가 서린 음성으로 젊은층의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세노야’ ‘한사람’ ‘내 꿈을 펼쳐라’ ‘들길 따라서’ ‘내 님의 사랑은’ ‘한계령’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숲’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그는 주옥같은 노래를 남기고 있다.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하얀 목련’의 작곡가 김희갑은 평양 태생으로 안과의사인 아버지로부터 만돌린이며 아코디언, 그리고 색소폰과 기타를 배울 수 있었다. 뒤에 대구 대성고교 시절. 그는 이미 서정길 악단에 픽업될 수 있었다. 까까머리에 중절모를 뒤집어쓰고 미8군무대 밴드석에서 기타연주를 했다. 1956년 드디어 김희갑악단을 창단해 미8군무대를 누볐다. 1958년에는 일반 무대의 밴드마스터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레코딩의 기타리스트로 나서게 된다. 이와 함께 오아시스레코드사 손진석 사장의 권유로 작곡가로 변신했다. 그가 ‘하얀 목련’을 작곡할 무렵엔 영화음악을 200여 편이나 한 때여서 영화음악에는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얀 목련’에 더욱 정감 나는 곡을 반사적으로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향수’ ‘사랑의 미로’ ‘우리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그 겨울의 찻집’ 등 많은 히트곡을 낸 자곡가 김희갑. 그의 멜로디에는 항시 감칠맛 나는 한국적 서정성이 묻어 있다. 그리하여 그리움으로 친근하게 들린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가수선발시험 보러 왔던 16세 어린 소녀… ‘짝사랑’ 고복수 만나 ‘알뜰한 당신’ 됐죠 |
(48) 고복수-황금심의 ‘짝사랑’과 ‘알뜰한 당신’ |
연분이란 하늘만 아는 것이다. 대가수 고복수와 황금심 부부의 만남도 참으로 묘했다. 황금심은 말한다. “1934년, 늦가을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 나이 열넷이었지요. 언니와 함께 부민관(지금의 시민회관 별관)에 구경갔더랬는데, 거기서 고복수 선생을 처음 뵈었습니다. OK레코드사가 주관한 OK조선악극단의 공연 무대였지요. 고 선생은 온통 큰 것 투성이었습니다.” “큰 키와 선량해뵈기만 한 큰 눈…. 그 양반이 ‘짝사랑’을 부를 땐 나는 찡한 감동에 젖었습니다. 새까만 무대복에 새빨간 꽃을 달고 허공을 바라보며 허우적대며 호소하듯 부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황금동(황금심의 본명)이 고복수를 만나게 된 것은 그보다 2년 후였다. 금동이 열여섯되던 이른 봄날. 남대문의 OK레코드사의 사무실에서 두 사람의 길고 오랜 인연은 시작된다. 금동이 조선일보에 난 신인 가수 모집광고를 보고 이 사무실에 들른 것이다. “제가 가수 선발시험을 보러 간다니까 모두들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고들 하더군요. 심사위원석엔 회사사장 이철 씨, 문예부장이자 작사가인 김능인 씨, 그리고 가수로는 고복수 선생이 앉아 계셨지요.” 금동은 고복수를 보는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한다. 간신히 가슴을 가라 앉히고 ‘노들강변’과 ‘관서 천리’를 불렀는데 어떻게 불렀는지 당시에도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금동은 가요를 하나 더 부르라는 요청에 엉겁결에 그만 고복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짝사랑’을 부르고 말았다. 이때 금동은 고복수의 불길 같은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금동을 이화자 이후 최대 민요풍의 가수라는 찬사를 했다. 1921년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난 금동은 1937년 마침내 박시춘 작곡 ‘왜 못오시나요’, 손목인 작곡 ‘지는 석양 어이하리요’로 OK레코드를 통해 가요계에 데뷔한다. 하지만 작사가 이부풍에 의해 금동은 이내 빅터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게 된다. 빅터레코드사는 OK레코드사보다 당시 규모나 재정면에서 컸다. 빅터의 레코드판 한 장 값이 1원50전인 데 비해 다른 회사의 것은 1원에서 1원15전 사이였다. 금동은 3년 전속금 3000원에 매달 120원을 받는 조건으로 빅터에 전속된 것이다. 신인으로는 파격적이었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 울어서 당신 앞에 하소연할까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안타까운 가슴속에 감춘 사랑을/ 알아만 주신대도 원망 아니 하련만/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황금심과 부부의 연을 맺은 고복수는 당시 노총각이었다.인기와 돈을 한몸에 지니고 다녔지만 정작 사랑하는 여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고복수는 순진했고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 여성팬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걸려오는 여성의 전화와 밀려드는 여성의 편지를 대하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는 지방순회 공연 때면 전화가 있는 특실방만 골라서 들었다. 