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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7>영친왕 이은과 영원

惟石정순삼 2011. 4. 21. 09:0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7>영친왕 이은과 영원

역사의 희생양으로 살다간 영친왕의 영원(英園).

왕위에 등극하지 못해 원의 묘제이며 일본 왕실 방자비(妃)와 합장됐다.

영원의 제각. 세자에 준하는 예우여서 일반 가묘(家廟)와 다를 바 없다.

 

조선 황실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1897~1970)을 영왕(英王) 또는 영친왕(英親王)으로 부른다. 두 호칭 중 영친왕은 흔히 친일적 요소가 내재된 것으로 여겨 거부감을 갖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래 친왕(親王)의 위호(位號) 제도는 한족이었던 명나라(1368~1644) 황실에서 황자(皇子)를 다른 제후국 봉왕(封王)과 구분해 한 단계 격상시켜 불렀던 칭호다.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1616~1912) 황실까지 승습되며 속국 왕인 번주(藩主)들과 차등 예우했던 지존 버금가는 지위였다. 이를 일본에서 명치유신(1853~1889) 이후 본 딴 것이다.

 조선 왕조는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꾸고 칭제건원(1897)한 후 광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황제국이 됐다. 청국·일본·러시아 3국의 치열한 각축 와중에 청국 세력이 밀려나며 불완전하게나마 독립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나긴 세월 한 맺혔던 중원 강국(송→원→명→청)의 속박에서 어부지리로 얻어진 국격이었다.

11세때 유학이란 미명하에 일본으로 끌려가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되며 궐내 모든 제도와 용어도 바뀌었다. 적색 곤룡포가 황금색 용포로 교체되고 전하는 폐하로 불렸다. 왕세자는 황태자가 되고 왕자들은 군호(君號) 아래 왕호(王號)가 더해졌다. 다시 왕격(王格)을 높여 친왕(親王)으로도 호칭했다.

 순종황제(1874~1926·명성황후 탄출)보다 네 살 아래였던 이강(李堈·1877~1955·귀인 장씨 소생)은 고종 28년(1891) 의화군에 봉해졌다가 고종이 황제가 된 3년(광무 3년·1899) 뒤 의왕(義王)으로 진봉됐다. 의왕은 순종의 무사(無嗣)로 위기감을 느낀 명성황후 민씨의 시샘과 질투로 여러 차례 독살 위기를 넘기며 생모 귀인 장씨와 궐 밖으로 쫓겨나 성장했다. 당시 명성황후는 귀인 장씨가 출산 능력을 상실하도록 모진 박해를 가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국가적 대혼란 속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1896)했다. 이때 순빈(淳嬪) 영월 엄씨가 고종을 시봉하다 왕자 이은을 낳자 광무 4년(1900·4세) 영왕(英王)으로 책봉했다. 영왕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세제(世弟)로 입후됐다가 광무 11년(1907) 고종이 태황제로 물러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하며 황태자로 책립됐다. 이때 나이 11세였다.

 21세 연상의 이복형 의왕이 있었으나 세제를 세울 때는 금상의 재위 기간을 염두에 둬 유충한 아우로 대통을 잇는 왕실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영왕의 황태자 책봉으로 생모 엄씨(1854~1911)도 순헌황귀비로 진봉됐다. 증(贈)찬정 엄진삼의 장녀로 8세 때 입궁해 명성황후 시위상궁이었던 엄비는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선영(善英)이란 이름을 새로 얻고 경선궁(慶善宮)의 궁호도 내명부에 올렸다. 엄비가 바로 양정의숙(1905)·진명여학교(1906)·명신여학교(1906·숙명여학교 전신) 설립에 거액의 황실 기금을 쾌척한 장본인이다.

 고종황제는 영왕이 10세 되던 해(광무 10년·1906) 2월 1일 승후관 여흥 민씨 민영돈(영국·청국 대사 역임)의 딸 민갑완(11세) 규수를 황태자비로 간택했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융희(隆熙) 황제로 억지 등극(1907)시킨 조선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는 이해 12월 5일 유학이란 미명하에 11세의 어린 영왕을 볼모로 일본에 끌고 갔다. 이완용·서병갑·고희경·안병준·엄주일 등이 수행했다. 고종은 이 자들이 인간인가 싶었다.

