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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어진박물관에 있는 고종황제 수용. 비단에 채색으로 현대에 모사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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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앞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연못. 둥근 하늘과 사각의 땅을 형상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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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고종 등극 40년 칭경기념비.
도심 속의 화려한 단청 비각으로 수난 끝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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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임금 고종황제(1852~1919)는 사실상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다.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 사건이 무산된 뒤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같은 해 7월 아들 순종을 등극시켰으나 이미 내정·군사·외교권을 빼앗긴 뒤여서 통치행위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권력·부유·식자층이 동요하며 조선 역사는 굴절·왜곡되고 결국 망국을 자초하고 만다.
고종의 67년 생애는 비감하기 이를 데 없다. ▲12세까지의 궁핍한 사가 성장기 ▲생부 대원군의 섭정독재 10년 ▲여흥 민씨 척족 세도정권에 휘말린 허수아비 임금 23년 ▲난세에 등극한 대한제국 황제위 10년 ▲강제 퇴위당한 태황제 3년 ▲일제 치하 이태왕(李太王) 격하세월 9년. 그의 축약된 일생은 거센 바람 앞에 꺼져가는 제국 멸망의 치욕사와 동행한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불효했다. 마누라(조선시대 부인에 대한 경칭)와 앙숙이 된 아버지를 내치고 부자 인연을 단절했다. 임종(1898)이 가까워진 대원군이 시종을 불러 꺼져가는 목소리로 읍소했다.
“속히 주상을 모셔 오도록 하여라. 내가 이승을 하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뼈를 깎아 용상에 올린 임금을 보고 싶구나.”
그러나 고종은 끝내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뒷날 고종은 크게 후회했다. 이태왕 신분으로 덕수궁에 은폐돼 감금 생활을 하며 비로소 아버지 처지를 체휼하고 통곡했다. 경술국치(1910)로 왕조는 무너져 일인(日人) 천하가 됐고 아들(순종)도 폐위당해 자신과 같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계비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1854~1911) 소생 황태자 이은(李垠·영친왕)마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소식 두절된 지 부지하(不知何)세월-. 고종의 가슴에 용광로 같은 울화가 치솟으며 분기탱천이 온 몸을 전율했다.
“권좌의 말로가 참으로 비통하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의지를 바로 세워 국권을 지탱하고 백성들 고통이나 덜어줄 것을 -. 이제 와 뉘우친들 모든 것을 상실한 늙은 육신이 무얼 어쩌겠는가.”
절치부심하다 의문사한 조선 임금
12세 유충한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43년 7개월 7일간의 재위 기간 동안 비할 데 없이 고단한 삶을 살았다. 타국 세력의 국권 침탈로 보좌를 내준 뒤 13년 동안 망국왕(亡國王) 지위에서 절치부심하다 의문사한 절통한 조선 임금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 어떤 왕조든 망국 상황에 이르러서야 숱한 사건이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조선의 멸망 전야는 너무나 처절하고 무력했다.
급변하는 중국·일본·러시아 등의 동북아 국제정세에 둔감했고, 세계 관문을 봉쇄해 조선 민족끼리만 살면 무사할 줄 알았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무너지고 대항마로 들어선 여흥 민씨 척족 권력은 수려한 삼천리강산을 망국의 낙조로 물들였다. 일관성 없이 갈팡질팡하는 외교 노선은 외세 개입의 명분이 됐다. 청나라 속국으로 간섭을 받아오다 친일파·친러파로 갈리더니 어느새 이 땅은 3국군의 각축장으로 변해 버렸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우월권을 갖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키로 한 가쓰라·태프트 협정 조인(1905) 사실도 모르고 우리 조정은 내부 분열만 거듭했다. 영국은 청·일·러의 세력 균형을 유지시킨다는 명분으로 남해안 거문도를 점령(1885)해 진주하고, 프랑스는 강화 정족산성을 침략(1866·병인양요) 한 뒤 귀중한 문화재를 수없이 약탈해 갔다.