당시로는 전화가 있는 방이 꽤나 드물었다. 한번은 우수띤 음성의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주 공연 때였다. 인근 초등학교 앞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거기다 고복수에게 생면부지의 처지니 알아볼 수 있게끔 빨간 꽃을 꽂고 나오라는 주문이었다. 고복수는 바지에 칼날 같은 주름을 세우고 상의엔 커다란 빨간 꽃을 달고 초등학교 앞으로 총알같이 나갔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밤늦도록 그 여성을 기다렸지만 나와야 말이지. 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초등학교 앞으로 줄기차게 나갔지만 여인은 나타나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전화는 동료들의 장난질이었던 것이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아-단풍이 휘날리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후유 한숨 집니다.’ ‘짝사랑’은 가장 숭고한 것. 그래서인지 작사가 박영호는 짝사랑의 처절한 외로움을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맞은 짝사랑’이라고 승화시켰다. 사랑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작사가 박영호는 ‘시에톤 레코드사’를 비롯해 ‘태평’ ‘오케이 레코드사’의 문예부장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작사를 했다. ‘처녀림’ ‘불사조’는 그의 필명이다.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가수 꿈꾸며 고향 떠나 ‘불효자’ 진방남… 재일동포 환영식서 어머니 생각에 ‘울컥’ |
(49) 이재호-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1978년 2월 어느 날.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른 가수 진방남(본명 박창오)은 작곡가 박시춘과 함께 서울 인현동 단골 술집에서 한잔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방남은 출입구 쪽 탁자에 놓여 있는 TV에 연신 눈길을 주고 있었다. 화면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귀성단 환영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리운 고향땅을 지척에 두고 어디서 무엇을 하시느라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저 반갑고 반가울 뿐입니다.” “재일동포 여러분 고향을 그리워하신 세월이 과연 몇해나 되셨습니까? 산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온갖 수모와 고초를 받으시는 동안 여러분의 젊음은 영영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과거는 울어서 한강물에 띄워 버리고 오늘은 조국의 품에서 기뻐하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환영사에 마침내 2000여 명의 재일동포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정답고 그리운 조국을 지척에 두고 지금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타향살이를 했는지 후회가 뼈에 사무칩니다. 우리들은 불효자식인데도 조국은 우리들을 뜨겁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조국에 돌아와서야 조총련이 우리를 지금까지 속여 왔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우리조국 만세! 귀성단 권중석 대표의 답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어 여흥프로에서 김희갑이 등장해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오실 어머님을/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 해요, 다시 못올 어머니여/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못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양 바라시고/고생 하신 어머님이/어이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님.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이국에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뵈옵고 산소에 어푸러져/한없이 웁니다.’ 코미디언 겸 가수 김희갑의 구성지고 슬프디 슬픈 노래를 듣던 진방남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진방남 노래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박시춘은 중계 도중 진방남이 감쪽같이 없어진 데 처음은 무심히 넘겼으나 너무 오래라서 슬며시 걱정이 됐다. 