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아가는 중년 삶의 이야기

고향하동이야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53) 박춘석-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56)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연재 끝>

惟石정순삼 2013. 8. 3. 15:05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學兵으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삼촌 ‘물레방아 도는’ 고향 얼마나 그리웠을까
(53) 박춘석-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나훈아(본명 최홍기)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물레방아 도는데’.

이는 내 고향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가 배경이다.그곳, 금오산(일명 소오산) 산자락은 내 유년기의 기억이 묻힌 곳이다.객지 생활 수십 년이 지났건만 나는 이따금씩 내 고향의 꿈을 꾼다.

금오산 산자락 밑을 길게 감도는 주교천, 징검다리가 있고 물레방아가 있는….


아, 나는 눈만 감으면 지금도 천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고향엘 간다. 팽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뽕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남해 삼천포 등을 잇는 ‘한려수도(閑麗水道)’가 한눈에 잡히는 곳이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패전위기에서 발악하던 일제는 당시 조선 학생들까지 모조리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이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주인공인 나의 숙부님도 그렇게 끌려갔다.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이던 삼촌은 우리 집안의 희망이었다.

‘학병’이라는 띠를 두르고 생가마을 성평리를 떠나던 날, 고향과의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젊은 날을 마감했다. 주교천은 소오산 산자락을 길게 휘도는 이 지역 고전면의 모천(母川). 돌담마을 성평리 앞을 흐르는 이 주교천의 징검다리는 시냇물을 건너가기 위해 놓여져 있었고, 물레방아는 저만치 살대밑(竹田) 물방앗간에서 돌아갔다. 주교천 시냇물을 안고….

할아버지는 이날 이후부터 싸리문을 부여안고 아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 오나, 하마 오나….”

피를 말리는 그런 세월이 3년이나 지났건만 한번 간 삼촌은 영영 올 줄 몰랐다.

“전쟁도 끝났다 카는데 가는 왜 못 오는고?”

기다림에 지쳐버린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때 국민학생이던 나와 머슴만을 데리고 금오산에 올랐다.

멍석을 깔고 마련해 온 음식을 그 위에 놓았다. 할아버지는 자식의 무사귀향을 산신령께 빌었던 것이다.

난 그때만큼 슬픈 얼굴을 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동네에 등꽃이 하나둘 필 무렵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 해, 감꽃이 무더기로 떨어지던 날, 삼촌은 하얀 천이 휘감긴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 ‘순식이 삼촌’은 그렇게 젊은 날을 마감했다. 전쟁터에서 삼촌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물레방아 도는 고향산천’을 떠올렸을 것이다.

삼촌의 꽃상여가 주교천을 지나던 날, 나는 불현듯 삼촌이 그리워 목이 터져라 삼촌을 불러댔다.

“식이 삼촌, 식이 삼촌!”

무정한 메아리만 내 귓전을 맴돌 뿐 한번 간 삼촌이 부활하리는 만무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할아버지는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떴다.

70줄을 넘기면서 나는 점점 고향의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다. ‘하동포구 80리’며 ‘물새’며 ‘재첩국’이며 ‘김국’이며….

‘물레방아 도는데’(사진)를 작사할 무렵 나는 이미 서울사람이었다. 1972년 봄, 나는 타향살이 6년 만에 길동에다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다. 본디 돈 버는 데는 젬병인 나를 따라 살며 모진 고생을 하던 아내는 집칸을 마련하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다섯 살짜리 큰딸아이와 두 살배기 둘째딸을 위해 방을 마련해 주고 예쁜 커튼까지 쳐 주었다. 내친 김에 내 방에까지도 커튼을 쳐 주고, 또한 어항도 들여놓았다. 봄 햇살을 이고 우리 집은 정말 근사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훈아를 위한 작사를 해야만 하는데, 단 한 줄의 가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구레코드사는 나훈아의 전속 기념음반을 준비하고 있어 아주 급박했다. 1968년 ‘낙엽이 가는 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바보같은 사나이’ ‘고향역’ 등을 불러 가수로 주가가 상승하고 있던 나훈아는 그 무렵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지구 레코드사로 막 전속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항 속에서 돌아가는 장난감 물레방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뽀르륵-’ 소리를 내면서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는 쉴새없이 맴을 돌았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물레방아 속에서 삼촌은 부활하고 있었다. 민족의 수난과 온갖 고초의 아픈 역사를 가슴으로 껴안으면서 남의 전쟁터에 끌려가야만 했던 숙부님이….


