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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9·끝>연재를 마치며

惟石정순삼 2011. 5. 6. 10:0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9·끝>연재를 마치며

서울 경복궁 앞의 성군 세종대왕 동상.

주산인 북악산이 굽어보며 억겁의 세월을 꼿꼿이 서 있다.

사육신 묘역에서 바라본 한강.

수도 복판을 끝없이 흐르며 500년 역사와 애환을 지켜본 한강수로

피맺힌 그 사연을 저 강은 알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계 여러 국가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조상 유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하는 역사유적들은 당사국을 기억시킬 수 있는 국가 브랜드로 소중한 관광자원과 직결된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많을수록 국격은 상승하며 국가 간 분쟁 시에도 이 유적물들은 국제법에 따라 보호받도록 규정돼 있다.

 유네스코는 1972년 총회에서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에 관한 협약’에 따라 매년 6월 정기총회를 열어 세계문화유산을 새로 지정한다. 그 절차와 인증이 매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회된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대한민국의 조선왕릉 군(群) 지정요청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의 왕릉 40기를 현장 답사한 유네스코 조사요원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500여 년이 넘은 왕들의 무덤이 단 한 기(基)도 유실되지 않은 채 보존됐을까.

 그때 보도를 접한 필자의 가슴도 벅차올랐다. 20여 년 전,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어서 진저리를 내며 탐독했던 조선왕실 비사를 서재에서 꺼내 다시 들췄다. 조선 통사(通史)가 아니라 용상에서 내려다본 조선 임금들의 온전한 지밀사(至密史)였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석 구실을 하는 법. 그해 겨울 국방일보 관계자를 만나 연재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아 사양했지만 거듭된 설득과 격려에 힘입어 2010년 1월 8일자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고행길이었다. 세계유산 등재 이후 왕릉 출입은 까다로워졌고 능상 취재는 엄격히 통제됐다.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오라는 왕릉관리소 측 요청에 국방일보 연재기사를 제시하며 국가 미래를 짊어질 국군 장병들의 역사 사료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연재에 탄력이 붙으면서는 관련 기사를 읽어본 관리소 측에서 오히려 반기며 많은 취재 편의를 제공해 줬다.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안양의 하용준(82·전 경기지방 병무청장) 선생과는 연재기사의 용어선택 사례를 놓고 여러 차례 토론이 오갔다. 서울에 사는 이제우(67·사업) 씨와 이경도(63·개인택시 사업) 씨는 “필자와 함께 왕릉 취재를 동행해 보는 게 소원”이라 하여 ‘그 소원’을 성사시켜 주기도 했다. 수원 융릉(사도세자)과 건릉(제22대 정조대왕)의 문화해설사가 엄마인 어느 병사는 매주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을 스크랩해 집에 보낸다면서 고맙다는 전화를 해 왔다. 지금 그 병사는 군 복무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교훈이다.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내려앉은 왕릉 상설물(象設物) 이끼를 직접 만져보며 필자는 통치자의 고뇌와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했다. 한 시대 운명을 가르는 국가지도자의 판단과 결단이 그 민족의 영고성쇠와 그 강토 영역에 사는 백성들 미래임을 왕릉은 그곳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왕릉을 찾을 때마다 엄혹한 세월을 보낸 임금과 함께 시대의 발자취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묘지는 말이 없지만, 사연은 넘쳐흘렀다. 부자의 아들은 부자가 돼 잘 살았고 임금의 아들은 임금이 돼 나라를 통치했다. 이들을 감시하는 건 오직 역사뿐이었다. 거기에는 세상을 움직이나 보이지 않는 무서운 질서가 있었다. 어찌 청사(靑史)가 두렵지 않겠는가.

 주지하다시피 권력의 정상이 영광의 자리만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 시대 임금 자리는 목숨까지 위협받는 고통스러운 보좌이기도 했다. 학문적 성취도가 월등한 대신들로부터 능멸당하며 소신을 못 펴본 군주가 다수였다. 때로는 죽음도 불사하는 대쪽 같은 선비정신이 치열한 당쟁구도 속의 조선왕조를 지탱해 왔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견제하며 외침에는 과감히 맞섰다.

 왕릉에 가면 산신석(山神石)이 능 아래 있다. 산신석은 조상 묘에 가 제사지내기 전 산신에게 먼저 예의를 표하는 제단 석으로 일반 묘의 윗자리에 있다. 산신석이 능침 아래에 있음은 임금이 신보다 상격에 있음을 의미하며 왕릉참배를 자주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시정에선 믿고 있다. 이래서 우리 선조들은 묘 위의 산신석에 정성 드리고 왕릉을 찾아 지성으로 살폈던 것이다.

 이 같은 믿음은 곧 왕릉 풍수와 직결되며 충과 효의 가르침으로 승화됐다. 조선 초기 과거제도 중 잡과(雜科)에 속했던 풍수지리는 당시 사대부나 고을 선비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었다. 임금이 승하한 후 팽팽한 세력 대결 속에 풍수논쟁에서 패하면 곧 자파의 괴멸을 초래했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도 풍수대결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당시 정계를 핏빛으로 물들인 적이 있다.

 필자도 40여 년 전 풍수를 접한 뒤 30년 넘는 신문기자 생활 속에 웬만큼 전문적 식견을 갖추며 ‘대한민국 명당’이란 저서도 출간하게 됐다. 연재 초기에는 당대 명 풍수들과 동행해 왕릉풍수도 조명하려 했으나 컴퓨터로 첨단무기를 다루는 국방일보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획의도를 수정했다. 그러나 왕릉 40기를 일일이 답사하며 꼼꼼히 챙긴 능마다 입수(入首)·입수(入水)·파수(破水)방향·사신사 물형 등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왕릉에 얽힌 비밀의 공유를 위해서도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 기록으로 되살려 독자들과 다시 만날 생각이다.

 풍수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예산 남연군(흥선대원군 생부) 묘를 풍수적으로 풀어쓴 기사(2011년 2월 25일자)에 전국 독자들의 문의전화가 며칠을 두고 쇄도했다. 1년 4개월에 걸친 연재기간 동안 취재비화가 어찌 이뿐이었겠는가. 때로는 출입금지 된 왕릉 사진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월장하려다 적발돼 이순을 넘긴 나이에 강도 높은 주의를 듣기도 했다. 땡볕 속 강릉(제13대 명종대왕) 취재 시에는 갑자기 날아든 말벌에 쏘여 해독제를 맞기도 했다.

 역사의 교훈은 굳이 먼 곳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본디 권력이란 비정하기 이를 데 없어 부모·부부·형제·자매도 분별 않는 냉혹한 세계다. 미래를 망각한 채 당대 일신 영달과 호의호식으로 살다간 조상의 연좌죄로 고통받는 후손들을 목격하며 바르게 잘 살아가야 함을 새삼 터득했다.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은 아직 미완성이다. 북한에 있는 제릉(齊陵·태조고황제 원비 신의고황후 한씨)과 후릉(厚陵·제2대 정종대왕)을 추가 취재해 독자들과 만나야 대미(大尾)가 장식되는 것이다. 필자에게 방북 기회가 주어지거나, 남북통일이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고종황제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을 내려다보며 대갈(大喝)한 경책문으로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한산악악(漢山嶽嶽·북한산은 늘 거기에 꼿꼿하고)에 한수앙앙(漢水앙앙·한강수는 끝없이 흘러가리니)이로니 경들의 앞날이 참으로 두렵도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