그러나 이미 짚이는 구석이 있어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방남은 화장실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작사가 반야월로서가 아니라 가수 진방남으로 돌아가서…. 1936년 비가 청승맞게 질척거리던 어느 봄날. 스무살의 진방남은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우산도 없이 마산역으로 향했다. 그는 본디 소설가 지망생.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푸시시 한 머리를 흩날리며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진방남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울로 온 그는 양복점에 취직하여 가수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의 노래를 들어본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수가 되라고 들쑤셨다. 그는 험한 타향살이를 잘도 견디었다. 어머니만 떠올리면 금세 그는 힘이 솟았던 것이다. 1938년 봄.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한 노래 콩쿠르대회에서 그는 ‘춘몽’이라는 노래를 불러 일등을 했다. 그리하여 태평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돼 ‘불효자는 웁니다’의 노래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오사카(大阪) 스튜디오서는 ‘모친 별세’라는 전보가 도착해 있었다. 진방남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누르고 취입을 끝냈다 취입 스튜디오 밖에서는 고려성, 백년설, 선우일선, 신카나리아, 고운봉, 나성례 등 동료가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곡가 이재호는 이때 ‘불효자는 웁니다’를 녹음하기 위하여 달리는 차에서 편곡을 했다. 이재호는 ‘세세연년’ ‘북국 5천킬로’ ‘기타에 울음 실어’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남강의 추억’ ‘선유화’ ‘무정열차’ ‘불효자는 웁니다’ ‘만포선 길손’ 등 명가요를 남긴 사람. 작사가 김영일의 필명은 ‘불사조’. 일제강점기 때 그는 김두한과 더불어 종로에서 장사를 하는 우리 조선 상인들을 주먹으로 보호해 주기도 했다. ‘찔레꽃’ ‘황하 다방’ ‘쌍고동 우는 항구’ 등이 그의 대표작.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손대면 톡하고 터질것만 같은 풋사랑… 빗속 봉선화 꽃잎 보니 아련히 떠올라 |
(50) 김동찬-박현진의 ‘봉선화 연정’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1988년. 가수 현철이 부른 김동찬 작사, 박현진 작곡의 ‘봉선화 연정’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노래가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참으로 정서적인 노래이기 때문이다. 특히 발단 부문에서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봉선화라 부르리…’. 이런 함축성의 백미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원인 제공이 되었던 것이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봉선화는 아련한 추억의 꽃. 소꿉살림을 하면서 손톱에 붉게 물들이던 꽃이 아니던가.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봉선화라 부르리/더 이상 참지 못할 그리움을/가슴 깊이 물들이고/수줍은 너의 고백에 내 가슴 뜨거워/터지는 화산처럼 막을 수 없는/봉선화 연정.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봉선화라 부르리/더 이상 참지 못할 외로움에/가슴 태우네/울면서 혼자 울면서 사랑한다 말해도/무정한 너는 알지 못하네/봉선화 연정.’ 김동찬이 고등학교 때였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그는 등굣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여고생이 있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성숙했다. 봉선화 같이 탐스러운 얼굴에 교복이 꽉 쬐는 몸매는 금세라도 터질 듯했다.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시선은 뜨거워진다. 그러다가 몇 발자국 지나쳐서는 서로가 뒤돌아보고…. 눈길이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던 사춘기의 풋풋한 사랑.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어 얼굴을 붉히고…. 가슴이 뛰고…. 하지만 졸업과 함께 직장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온 김동찬은 흐느적대는 도시의 불빛 속에서 그 소녀를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본디 가수 지망생이지만 거센 세상살이 풍파 속에서 그 꿈을 접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직장을 구해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 불씨 하나는 살아 있었던 것. 노래시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었다. 