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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2> 고종황제 홍릉<上>

惟石정순삼 2011. 4. 21. 07:5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2> 고종황제 홍릉<上>


조선 최초의 황제릉으로 조영된 고종황제 홍릉.
을미사변으로 미운에 간 명성황후 민씨와 합폄으로 예장돼 있다.


1863년 12월 8일. 제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돌연 등하(登遐)하자 조정 안이 발칵 뒤집혔다. 제26대 옥좌에 과연 누가 오를 것인가. 그 당시 모든 결정권은 왕실의 수장인 익종(翼宗·효명세자)비 신정왕후(조 대비)가 쥐고 있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절, 숱한 의혹을 남긴 세자의 갑작스러운 의문사로 시어머니 순원왕후(안동 김씨)와 원수지간이 된 조 대비(풍양 조씨)는 이때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윤지는 곧 국법이었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해 익종대왕 양자로 입승대통(入承大統)케 하라.”

 안동 김씨 세도가를 비롯한 다른 근신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조정 안팎이 일순간에 의표를 찔린 것이다. 권신들 모두 이 위기를 제압 못하면 다음 수순이 궤멸임은 자명했다. 이판사판, 죽기를 작정하고 대들었다.

 “대비마마, 익성군이 익종대왕 법통을 승계한다면 헌묘(憲廟·제24대 헌종)와 대행(大行·예장하기 전의 임금 신분·철종)마마는 어찌 종묘에 봉안하오리까. 총명을 밝혀 통촉하시옵소서.”

 정면 도전이었다. 헌종은 형이 되고 철종은 아저씨 항렬인데 어떻게 한 묘(廟)를 건너뛰어 익성군이 보좌에 등극할 수 있느냐는 항명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조 대비도 속수무책, 피차가 단애절벽의 기로였다. 그러나 조 대비 윤음은 단호했다.

 “아우가 형에게 절하고 질항(姪行·조카)이 숙항(叔行·아저씨)에게 예를 표함은 천륜 법도가 아니겠소. 경들도 알다시피 대행이 헌묘에 복배(伏拜)하고 입사(入嗣)해야 하는 만고의 역보(逆譜)가 오히려 천지 궤변이고 꿈만 같소이다. 모두 입들 닥치시오.”

홍릉 앞의 일(日)자각. 역대 왕릉의 정(丁)자각과 달리 황제릉 앞에만 세울 수 있는 제각이다.


 세도 권신들에겐 자신들이 저지른 자업자득의 외통수였다. 또 다른 대신이 나서 주청하려 했으나 조 대비의 표독스런 안광 살기가 좌중을 압도했다. 23세에 과부가 된 후 33년을 청상으로 와신상담하며 56세 초로(初老)가 된 여인의 한에 누구 하나 대항치 못했다.

 “나라를 전하는 법통을 논한다면 정조→순조→익종→헌종 4대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승통돼 정법이오이다. 그런데 대행(철종)은 헌종의 아저씨로 순조의 계자가 돼 입후(入後)되니 하늘·땅이 전복됐소. 고매한 경들은 그대 가묘(家廟)에 가서 죽은 아들에게 절할 수 있겠소이까. 따라서 익성군은 익종의 둘째 아들로 입승되었으니 헌종은 황형(皇兄)이 되며 대행은 황숙고(皇叔考)가 되는 것이오. 어찌 여기에 두 개의 법통이 있다는 의심이 있을 것인가.”

 익성군이 곧 제26대 고종황제(1852~1919)다. 고종의 혈계는 사학자들조차 혼돈될 지경으로 복잡하다. 생가 혈통으로는 인평대군(제16대 인조의 3남) 8대손으로 남연군의 친손자며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이나, 입양 혈계는 사도세자(제21대 영조 아들) 고손자로 제22대 정조에게는 증손자 항렬이 된다. 사가에서도 일단 양자를 보내면 친부 족보에서 할보(割譜)돼 버려 친형제 간에도 한 촌수를 달리 계촌(計寸)하는 법이다.