순간적으로 나는 삼촌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시로 썼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서울로 떠나간 사람/천리 타향 멀리 가더니/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두 손을 마주잡고 아쉬워하며/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서울로 떠나간 사람/천리 타향 멀리 가더니/가을이 다 가도록 소식도 없네/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未知세계 동경한 김동환의 7·5조 민요시… 아름다운 멜로디·노랫말에 봄냄새 ‘물씬’
(54) 박재란의 ‘산 너머 남촌에는’

좋은 노래시에 좋은 곡이 붙여진다. 다시 말해 노래시가 빛나면 곡도 자연히 빛나게 된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보라. ‘고향’을 보라. 그리고 박화목 시인의 ‘보리밭’을 보라. 한결같이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또 이은상 시인의 ‘가고파’며 ‘옛 동산에 올라’ ‘그집앞’ ‘사우가’, 신사임당의 ‘동심초’,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박목월 시인의 ‘이별의 노래’ 등 유명한 우리 가곡들은 노래시와 함께 작곡 또한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아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1927년 1월. 시인 김동환이 7·5조의 리듬으로 쓴 민요풍의 시다. 주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봄 하늘 구름밭에 숨어 우는 종달새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저 하늘 저 빛깔이 그리 고울까/아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떼/버들가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아지랑이 낀 봄날. 먼 산을 바라보면 행복은 산 너머, 고개 너머에서 손짓을 한다. 그래서 빛나는 꿈을 꾸듯 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이다. 신비가 물씬 밴 저곳에서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사람이 산을 넘고 더 높은 산을 넘는 건 바로 이런 행복의 나라로 찾아가는 데 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끊었다 이어오는 가느다란 노래/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1960년대 전반기는 가수 박재란의 전성시대. 부르는 노래마다 서민들의 가슴을 관통했던 것.

‘열무김치 담을 때는 님 생각이 절로 나서/설움 많은 이 팔자를 흔들어 주나/장마통에 맹꽁이야 너는 왜 울어/음∼음∼ 안타까운 이 심사를 흔들어 주나/맹이야 꽁이야 너마저 울어/아이고나 요 맹꽁아, 어이나 하리. 보리타작하는 때는 님 생각이 절로 나서/걱정 많은 이 신세를 흔들어 주나/논두렁에 맹꽁이야 너는 왜 울어/음∼음∼ 눈물짓는 이 심사를 흔들어 주나. 독수공방 깊은 밤에 님 생각이 절로 나서/장마통에 멍청스레 흔들어 주나/이 밤중에 맹꽁이야 너는 왜 울어/음∼음∼ 잠 못드는 이 심사를 흔들어 주나.’

1938년에 가수 박단마가 부른 이부풍 작사·형석기 작곡의 ‘맹꽁이 타령(원명 아이고나 요 맹꽁아)’을 박재란이 다시 불러 크게 히트했다. 이뿐이겠는가. ‘강화 도령’과 ‘푸른 날개’ 등을 불러 그녀의 인기는 절정에 이른다. 좋은 노래시에 아름다운 멜로디는 가수의 날개. 그래서인지 지금도 우리 가슴을 젖게 한다.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지든/강화 도련님, 강화 도련님/도련님, 어쩌다가 이 고생을 하시나요/말도 마라, 사람 팔자 두고 봐야 아느니라/두고 봐야 아느니라. 음지에도 해가 뜨고 때가 오면 꽃도 피듯이/꽃도 피듯이 도련님 운수 좋아/나라님 되시었네, 얼싸좋다, 좋고 좋고 말고/상감마마 되셨구나, 상감마마 되셨구나.’

박재란은 조선왕조 말. 철종의 등극을 그린 이서구 작사·전수린 작곡의 사극 드라마 ‘강화 도령’과 유광수 작사·전오승 작곡의 ‘럭키 모닝’ 그리고 하기송 작곡의 ‘둘이서 트위스트’를 부른다. 모두 신바람 나는 흥겨운 노래였다.