작곡가 정민섭을 만나면서 노래시 ‘4월의 사랑’을 정미조의 노래로 발표한다. 이후 ‘사랑의 모닥불’ ‘어차피 떠난 사람’ ‘돌팔매’ 등을 쓰면서 작사가의 꿈을 펼친다. 1980년대 후반기는 김동찬과 박현진의 전성시대. 이 두 사람은 ‘봉선화 연정’을 비롯해 ‘네박자’ 등의 히트로 콤비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동찬은 화단을 가꾸다가 봉선화 꽃잎을 보게 된다. 비를 머금고 피어나는 봉선화 꽃잎을….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등굣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그 여학생.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여고생이 봉선화 꽃잎 속에서 부활했다. 탱자 같이 탱탱하고 싱싱하던 그때 그 여고생이…. 김동찬은 이날밤 ‘봉선화 연정의 노래시를 써서 작곡가 박현진에게 전화로 불러 주었다. 가슴에 와닿는 노래시는 작곡 또한 손쉽게 만들게 하는 것. 박현진은 바로 곡을 붙였다. 노래시 속에 멜로디가 흘렀던 것이다. “여름날에 피는 봉선화는 꽃망울이 진 후, 그 열매를 손으로 ‘톡’ 건드리면 순간 ‘팍’하고 터집니다. 잘 익은 열매는 바람만 불어도 터지지요. 그래서 씨를 퍼뜨리게 되고…. 어쨌건 건드려 주고, 터뜨려 주길 바라는 꽃이 봉선화입니다. 그래서인지 봉선화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영어 이름을 갖고 있지요.” 김동찬의 말이다. ‘봉선화 연정’이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그는 유명해진다. 집도 사게 되고 작사 주문이 쇄도했다. 작사가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것이다. 현철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봉선화가 그려진 무대복을 입었다. 열화 같은 팬들의 환호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박현진과 김동찬은 훗날 누가 먼저 죽으면 봉선화 연정의 노래비를 세울 것을 다짐한다. 작곡가 박현진은 경북 청송 출생. 그러나 그는 부산에서 성장했다. 노래를 잘하던 박현진은 가수가 되려고 했지만 신체적 조건 때문에 음악을 전공한다. 제 21사단 군악대에서 편곡을 시작으로 ‘봉선화 연정’ ‘네박자’ ‘무조건’ ‘황진이’ ‘있을 때 잘해’ ‘신토불이’ ‘뿌리고’ 등 일련의 히트곡을 발표한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가지 말라고 애원했건만/못 본 채 떠나버린 너/소리쳐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어라/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 김양화 작사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작곡하여 그 자신이 불렀던 현철은 늦깎이 가수. 그러나 ‘사랑은 나비인가봐’ ‘사랑은 별과 같이’ ‘아미새’ ‘사랑의 이름표’ ‘봉선화 연정’ 등을 부르면서 정상에 오른다. 노래 부를 때의 차오르는 감정을 꺾거나 굴리는 창법은 그 특유의 묘미. 작곡도 하는 현철은 우리 가요 산맥에 우뚝 선 가수.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봄비에 숨어버린 남빛바다의 情恨… 고국에 대한 향수 달래는 ‘망향곡’ |
<51> 가요황제로 등극한 남진의 ‘가슴 아프게’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확 트인 바다. 그리하여 시원하게 우리 가슴을 뚫리게 하는 그런 바다를 보고 싶거든 비오는 날은 피하라. 특히 봄비가 내리는 날엔….” 1966년 어느 봄날. 나는 인천 연안 부두에서 봄비를 맞으며 보이지 않는 바다를 원망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런 날에 찾아오다니….” 마음이 무겁고 허탈해지자 나는 술잔을 연거푸 비웠다. “바다는 그렇다고 하자. 비 땜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갈매기 떼는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파도소리, 바람소리, 빗소리가 들리는 부두라면….” 가수 남진이 부를 노래시가 써지지 않아서인가? 그때 나는 봄비를 탓하고 있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온통 노래시 생각뿐이었다. 이날 내가 연안 부두에 온 것은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순전히 봄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봄비소리를 듣다보면 소생하는 생명들의 숨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낭만, 그리고 서정과 설렘…. 그래서 이날 나는 아침부터 집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다가 봄비에 마음까지 흠뻑 젖어 어느 술집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대낮이라 그 술집은 한산했다. 젊은 여주인이 혼자 라디오 앞에 앉아 열심히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무너지듯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술과 해장국을 시켜놓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이 무렵은 라디오 시대였다. 