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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 앞 일자각(日字閣)과 조형물.
역대 조선 임금의 정자각(丁字閣)보다 규모가 크며 황제릉에 따른 치산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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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어진박물관에 소장된 순종황제 수용. 원본을 바탕으로 현대에 채색한 것이다. |
순종황제(1874~1926)의 53년 생애는 4기로 대별된다. ▲2세 때 책봉된 왕세자 22년(2~24세)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칭제건원(稱帝建元) 후 황태자 자리 9년(25~33세) ▲부왕 강제 퇴위로 제국황제 4년(34~37세) ▲경술국치로 이왕 강등 16년 세월(38~53세).
순종(純宗)은 태어나면서부터 단 하루도 편할 날 없이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당시 의기투합했던 할머니(신정왕후·풍양 조씨)와 생가 할아버지(흥선대원군) 간 불화로 실각한 대원군의 불타는 복수심 ▲안동 김씨·풍양 조씨·여흥 민씨 간 조정 실권 장악을 위한 권력 암투 ▲나라 문호 개방을 둘러싼 수구파·개화파 사이의 양보 없는 사생결단 ▲은둔국 조선반도 이권 선점을 위한 청국·일본·러시아의 치열한 각축전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할아버지(대원군)와 어머니(명성황후 여흥 민씨)가 원수로 변해 국가 운명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하는 공방이었다.
사춘기의 순종, 말수 적어지고 내성적 변모
고종은 종실 안정과 국본(國本) 화평을 위해 순종을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하고 보양관(輔養官)을 이경우·송근수로 삼은 뒤 민영목을 유선(儒善)에, 임헌회를 유현(儒賢)으로 지명해 철저한 왕도교육을 시켰다. 모두가 당대 학문의 최고봉인 유림의 거두들이었다. 학문에 출중한 중신들을 제압하려면 용상의 임금부터 경세치도를 통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순종은 철이 들면서 실의에 빠지고 좌절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왜 권력과 부(富)를 차지하면 공유하려 하지 않고 세습하려 혈안일까 ▲공복으로 출사했으면 종묘(국가)와 사직(백성)의 우선이 당연지사인데 사리사욕에 투신하는가 ▲땅이 넓고 신식 무기를 개발한 나라들이 오히려 약소국을 강점해 수탈하고 못살게 구는가. 모든 것이 의구심으로 퇴적되면서 사춘기의 순종은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내성적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나라 안은 이미 신사유람단·미국 유학 등을 통해 일본·미국 등을 다녀온 신지식인들이 넘쳐났다. 군주의 어명 한 마디면 죽고 살던 봉건왕조 시대는 가고 왕정을 뒤엎으려는 역모사건이 연이어 속출했다. 고종과 순종은 수라상조차 믿지 못해 찬모 궁녀가 먼저 시식한 뒤 탈 없음을 확인하고 끼니를 이었다.
이런 백척간두의 일상 속에서도 명성황후의 세손에 대한 성화는 광적이었다. 여흥 민씨 척족 중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한 뒤 날마다 강제 합방시켰다. 온갖 산해진미와 궁중 묘방에도 세자의 춘색은 미동이 없었다. 명성황후는 나이 어린 동녀를 세자 침소에 입방시켜 놓고 문 밖에서 대기했다.
“세자의 춘정에 기미가 있으면 속히 아뢰도록 하라. 즉시 세자빈이 동침할 것이로다.”
어머니의 극성이 잦아지며 순종은 더욱 위축됐다. 빈궁 침소에는 접근을 꺼려했고 궐 안의 미색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순종은 할아버지가 개입된 임오군란(1882)으로 충주에 피신한 살아있는 어머니의 국장이 선포되는 걸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요청한 청국 군대가 할아버지를 체포, 청나라 바오딩(保定)이란 유배지에 4년 간 감금됐다 귀국하는 기막힌 난리도 겪었다.
