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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百年大計-남유럽 실패 연구] 복지에 젖은 국민, 부패 정치인에 관대… '30년간 처벌 0'

惟石정순삼 2011. 11. 5. 12:10

 

[복지 百年大計] 남유럽 실패 연구 그리스 <3>
의원이 돈 받았다고 밝혀도, 관리가 수천만유로 수뢰해도 복지파티 30년간 처벌 全無
정치책임론 커지자 부총리가 "우리 함께 해먹지 않았나"… 민간 부문 세금탈루도 심해 지하경제 규모 GDP의 25%

2008년 8월 지멘스 스캔들이 그리스를 뒤집어 놓았다. 독일 지멘스가 장비 입찰 계약을 따내려 3500만유로(약 540억원)를 그리스 정·관계에 뇌물로 뿌렸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의회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조사에 착수했고, 오랜 조사 끝에 지멘스가 광범위하게 돈을 뿌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정·관계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돈을 뿌린 것은 맞지만 누가 받았는지 인물을 특정해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집권 사회당의 한 국회의원이 지멘스로부터 20만마르크의 선거 후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어도 역시 처벌받지 않았다. 언론이 일제히 들고일어났지만 유야무야 사그라졌다.

익명을 원한 한 재계 인사는 "1981년 '복지 파티'가 시작된 이후 부패 문제로 처벌받은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지난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독일제 불량 잠수함 도입 사건 때도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국방부 고위관리가 수천만유로를 수뢰했고 유력 정치인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무성했지만 결국 덮어지고 말았다.

그리스 정·관계의 부패는 악명 높다. 현지를 취재하며 생긴 의문은 어떻게 그토록 부패에 너그러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엄격하게 추궁한다면 부패는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스캔들이 터져도, 검은 거래 의혹이 쏟아져도 그리스 유권자는 30년간 줄기차게 사회당·신민주당 2개 정당에 표를 주었다. 왜일까?

아테네상공회의소 니콜라우스 소피아누스 이사에게 이 질문을 던지자 "탱고(춤)는 혼자 추지 못하는 법"이란 답이 돌아왔다. 국민이 복지 혜택을 대가로 정치 부패를 눈감아 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 사태는 복지 포퓰리즘을 치달은 정치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 정치권에 힘을 실어준 국민도 책임이 있다고 소피아누스 이사는 말하고 있었다.

작년 5월 정치 책임론이 비등하자 집권 사회당 판갈로스 부총리는 공개석상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 모두 함께 해먹지 않았나." 정치는 포퓰리즘에 빠져 돈을 쓰고, 국민은 복지에 젖어 표를 주었다. 그리스 위기는 결국 정치와 국민의 이해관계가 맞아 30년간 2인 1조로 함께 춤을 추었던 결과인 셈이다.

그리스에서 부패는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간기업과 상류층은 탈세로 국가 재정을 갉아먹었다. 아테네 대학 하치스 교수가 구글 위성사진을 통해 아테네 지역 고급 주택에 설치된 수영 풀을 세어보니 1만7000개에 달했다. 그리스 세법은 주택 부설 풀을 신고토록 의무화하고 있고, 그만큼 세금을 더 매긴다.

30년간의‘복지밀월’이 끝나자 그리스 국민은 정부에 대한 저항에 나섰다. 아테네 시내엔 3일에도 개혁·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다. /AP=연합뉴스
그러나 지난해 실제로 국세청에 풀이 있다고 신고한 주택은 364개(2.1%)에 불과했다. 상류층 98%가 세금을 탈루하고 있다는 얘기다.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오스트리아 린츠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과세를 피한 그리스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25.1%에 달한다. 그래서 세금만 제대로 걷어도 거뜬히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리스 정치와 국민의 '공범(共犯)' 관계는 재정지출 구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 인건비와 각종 지출로 국민 1인당 연 1만600유로를 썼다. 반면 세금으로 걷은 수입은 8300유로뿐이다. 1인당 매년 2300유로(약 370만원) 씩 적자를 보는 것이다. 도저히 지속될 수 없는 지출 구조가 30년간 계속돼왔다는 얘기다.

결국 복지 혜택을 줄이든지, 세금을 더 내든지 양자택일할 도리밖에 없다. 그리스 국민은 둘 다 못하겠다고 저항하고 있다. 국가부도 사태 앞에서도 그리스에선 온 나라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여·야는 정치폭탄을 상대에 떠넘기려 여념 없고, 국민은 개혁반대 운동에 나섰다.

우리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다 같이 공멸(共滅)할 수 있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국민이 저항하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 400년간 터키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의 역사로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다. 오랫동안 식민통치를 받다 보니 국가 의식과 애국심이 약해지고,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습관화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파판드레우 총리의 당초 엄포처럼 국민투표가 실시됐다면 부결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복지 혜택을 맛본 국민이 이것을 포기하기란 마약 끊기만큼 힘든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