 “천륜을 단절하는 그대들이 편히 살듯 싶다더냐. 왜국 땅에는 재앙이 멈출 날 없을 것이고 네 놈들 후손들마다 저주 죄인으로 연명할 것이로니 안타깝고 딱하도다. 하늘이 네 놈 종자들 앞길을 막는 걸 살아 지켜볼 것이니라.”

일본식 교육 강제 주입… 궁핍 속 목숨 연명

 12세의 민 규수는 영왕과 가례는 올리지 못했으나 이미 정혼(간택)한 사이여서 재가하지 못하고 평생 영왕을 정신적 배위로 섬기며 일평생을 처녀 수절했다. 영왕은 창덕궁 낙선재를 떠나면서 처마 밑 조약돌 두 개를 품에 넣고 갔다. 암울한 일본 생활 속에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조약돌을 어루만지며 한없이 울었다. 어느새 조선 민중들은 의왕보다는 의친왕으로, 영왕이 아닌 영친왕으로 격을 높여 부르게 됐다.

 이후 영친왕의 굴절된 여생은 일제치하 민족의 수난·질곡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본에 간 영친왕은 철두철미한 일본식 교육을 주입받고 일본화되며 역사의 희생자로 남게 됐다. 일본 귀족 자녀들이 다니던 학습원에서 도쿄 중앙유년학교 3학년으로 편입, 졸업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29기생이 됐다. 일본 황족 남자는 군적(軍籍)에 드는 원칙에 의해서였다.

 일본에 간 지 4년 만에 일제는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 먹는 영친왕의 활동사진을 조선 황실에 보냈다. 식사 도중 땟국에 전 몰골과 피골이 상접한 황태자 모습을 목격한 생모 엄비는 충격을 받고 급체해 이틀 후 승하했다. 1911년 7월 20일 58세였다.

 일제는 조선·일본 간 융합정책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기한다면서 조선황족 혈통을 일본 황실과 마구 섞어 교란시켰다. 영친왕과 정혼한 민 규수를 파혼시키고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사마오(守正王)의 제1왕녀 마사코(方子·20)와 강제 정략 결혼시켰다. 일제는 의친왕 후계자 이건(李鍵) 공을 일본 황족 딸 마쓰다히라 요시코와 억지 결혼시키고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도 대마도 번왕 아들 소오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배위를 맺도록 했다.

 영친왕의 청년시절은 일본 육군 간부로 일관됐다. ▲1923년 육군대학 졸업 ▲1924년 일본군 참모본부 ▲1926년 참모본부 겸 조선군 사령부 ▲1929년 교육총감부 ▲1932~35년 보병 중좌 진급 연대장 ▲1937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 ▲1941년 육군 중장·사단장 ▲1943년 항공군 사령관 ▲1945년 군사참의관 역임.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다. 이해 8월 15일 일제 압박 사슬에서 한반도가 해방된 것이다. 미군정하 좌·우익 이념 대결로 내홍을 앓던 이 땅에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됐다. 영친왕은 조국을 애타게 그리며 곧바로 환국을 원했지만 초대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의 반대와 정권 실세들의 저지로 재일 한국인 신세가 돼 궁핍 속에 목숨을 연명했다.

박정희 전대통령 주선으로 1963년 겨우 환국

 1963년 11월 12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1917~1979) 의장 주선으로 방자비(方子妃), 외아들 이구(李玖·1931~2005)와 함께 귀국했으나 영친왕은 이미 실어증에 걸린 몽환상태로 폐인이었다. 병상에서 7년을 사투하다 1970년 5월 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영친왕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부왕이 예장된 홍릉(사적 제207호) 가까이 묻혀 능이 아닌 영원(英園)으로 불리고 있다. 손좌건향(서북향)의 가파른 능선으로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영친왕 시호를 의민(懿愍)으로 올리고 3주기를 마친 1973년 5월 6일 종묘 영녕전에 신주를 봉안했다. 죽어 넋이나마 부왕 곁으로 간 세월이 63년이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