그때였다. ‘부웅-’하는 뱃고동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두서너 번씩이나….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뱃고동소리는 라디오 연속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순간 누가 뒤에서 떠밀기라도 하듯 나는 후다닥 그 술집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연안 부두로 달리는 차에서도 내 눈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남빛 바다가 가슴을 열면서 출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시절 대부분을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낸 나에게 바다는 늘상 친근감으로 다가섰다. 쾌청한 날은 손에 잡힐 듯 일본 대마도까지 보이던 창망한 물굽이. 가슴이 답답할 때,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이 뚫리면서 가라앉기도 하지 않았던가. 바다가 갑자기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부산은 너무 멀었다. 단숨에 달려가기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뱅뱅 도는 이것이 무엇이기에 나를 이토록이나 ‘가슴 아프게’ 하는가. ‘가슴 아프게?’ 그렇다. ‘바다와 나 사이’를 지금까지 짓누르고 있었던 건 봄비가 아니라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던 거야….’ 달리는 차에서 메모지를 꺼내 나는 단번에 써 내려 갔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아득히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그리움만 남겨두고 가버린 사람.’ 애틋한 우리 삶의 정한(情恨)이 묻어나는 노래라서 그럴까. ‘가슴 아프게’는 빅히트를 한다. 국내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 열도를 달궜다.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에겐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한류(韓流) 제1호의 ‘망향의 노래’였던 것이다. 방송·영화출연에 극장공연에 새로 등극한 노래 황제 남진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바빠진다. 누가 말했던가,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이때 남진의 나이 19세. 한양대 연극영화과 1학년생이었다. 용모처럼 맑고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 김남진(남진의 본명). 그는 타고난 만능 가수다. 정감있는 노래뿐만 아니라 무대를 압도하는 현란한 춤 또한 객석의 팬들을 사로잡는다. 나이가 없다. 발랄한 빠른 리듬에 맞춰 흔들어대는 몸짓을 보라.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말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모창(模唱)도 곧잘 해서 전설의 가수 ‘남인수’의 노래며, 허스키 가수 ‘최희준’의 음색을 고스란히 낸다. 뺨칠 만큼 천부적인 탤런트 기질이다. 그는 한때 집으로 들어가지를 못했다. 집에서 그가 귀가하기만을 기다리던 ‘오빠 부대’의 원조 격인 극성팬들 때문에…. “늙으면 고향에 가서 살지라우… 목포 친구들과 어울려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소년처럼 해맑았다. 나와 함께 한 작품도 수백 편에 이른다. ‘가슴 아프게’ ‘우수’ ‘마음이 고와야지’ ‘별아 내 가슴에’ ‘목화 아가씨’ ‘사랑이 스쳐간 상처’ ‘빗속에서 누가 우나’ ‘아랫마을 이뿐이’ ‘젊은 초원’ ‘사랑의 공중전화’ ‘서글픈 종착역’ ‘해바라기 마음’ ‘눈물로 끝난 사랑’ ‘빗속의 연인들’ ‘김포가도’ ‘너를 못 잊어’ ‘철새’ 등등…. |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누가 사랑을…’ 절규같은 후렴에 ‘樂~’… “1980년 同名의 라디오 연속극 대히트” |
(52) 배명숙-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
예진수기자 jinye@munhwa.com |
조용필은 지금도 그의 많은 팬들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닌다. 작은 거인이 뿜는 폭발적인 가창력 때문이다. 창(唱)에서부터 동요에 이르기까지 조용필의 음악 장르는 넓고 다양하다. ‘정선 아리랑’ ‘오빠 생각’ ‘돌아와요 부산항에’ ‘단발머리’ ‘창밖의 여자’ ‘일편단심 민들레야’ ‘허공’ ‘미워 미워 미워’ ‘비련’ ‘잊기로 했네’ ‘뜻밖의 이별’ 등의 노래들은 절창 그가 아니면 들어볼 수 없는 명가요가 아닌가. 오늘 여기서는 그가 맨 처음에 작곡을 하고 불렀던 라디오 연속극 ‘창밖의 여자’를 소개한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당시 동아방송(DBS)이 자랑하던 드라마 연출가 안평선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1979년 가을. 동아방송의 연속극 모집에 배명숙의 ‘창밖의 여자’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우선 제목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여자가 왜 창밖에 있나? 