순종은 차라리 왕자로 태어난 걸 원망했다. 질식할 것 같은 왕실의 일과 속에 조정 대신들은 주야장천 권력쟁투였고 어머니와 후궁들 시선 속엔 살기가 등등했다. 부왕 고종의 어명을 빙자해 친일·친청·친러 정책을 넘나들며 일관성 없는 명성황후와 민씨 세도 권신들의 등거리 외교도 탐탁하지 않았다.
1895년(을미사변) 일본 낭인 자객에 의해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되자 순종 부부는 실어증에 걸리도록 큰 충격을 받았다. 김옥균·유길준·전병하·조희연 등 갑신정변(1884) 연루자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가 공모한 소행임을 안 조선 백성은 분노로 격앙됐다. 국제 여론에 밀린 일본의 사과로 뒤늦게 국장이 선포됐지만 이미 명성황후 시신은 소진되고 없었다. 이웃나라 국모를 살해하여 시신마저 소각한 천인공노의 만행이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명성황후는 동구릉(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1) 안 숭릉(제18대 현종) 우백호 능선에 초장됐다가 1919년 3월 고종황제가 홍릉(사적 제207호·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에 예장되며 합장됐다. 시신이 없어 혼을 불러오는 초혼장(招魂葬)이었다. 순종은 이런 모든 절차와 과정을 지켜보며 무능한 황제 자신과 국권 상실의 통분을 뼈 마디마디마다 새겼다. 순종은 명성황후 국장 당시 직접 지은 애책문(哀冊文·오늘날의 추도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골수의 한을 대신했다.
일본, 명성황후 살해한 후 시신마저 소각
“온 나라 신민들이 도망친 난적들의 고기를 씹고 그 피를 마시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멀고 가까움에 차별이 없고 어리고 큰 것에도 차이가 없는데 어찌 저 푸른 하늘을 이고 함께 살아간단 말인고. 이치는 이미 없어졌고 의리 또한 장차 없어지고 말 것이로니.”
순종의 피맺힌 절규는 곧바로 민초들의 저항 정신에 불을 지폈다. 백제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신라 화랑의 무공불패→고려 강감찬 장군의 용맹무쌍→조선 사육신의 불사이군 충절→임진왜란의 승병의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정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어떤 악형과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이 되살아나 간악한 일제와 백병전으로 맞섰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대적했고 우국지사들은 해외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수립, 대한제국 적통을 이으려고 고군분투했다.
순종은 1392년 7월 19일 태조고황제가 창업해 519년 동안 이어오던 조선왕조가 1910년 8월 29일 종언을 고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역대 연산군·광해군의 폐주가 있었지만 자신은 왕업을 닫게 한 망주(亡主)가 아닌가. 아버지는 이태왕으로 덕수궁에 감금되고 아들은 이왕으로 창덕궁에 갇혔으니 죽어 선대왕들을 뵐 면목이 캄캄하기만 했다. 왜국(倭國)으로 하시하며 얕봤던 일본에게 당해 이 지경이 된 강토와 백성들 운명은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눈만 감으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빌붙어 잘 살아가는 친일 망종분자들이 어른거렸다. 때로는 7년 전 세상 떠난 부왕의 “모든 시름 내던지고 내 곁에 오라”는 옥음이 들리는 듯했다. 모든 것을 직감한 순종이 스무살 아래(33세)의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해평 윤씨를 가까이 불렀다.
“어린 나이로 대궐에 들어와 숱한 고초 이겨내느라 고생 많았소이다. 왕조는 비록 문 닫아 개명된 새 시대를 살아갈 것이나 마지막 황후로서 위의를 고이 간직토록 유념하시오.”
봉건왕조시대 가고 왕정 뒤엎을 역모 속출
유명(遺命)이었다. 윤비는 1966년 1월 13일까지 73세를 살았다.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大地月)이란 법명을 받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처했다. 당시는 이미 8·15 광복→6·25전쟁→4·19 학생혁명→5·16 군사혁명을 거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이 국내에 귀국했을 때다. 일제는 순종이 붕어하자 허위(虛位)이긴 하지만 영친왕에게 이왕(李王)위를 계승케 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