‘아무리 서러운 슬픔은 많아도/가슴을 털어놓고 노래합시다/하늘도 푸르고 마음도 즐거워/청춘의 푸른 날개여. 날마다 괴로운 시름에 닥쳐도/우리가 서로서로 위로합시다/산 너머 산이요, 강 건너 강이요/젊음의 푸른 날개여.’

‘푸른 날개’의 작사가 정성수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황금의 눈’ 등 명가요 노래시를 남겼다. 아세아영화사 기획전무이던 그는 ‘스카라 계곡’에서 돈을 팍팍 쓰던 물주. 당시 가요와 영화는 밀월관계였다. 영화음악이나 영화주제가는 가요인의 몫. 그래서인지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영화인들은 대본을 들고 인현동을 찾는다.

어느 날, 작곡가 전오승과 작사가 정성수 그리고 반야월은 인현동의 ‘귀신집’에서 술에 만취됐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라 귀가하지 못한 그들은 술집에서 드러눕고 만다. 새벽녘. 소피가 마렵던 정성수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손을 더듬으며 요강을 찾는다. 그러다가 반질반질한 요강에 대고 쏴- 하고 쏟아 낸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 뜨거워!” 하면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곁에서 쓰러져 자던 반야월이었다.

훗날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화제가 된다. “그때 전오승도 함께 있었는데, 하필이면 반야월에게 할 게 뭐람? 혹시 감정이 있었던 게 아냐? 제 자랑만 늘어놓는 반야월이 얄미워서….”

가수가 우리 민요를 터득하면 빠른 노래도 할 수 있다. 박재란의 감미로운 음색은 민요풍과도 잘 어울린다. 이 때문에 그녀는 한시대를 풍미했던 것이다.

‘아나 농부야 말들어 아나 농부야 말들어/서 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에헤야 에헤루야/상사디야.’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서른여덟 살에 생애 마감한 월견초… 그의 익살, 한줄기 사랑으로 다가와
(55) 월삿갓의 ‘청춘을 돌려다오’

월견초(본명 서정권)가 작사한 노래 ‘청춘을 돌려다오’를 처음 부른 가수 신행일의 앨범 재킷 사진(왼쪽)과 월견초(오른쪽).
가을비가 흩뿌리던 날. 나는 경기 파주시 신천지 공원묘지를 찾았다. 그곳엔 작사가 월견초 대신 차디찬 비석만이 비에 젖고 있었다. ‘아, 그 사람, 월견초는 어디로 가고….’ 나는 왠지 알지 못할 슬픔이 일어 그의 비석을 안고 울고 말았다. 비석엔 가요 ‘이정표’의 가사만이 월견초(본명 서정권)의 체온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 익살, 부리부리한 눈,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은 사내, 천재성이 번뜩이던 괴짜는 내 가슴속에 한줄기 사랑으로 다가들었다. 달만 바라보는 풀꽃 월견초(月見草)가….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흐르는 내 인생의 애원이란다/못다 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

그의 자서전 같은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노래시다. 1960년대 초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작사계에 데뷔한 이후 ‘이정표’ ‘살아 있는 가로수’ ‘들국화’ ‘경상도 사나이’ ‘삼일로’ 등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작품 못지않은 숱한 일화를 생전에 남겼다.

부산 피란시절. 그는 ‘희미한 반야월’이란 노래시로 필화 사건(?)을 자초한다. 부산발 대구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소주를 마셨다. 너무 따분하기도 했지만 밤이 던지는 차창의 낭만에 취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그는 깜빡 졸았다. 눈을 뜨니 한적한 시골역 ‘반야월’이었다. 졸린 눈에 보인 반야월은 그에게 한 편의 노래시를 던져 주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반야월역의 표시판….’

그런데 ‘희미한 반야월’이란 노래시가 문제였다. 대선배 작사가 반야월을 ‘희미한 사람’으로 씹었다는 것이다. 월견초는 당시 먹고살기 위해 부산의 미도파레코드사는 물론 대구의 오리엔트, 서라벌 레코드사에도 줄을 대기 위해 부산과 대구를 오가야만 했다.

