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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세손 이구 묘. 아버지 영친왕이 묻힌 영원(홍·유릉 안) 왼쪽 산록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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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 초헌관 모습의 이구(중앙) 황세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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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도착 직전의 황세손 운구 모습. 필자가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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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운명을 믿어야 옳은가. 조선 왕조 마지막 황세손(皇世孫) 이구(李玖·1931~2005)만큼 기구한 처지로 태어나 박복한 일생을 살다간 75년 세월이 또 있을까. 아버지는 조선 황실의 황태자(영친왕)였고 어머니는 일본 황궁의 방자 비(妃)였지만 이것이 곧 저주가 됐다.
1920년 4월 28일. 이날은 11세(1907) 때 조선 황태자로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 이은(1897~1970)과 일본 황녀 방자(마사코·1901~1989)가 강제 정략 결혼하는 날이었다. 도쿄 결혼식장은 삼엄한 경비 속에 잡인 출입이 엄금됐고 조선에서는 매국노 이완용과 조선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사이토 등 극소수만 참석했다. 국제 결혼식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식장 밖이 소란해지며 비상이 걸렸다. 조선 유학생 서상한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서상한은 이완용과 사이토를 암살해 강제 결혼을 저지하고 대한남아 기개를 세계만방에 드러내려 했으나 함께 주도했던 동지의 밀고로 좌절되고 말았다.
망국의 황세손 신분 모른 채 유년시절 보내
사람이 아팠던 기억과 놀라운 충격을 늘 기억하며 살 수는 없다. 영친왕과 방자 비는 곧바로 신접살림에 들어가 일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나시모토노미야 제 1왕녀로 일본 황실에서 곱게 자란 방자 비는 원래 당시 히로히토 왕세자의 세자빈 후보감 중 하나였다. 17세 되던 해(1917) 영친왕과 약혼하면서 일본 세자빈 자리는 그녀의 사촌 나가코(長子)에게 돌아갔다.
영친왕 배필로 방자 비가 선택된 데는 석연찮은 비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황실 후사 단절의 거대한 일제 음모가 개입된 것이다. 소녀 마사코(方子)는 일인 의사에 의해 출산 못하는 석녀(石女)로 진단받고 이국의 황태자비로 내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는 행복했다. 방자 비는 외로운 영친왕을 위해 조선어 학습에 열중했고 조선 궁중음식 조리법도 손수 익혔다.
영친왕은 10세 때 정혼한 조선 황태자빈 민갑완 규수를 까맣게 잊고 방자 비와의 신혼 단꿈에 온갖 시름을 묻었다. 이듬해(1921) 8월 장남 진(晋)이 태어났다. 일제 궁내부가 당황했다. 진이 두 살 되던 해(1922) 4월 영친왕 부처는 갑작스러운 일제의 배려로 아들 진과 함께 가슴 벅찬 귀국 길에 올랐다. 이때 조선 민중들 심사는 복잡하게 동요했다. 소싯적 적국 볼모로 잡혀가 군인이 돼 돌아온 황태자를 조선 적통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울분이 팽배했다. 일각에서는 영친왕 역시 암울한 역사의 희생자니 망국한을 반추하며 오히려 위로해야 한다는 대립각으로 날카롭게 맞섰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침탈 속에는 언제나 엉뚱한 희생자가 속출하기 십상이다. 허위(虛位)나마 조선 황실 대통을 승계할 진이 독살당한 것이다. 양국 피가 섞인 혼혈 왕자라 해 정체불명 괴한이 진의 우유에 아편을 몰래 타버렸다. 9개월의 어린 진은 즉사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총검이 두려워 말은 안 해도 누구 소행인지 훤히 알고 있었다. 영친왕 부처의 슬픔은 극에 달했고 숭인원(崇仁園·서울시 동대문구)에 진을 안장한 뒤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둘 사이엔 태기가 없어 한때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후사를 고대한 지 10년 만인 1931년 12월 29일 마침내 둘째 아들 구가 태어났다. 도쿄 치요다구 아카사카에 있던 영친왕 저택에서였다. 이때만 해도 세 가족은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풍족한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간부직에 복무하며 일본 제국을 위해 헌신했다.