이즈음(1866)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프랑스 페롱 신부와 공모해 덕산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 생부로 고종의 친할아버지다. 이들 만행은 조상숭배가 사회덕목이었던 당시 조선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었고 섭정으로 실권자인 대원군을 격노케 했다. 국내 천주교인이 가담한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치 빌미가 됐고 1만 명 가까운 교인의 희생을 불러왔다. 곳곳에 척화비가 세워지고 국운이 막혀 버렸다.
섭정 10년째 되던 해인 1873년. 호조참판 면암 최익현(1833~1906)이 멍석 위에 날선 도끼를 놓고 대원군한테 상소했다. 주청이 가납 안 되면 도끼로 목을 쳐 달라는 사생결단이었다.
“이제 주상의 보령 22세로 천하를 도모할 시기이니 당장 섭정에서 물러나 친정케 하소서.”
이때 면암은 목청을 높여 대원군을 질타했고 죽음을 각오한 막말 언사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기습을 당한 대원군은 여지없이 실각했다. 며느리 민비(1851~1895·후일 명성황후로 추책)와 여흥 민씨 세도권력에 의한 계략임을 뒤늦게 안 대원군은 천지신명을 원망했다. 초로(54세)에 든 그는 극단적 복수를 다짐하며 일보 후퇴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능수능란한 민비의 이면 공작으로 대원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조대비·조성하·원로대신·아들(재면)까지 그의 등을 돌린 뒤였다.
마침내 이 땅에서 대리전쟁 발발
역사의 결말은 아무도 예측 못한다. 이후 조선 천지는 민비 세상이 됐다. 고종은 꼭두각시였고 조정의 권력 구도는 대추나무에 연줄 걸리듯 뒤엉켰다. 친청 수구당과 친일 개화당이 사사건건 대립했고 친러 세력들은 틈만 나면 물고 늘어졌다. 마침내 이 땅에서 청국과 일본(1894), 러시아와 일본(1904) 간의 대리전쟁이 발발했다. 조선 반도를 독차지하기 위해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기고만장했다. 메이지(明治) 일왕이 즉위(1868)하며 과감한 유신정책으로 서양 문명을 흡수한 일본은 갑오경장(1894)을 통해 조선 문물을 개혁하려 했다. 연호를 건양(建陽·1896)으로 정해 음력 사용을 금지시키고 양력을 쓰게 했으나 실효를 못 거뒀다.
일본의 계책은 더욱 앞서 나갔다. 조선에서 우위권을 장악한 그들은 조선과 청국을 갈라놓는 데 혈안이 됐다.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새로 쓰도록 도왔다. 연호(年號)는 황제국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의 건양 연호는 연력(年曆)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어서 광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해(광무 1년·1897) 가을 고종대왕은 대한제국 황제위(位)에 새로 등극했고 적색 곤룡포를 황금색 용포(龍袍)로 바꿔 입었다. 당시까지 중국은 중원 천자만 황색을 착용하고 제후국 군주에겐 다른 색을 입도록 했다. 이때부터 조선 임금 고종은 고종황제가 됐다. 내실 여부 판단이야 사가들 몫이고 이후부터 고종은 청국의 윤허 없이 선대왕을 황제로 추존하고 비명에 간 민비도 명성황후로 추책(追冊)했다.
서울시 광화문 네거리(종로구 세종로 142) 교보빌딩 앞에는 화려한 단청무늬의 낯선 비각이 있다. 고종 즉위 40년(광무 6년·1902)을 맞아 세운 칭경기념비(사적 제171호)다. 도로원표가 안에 있어 국토 측량의 원점이 되기도 하는 이 비는 고종의 일생처럼 수난이 뒤따랐다.
1954년 비각을 보수하며 일인에게 팔렸던 석조 만세문과 담장을 찾아내 복원한 후 1979년 전면적으로 개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고종황제 이야기는 까마득한 왕조시대가 아닌 엊그제 같은 우리시대 정서와 연결된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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