무엇 때문에….’ 안평선은 대학생 때부터 이름을 떨치던 연출계의 베테랑. 그는 이 작품을 놓고 주제가 작사에서부터 작곡, 그리고 노래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기획을 한다. 다행히 주제가 노래시는 훌륭했다. 사랑의 방황 끝에 체험한 진실은 놀라웠다. 신인 여류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훌륭했던 것이다. “작곡은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지만, 가수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조용필이 그해 12월 6일자로 방송 활동 금지가 풀렸지요. 그래서 조용필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의 노래를 나는 아주 좋아했으니까요.” 그리하여 안평선은 조용필에게 전화를 한다. 작곡은 누가 했으면 하고…. 그런데 조용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 자신이 직접 작곡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그리고 눈도 많이 내렸다. 주제가 취입은 일요일을 택했다. 경기도 벽제에 있는 지구레코드사의 녹음실. 스튜디오 시설은 최신 다채널 녹음기였다. 조용필은 간단히 목을 풀고 연습 녹음에 들어갔다. 조용필의 작곡은 그의 노래 못지않게 전율을 느끼게 했다. 특히 후렴에서 찌르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의 이 되풀이 반복 부분은 마치 절규 같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필이 작곡을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창밖의 여자’는 30회 연속극. 1980년 1월, 첫 방송부터 주제가에 대한 호응도가 컸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로 그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안평선은 주제가를 복사하여 음악프로에 집중적으로 배정했다. 방송국 직원들도 노래를 좋아해 따라 부르곤 했다. 조용필의 작곡 재능과 함께 뛰어난 가창력에 탄복하면서…. 이렇게 해서 ‘창밖의 여자’는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용필의 득음(得音)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경남 삼천포 사람들은 그가 득음하는 광경을 봤다고 한다. 코끼리 바위는 호젓한 바다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그 당시엔 행인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1960년대 전반기는 지금처럼 TV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갓 개국한 민간 방송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문화, 동양, 동아방송이 그랬다. 특히 연속 방송극은 당시 라디오시대의 꽃이었다. “임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나지 않으리라/ 해가 뜨면 달이 가고, 낙엽 지니 눈보라 치네/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편단심 민들레야/ 가시밭길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찾아 왔소….” 이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 또한 조용필이 작곡하여 그가 부른 것. 얼마나 좋은 노래인가. 조용필은 이 밖에도 ‘단발머리’ 등 많은 작곡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용필 노래는 향기가 난다. 우리 삶의 질곡에서 뿜어내는 듯한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死別)한 이후, 그의 노래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애틋한 정한(情恨)을 느끼게 한다. “나 그대 알 수가 없네/ 나 그대 믿을 수 없네/ 좋았다가 싫어하니 나는/ 싫어하다 좋아하니 나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 믿나/ 나 이제는 단념할 거야 ….” 1980년에 조용필이 부른 정두수 작사, 김영광 작곡의 ‘잊기로 했네’이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소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어이 없으랴/ 푸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 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을/ 내 다시 돌아갈 땐/ 열 구비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 보리라.” 남인수가 부른 김초향 작사, 이봉룡 작곡의 ‘해 같은 내 마음’이다. 이 노래를 조용필이 다시 불렀다. 인간 삶에서 우러나는 찡한 목소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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