월견초는 투덜댔다. “하필이면 반야월역에서 눈을 뜰 게 뭐꼬.”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도 이 필화 사건은 반야월이 웃어넘김에 따라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환도(還都) 이후 월견초는 박시춘, 반야월, 나화랑, 전오승, 이인권, 조춘영 등의 매니저가 된다. 정열적이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뛰어다니는 그에게 매니저라는 직함은 제격이었다.

하지만 한 푼만 생겨도 술잔에 돈을 쓸어 넣는 그는 언제나 빈털터리. 주머니에 먼지만 쌓였지만, 그는 늘 술에 절어 사는 재주만큼은 있었다. 그는 공짜인생을 살았다. 인현동 목욕탕에서 공짜 목욕으로 하루를 열었다. 목욕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 곳곳을 바람처럼 누비고 다녔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던 ‘김삿갓’이 아닌 ‘월삿갓’. 밤이 되면 그의 발길은 어김없이 ‘스카라 계곡’으로 향한다. 당시 가요계에선 명보극장과 인현동 일대를 ‘스카라 계곡’이라 불렀다. ‘음악저작권협회’ ‘작가동지회’ ‘창작분과위원회’와 레코드사, 영화사, 잡지사, 인쇄소, 극장, 다방, 술집, 당구장 등이 한데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 그리고 장마철이면 남산의 빗물이 이곳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내렸던 것.

‘늦어서 죄송합니다’는 월견초의 전매 특허. 땅거미가 채 지기도 전에 술을 좋아하던 가요작가들이 일찌감치 진을 치고 있는 술집을 그는 귀신같이 찾아냈다. 물론 ‘불청객’이었지만 ‘늦어서…’라는 말 한마디로 끼어드는 넉살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애교와 익살 또한 넘쳤다.

“우리가 언제 월견초를 불렀나?” 넌지시 선배들이 농(弄)을 하면 그는 “저야, 선생님들 전속 아입니꺼-”로 맞받아쳤다.

이들의 술자리는 따로 악기가 필요 없었다. 술잔, 주전자, 냄비, 젓가락, 이 모든 것이 훌륭한 악기였다. 그는 효과음을 내는 데도 도사였다. ‘무정열차’와 ‘울리는 경부선’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를 때면 기적소리와 열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지는 바퀴소리를 기가 막히게 흉내 냈다.

당시 월삿갓의 하루 일정을 살펴보자. 눈을 뜨기가 무섭게 맨 먼저 달려가는 곳이 ‘인현목욕탕’. 목욕을 마치면 곧바로 다방에 들른다. 그리하여 다방 마담이 갖다 주는 쌍화차를 마신다. 잣, 대추, 땅콩이 든 뜨거운 쌍화차에는 달걀노른자가 동동 떠 있다. 거기다 위스키 한 잔은 그의 단골 메뉴. 다방에서 나오면 전차를 타고 레코드사로 향한다. 선배들의 작품료며 그의 작사료도 챙기기 위해….

수금이 잘 되는 날은 동료들을 불러내어 당구장으로 간다. 당구 실력은 200점을 치는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300점을 놓는다. 짠돌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인지 결과는 백전백패. 그런 그는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길 잃은 나그네의 나침판이냐/항구 잃은 연락선의 고동이더냐/해지는 영마루 홀로 섰는 이정표/고향길 타향길을 손짓해 주네. 바람찬 십자로의 신호등이냐/정처 없는 나그네의 주마등이냐/버들잎 떨어지는 삼거리의 이정표/타고향 가는 길손 울려만 주네.’

그랬다. 월삿갓은 그의 히트 노래시처럼 ‘이정표’를 보면서 나그네처럼 훌쩍 떠난 것이다.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하늘나라 간 남편 기다리는 새댁의 哀歌… ‘땡! 땡! 땡!’ 마지막 전차의 추억 아련히
(56)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연재 끝>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앨범 재킷 사진. 문화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 초, 서울의 마포는 아직 시골 냄새가 났다. 마포강에는 갈대숲이 우거져 있었고 나룻배도 있었다. 황량한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나 남새밭이 널려 있던 말죽거리로 가자면 마포강에서 나룻배로 건너가야만 했다. 한강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을 빼곤 마포나루엔 장어 굽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마포는 또한 ‘땡! 땡! 땡!’을 출발음과 도착음으로 하는 전차의 종점으로 유명했다. 고즈넉이 눈 내리는 겨울밤이나 궂은비가 쏟아지는 여름밤. 더욱이 밤이 늦어 오가는 사람이 없어 약간은 적막할 때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귀갓길의 남편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마지막 전차’가 바로 ‘그리움’이었다.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대학생 연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 빈한(貧寒)했던 시절. 이때 가정교사는 대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부업이기도 했다. 이들은 공원의 벤치에서 사랑의 밀어(密語)를 속삭이다 자장면이나 한 그릇 하면 그날은 그래도 괜찮은 날이었다.