이구는 망국의 황세손 신분임을 모른 채 유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그가 스스로 정체성에 의구심을 제기한 건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며 대한민국이 해방되면서부터다. 영친왕 가족은 한국으로 환국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당시 미 군정하의 해방 정국은 좌·우 이념 대결과 정당 난립으로 혼란이 극심했다.
日, 패망 후 영친왕 가족 평민 신분으로 강등
배일 감정으로 독기 오른 국민 정서 속에 몰락왕조 황태자 귀국문제쯤은 안중에조차 없었다. 내로라하는 정객 모두 혼돈 정국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내 코가 석자’인데다 왕정복고에 대한 견해마저 첨예하게 엇갈렸다. 특히 전주 이씨 양녕대군(제3대 태종대왕 장자)파였던 이승만은 왕정체제 환원과 영친왕 환국을 극력 반대했다. 새로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이라며 황실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키고 왕손들을 궁핍 속에 방관했다.
같은 시기 일본도 변심했다. 호적을 새로 만드는 신적강하(新籍降下)를 통해 영친왕 가족을 평민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거처와 재산을 몰수했다.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시켜 강제징용 거류민과 동일하게 취급해 곤궁한 생활을 연명하도록 내팽개쳤다.
광복 당시 15세였던 이구는 영친왕(49)과 방자 비(45) 슬하에서 도쿄 학습원을 졸업한 후 195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후견인이 없는 외국 생활은 형극의 가시밭길이었다. ▲1956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건축학과 입학 ▲졸업 후 뉴욕 아이엠페이(IMPEI) 건축사무소 입사 ▲1959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며 미국 귀화 ▲1952년 4월 28일 발효된 대일 강화조약에 따라 한국국적 취득.
1963년 11월 12일 박정희 전 대통령 주선으로 방자 비와 이구는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몽환 상태의 영친왕은 “떠나던 날(1907년 12월 5일)도 그렇게 추웠는데 오늘도 바람이 매몰차구나. 이제야 비로소 내 조국, 내 땅이로다”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후 세 가족은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며 은둔 속에 망각돼 갔다.
어느새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고 일본은 한국전쟁 간극을 파고들어 선진국으로 진입해 갔다. 이구는 군사독재와 한·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데모 와중에 1965년부터 서울대·연세대 등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하며 한국사회에 동화돼 갔다. 그사이 회사설립·사업실패·이혼 등이 이구와 세상을 격리시켰다.
▲1966~1978년 건축설계회사 트랜스아시아 부사장 ▲1973년 사단법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총재·신한항업주식회사 설립, 실패 ▲1979년 일본으로 떠남 ▲1982년 줄리아 멀록과 별거·이혼 ▲1996년 일본서 영구 귀국 후 대동종약원 명예총재로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주관.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 강제징용 거류민 취급
필자는 종묘제례 전수자로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매년 5월 첫 일요일) 봉행 시 초헌관인 이구 황세손과 여러 차례 제관복무를 함께한 적이 있다. 그는 항상 말이 없었고 침잠된 표정이었다. 2005년 7월 16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황세손이 숨을 거뒀다는 보도를 접하고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떠올렸다. 왜 하필 그가 태어난 아카사카 인근의 ‘왕자’ 호텔이었을까.
유난히도 더웠던 그해 여름. 창덕궁 희정당에서 진행된 황세손 장례 기간 동안 필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문상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같은 달 7월 24일 영친왕의 영원(英園·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능역) 좌측 산록에 안장될 때는 묘 터를 국풍(國風)들과 함께 택지해 산역(山役)까지 동참했다.
이구 황세손의 후사는 의친왕 서(序)의 9남인 이갑(이해룡)의 장남 이원(이상협) 씨가 양자로 입후돼 왕실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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