 망국으로 치닫는 고종 시대에는 생경한 수사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병인양요·신미양요·병자수호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경장·을미사변·을사보호조약·경술국치 등이 대표적이다. 세간에서 흔히 ‘육갑(六甲)’이라 지칭하는 이른바 육십갑자를 모르고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단어다. 천간(天干) 10개(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지지(地支) 12개(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구성돼 있는 육십갑자는 양(하늘·남자)과 음(땅·여자)으로 배합돼 각각 우주섭리를 주관한다. 천간의 갑과 지지의 자가 만나 ‘갑자’가 되고 을(천간)과 미(지지)가 짝이 되면 ‘을미사변’의 해가 된다. 12개 지지는 10개의 천간 아래 따라붙어 6회의 변신을 거듭하며 오묘한 조화를 생성시킨다.

 고종이 등극한 해인 1864년은 우연히도 갑자년이어서 육십갑자만 암기하면 계수하기가 편리하다. 이를테면 병인양요(1866)는 병인이 육갑 순서 3번이어서 고종 3년이고, 갑오경장(1894)은 갑오가 육갑 서열 31이어서 고종 31년이 된다.

 열두 살의 고종은 용상에 오르면서 양어머니인 조 대비 조종을 받다가 곧바로 대리 섭정이 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시키는 대로 좇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종은 대원군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임금이었다. 이성에 눈떠 가던 고종은 궁녀 이씨(후일 귀인 이씨)를 총애했다. 조 대비와 대원군은 중전 간택을 서둘렀다.

대원군 부인 민씨가 친정 조카뻘 되는 여성부원군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 민정호(閔貞鎬·1851~1845)를 천거했다. 고종보다 한 살 위였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에 몸서리친 대원군은 부인 소청을 가납해 왕비로 간택했다. 곧 명성황후다. 경기도 여주 산골의 영락(零落) 양반 여식으로 9세 때 모친을 잃고 고아나 진배없이 자란 사고무친 환경이 대원군을 솔깃하게 했다.

 누군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겠는가. 수모와 간난(艱難)을 극복하며 처절하게 살아온 대원군이 자초한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였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 대결은 우연찮게 발단됐다.

 고종 3년(1866) 민씨(15세)를 정비로 맞이한 고종은 인물 없고 영악스러운 명성황후를 멀리했다. 이 틈새에 귀인 이씨가 완화군(1866)을 낳자 대원군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려 했다. 며느리 명성황후는 삭신을 부들부들 떨며 시아버지 대원군을 증오했다. 억겁을 환생해도 풀지 못할 이 구부(舅婦) 간 앙숙대결은 마침내 500년 조선왕조를 문닫게 했다.

 이럴 때마다 고종은 참담했다. 처음엔 대원군 기세에 눌려 조정을 내맡겼으나 대리 섭정 10년째 되던 1873년 친정을 선포하며 부자 간 인연을 끊어버렸다. 22세 때다.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안하무인이 된 명성황후는 즉각 여흥 민씨 척족정권을 수립하고 내정은 물론 천정부지의 무소불위 전권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왕조 역사상 내명부 수장 중전이 외교권까지 행사하긴 명성황후가 사상 초유다.

 이후 고난에 찬 고종의 행장들은 오늘의 근·현대사와 연결되는 사실(事實)들이어서 우리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史實)이다. 고종은 조선왕조가 멸망한 9년 뒤인 1919년(기미) 1월 21일 새벽 6시를 전후해 갑자기 붕어했다. 전날까지 무탈했던 고종태황제가 급서하자 망국의 한이 북받친 조선 민중들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며 의분에 떨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릉(洪陵·사적 제207호)에 고종황제가 예장되던 인산(因山) 일은 마침 3월 1일이었다. 이날 서울 탑골공원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우리 민족이 종교·이념·신분을 초월해 다함께 참여한 3·1운동이다.

 홍릉에 가면 산릉제를 봉행하는 제각(祭閣)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역대 조선왕릉 앞에 세워진 정(丁)자각이 아니라 일(日)자각이다. 황제릉 앞에만 건립할 수 있는 능제(制)다. 을좌(동에서 남으로 15도)신향(서에서 북으로 15도)의 능침엔 을미사변(1895) 때 시해당한 명성황후와 합폄으로 안장돼 있다. 일인들이 조선황실 번성하라고 명당을 골라 택지했을 리 없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