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영록 성균관대 교직원
감 따는 손이 아파오면 '가을을 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팔순 부모가 쉬지 않으니 자식이 어찌 한눈을 팔랴
평생 일하며 사신 분들이 얼마나 일을 더 하셔야 할까
일요일 오후 서울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카페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몸은 모처럼 고된 일에 녹초가 되어 천근만근이건만, 정신은 맑다. 묵은 숙제를 해치운 학생 같다. 팔순을 넘은 부모의 가을걷이를 돕고자 2박3일 고향을 다녀오는 길이다.
부지런함을 타고난 농사꾼 아버지가 틈만 있으면 감나무 밑에 지푸라기를 깔고 거름을 해준 덕분에 이웃 감나무보다 몇 배 탐스럽다. 감을 딴다. 밑에서, 위에서, 옆에서 보건 한 나무에 200여개가 달린 큼직한 감을 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가위를 쥔 손이 아파올 무렵 문득 내가 '가을을 따고 있다'는 생각에 잠긴다.
하늘은 뭉치구름이 느리게 몸을 뒤채고 있었으나 드높고 청명했다. 마치 구석기 시대처럼 피폐한 시골이지만, 여전히 가을의 전설은 숨쉬고 있었다. 잔디 마당에 수천 개의 감을 부어놓고 일일이 닦는다. 쉰을 넘긴 자식에게 이런 선물을 주신 부모님이 고마웠다. 열 상자, 스무 상자가 찰 때마다 겨우내 이 감을 사서 먹을 많은 벗들을 떠올리며 또 행복하다.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강행군은 계속됐다. 점심시간 30분을 제외하곤 단 한 번의 휴식시간도 없다. 세상에, 11시간 노동이다. 팔십이 넘은 분들이 어찌 쉬지도 않고 저리 바삐 움직이나. 그런데 자식이 어떻게 한눈을 팔랴. 죽기 살기로 하는 수밖에 없다. 일 좀 돕겠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제대로 걸렸다.
오늘은 은행 따기다. 은행나무가 노란색 바다와 같다. 노인들도 신기한지 연방 "아이고, 뭣을 먹고 이렇게 컸을까" 하신다. 보름여 동안 두 분은 일삼아 은행을 털고 주워 모아 무려 100여개의 비닐 비료부대에 담아놓았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이게 또 보통 고역이 아니다. 구린내, 그렇다, 냄새가 독한지라 옆에 가기도 꺼려진다. 하지만 어쩌랴, 이 힘든 일을 도와주러 온 것을. 작업은 지저분하기가 말로 못한다. 누런 물이 찍찍 얼굴에, 머리에 튀기고 쉴 새 없이 껍질을 긁어내어야 하고, 한쪽에서는 제법 까진 알을 담아야 한다.
허리를 펼 여유가 없다. 100개의 부대는 주변이 어둑해질 때쯤에서야 상당히 부피가 줄어든 40여개로 바뀐다. 내일 오전에는 이것들을 또 일일이 씻어서 깨끗이 말려야 한다.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다. 농협에서 11월 보름 동안 수매한다. 400kg이 나왔다는데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과연 팔순 부모의 인건비는 나오는 것일까. 허겁지겁 저녁밥을 해치우고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진다.
고향 안방 부모 곁에서 초저녁부터 자는 잠은 꿈도 없이 다디달다. 새벽 2시, 눈이 말똥말똥하게 떠진다. 지금부터는 어머니와 '동네 한 바퀴'를 이야기로 돌아야 한다.
"누구 집 누구는 시집갔대?" "그 어른이 돌아가셨어?" "옆집 아저씨가 이장이 됐어?" "너는 월급을 얼마나 받냐? 머드게 심란허게 이사를 갈라고 실쌈(수선)을 떠냐? 작은 넘은 공부 잘 허고 있냐…." 지금의 홍복(洪福)을 고맙게 생각할밖에 도리가 없다. 부모가 안 계신 벗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고향의 어른들이 건재하여 쉰 줄에 든 자식들을 "아가, 아가" 하며 챙겨주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쉰 넘은 아들이 엄마 손을 꼭 쥐고 가끔 얼굴도 만지며 떨어대는 수다는 먼동이 틀 때쯤 끝난다. 이런 날이 앞으로 몇 날이나 있을까. 이 얼굴, 이 목소리를 얼마나 더 들을까. 얼마나 더 저렇게 건강하게 농사를 지어 칠 남매 양식과 부식을 보내주실까. 평생을 일하며 사신 분들이 얼마나 일을 더 하셔야 할까.
팔순 부모의 진한 노동(勞動)을 보고 겪으며 아름답다고 느낀다. 사람은 일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와 닿는다. 짧은 육체노동에도 지친 내 몸이 그렇게 느낀다. 열차카페에서 쓰는 늦가을 일기에 가을, 고향, 부모, 그리고 '일'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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