이 중 내가 아는 두 연인은, 대학을 졸업하기가 무섭게 마포종점 부근의 허름한 집에 사글셋방을 얻었다. 남자는 다시 박사 코스를 밟으려 밤잠을 설쳤다. 대학연구실이나 대학강사로, 더러는 다시 가정교사도 하며 악착같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여자도 남편 뒷바라지는 물론, 따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얼마간 가용(家用)을 벌어 썼다. 신혼은 소꿉살림처럼 아기자기했다.

여자는 밥을 지어 밥그릇에 담아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고 이제나저제나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이내 남편 마중을 위해 마포종점으로 나갔다. 남편이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둘은 연애시절을 떠올리며 꼬옥 손을 잡고 인근 당인리로 이어지는 긴 둑을 걸었다. 원효로 전차종점에 이르기까지 거닐기도 했다. 그때 당인리의 깜빡대는 불빛은 바로 어릴 적 반딧불만큼이나 눈물나게 반가운 것이었다.

당시 나는 마포종점 부근에 살면서 작곡가 박춘석 씨와 함께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가수들의 노래 작품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마포 설렁탕집을 찾았다. 마포종점에 있는 이 설렁탕집은 예술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어느 날 나는 설렁탕집 주인으로부터 마포종점에 살던 두 연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 있던 중 너무 과로한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남편을 졸지에 잃은 여인은 늦은 밤이면 신혼 초 사글셋방 시절처럼 마포종점에 나갔다. 그곳을 미친 듯 배회하며 남편을 기다렸지만 한 번 간 남편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그 여인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언젠가부터는 마포종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1966년 그해 여름. 나는 궂은비를 맞으면서 마포 전차종점에 나가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땡! 땡! 땡!’ 도착음을 내면서 밤 늦은 시간에 전차는 들어오고 있었다. 궂은 비를 맞으면서…. 이날 밤 나는 밤잠을 설치면서 애절한 두 연인들의 사랑을 담은 ‘마포종점’의 노래시를 썼다. 두 연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애틋한 애가(哀歌)였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1967년 봄, 이 노래 ‘마포종점’은 여성 듀엣 ‘은방울자매(박애경·김향미)’의 목소리에 실려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이 노래가 나온 지 1년 후, ‘마포종점’은 사라지고 만다. 특유의 금속성 음을 뿌리며 ‘서민의 애환’을 실어 나르던 전차(電車)가 세월에 밀려 퇴장하고 말았던 것. 큰 방울 박애경은 이 노래를 부를 때 만삭이었다. 그래서인지 ‘마포종점’은 대박이 났다. 국민 애창 가요로서….

그리고 듀엣의 한 사람인 ‘김향미’는 결혼에 실패해 지금은 캐나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큰 방울 ‘박애경’ 또한 지병으로 눈을 감게 되고…. 나는 이곳에 오면 은방울자매 말고도 또 한 사람의 가수를 생각한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 그는 나의 노래시 ‘종착역’을 받아 연습하다가 홀연히 가버렸기 때문. 마포나루에서의 그와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나는 한 언론인과 함께 그 옛날 마포종점 부근의 설렁탕집을 찾았다. 전차 차고가 있던 그 자리에 세워진 빛바랜 ‘마포종점’의 노래비에서 노래에 얽힌 비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이뤄진 것이었다. 이 노래비는 마포구 도화동 어린이공원에 세워져 있다. 나룻배도, 전차도, 설렁탕집 주인도 간 곳이 없었다. 마치 우리들의 젊은 시절처럼…. 늘 하는 말로 참으로 ‘인생무상(人生無常)’ ‘세월무상(歲月無常)’이었다. 그 여인, 마포종점을 헤매던 그 여인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