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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0>흥선대원군 이하응 묘<上>

惟石정순삼 2011. 4. 21. 07:4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0>흥선대원군 이하응 묘<上>

희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 묘.

고종의 생부로 역전과 극적인 삶을 산 생전처럼 죽어서도 수난이 계속됐다.

 

대원군 묘 곁에 있는 은신군(가운데) 묘단(墓壇).

사도세자의 4남으로 대원군에겐 계(系)조부가 된다.

 

대원군(大院君)은 왕조시대 임금을 탄출하긴 했으나 왕위에는 오르지 못한 금상의 생부에게 추존해 올린 존호(尊號)다. 조선 왕실에는 덕흥대원군(1530~1559·제14대 선조 생부)·전계대원군(?~1844·제25대 철종 생부)·흥선대원군(1820~1898·제26대 고종 생부)의 3대 원군이 있다. 이중 흥선(興宣)대원군만이 유일하게 생존 당시 대원군 존호를 받아 막강 권력을 원 없이 휘두르다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어느 날 갑자기 대통승계에 편적된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으로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남연군은 원래 인평대군(제16대 인조 3남) 7대손으로 왕위에 오를 내명부 서열과는 거리가 먼 촌수였다. 후사를 두지 못해 계자로 대를 이어오던 연령군(제21대 영조 아우) 혈계에 어느 날 갑자기 왕명에 따라 남연군이 적통 입적됐다. 존재조차 없던 왕손 하나가 느닷없이 영조의 증손자가 되며 대통승계 반열에 편적된 것이다. 이래서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으로 약칭)의 새옹지마(塞翁之馬)로 반전되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극은 탄생 배경부터가 극적이기만 하다.

 대원군 성장기의 왕실 내명부 여인들 사이는 살벌한 긴장 국면이었다. 시어머니 순원왕후(안동 김씨)와 며느리(풍양 조씨·후일 신정왕후·이하 조대비로 칭함)의 문중 간 앙숙대결로 궐내에는 항상 일촉즉발 전운이 감돌았다. 이 권력의 틈새에 조대비·대원군·조성하(1845~1881·조대비 친정조카)가 주역으로 부상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송두리째 바꿔놓고 만다. 이들 3인방엔 안동 김씨가 원수였고 세도정권 붕괴를 위해 치밀한 공조를 계획했다. 조대비는 지략과 둔갑술에 능한 대원군 같은 책사가 절실했고, 대원군에게는 조대비와 연결할 조성하처럼 날렵하고 눈치 빠른 하수인이 천군만마였다.

 세간에서 흔히 ‘대원위대감’으로 불렸던 대원군은 남연군과 부인 여흥 민씨 막내로 12세(어머니), 17세(아버지) 때 양친을 여읜 사고무친(四顧無親) 낙박왕손이다. 21세(헌종 7년·1841)에 흥선정(興宣正·종친 작위)이 됐고 2년 뒤 흥선군에 봉해졌다. 26세에 비로소 수릉(추존 문조익황제릉·조대비 남편) 천장도감의 대존관(代尊官)이라는 한직 벼슬에 봉직하며 후일 천하를 도모하게 되는 조대비와 첫 대면을 한다. 초면에 인물됨을 알아챈 조대비가 대원군에게 하문했다.

 “흥선군은 대세를 어찌 보며 한낮의 태양이 두려운가.”

 “대비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옵니다만 작금은 잠룡기(潛龍期)이온지라 개·돼지 꼴이 되어서라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옵니다.”

 이후 조대비와 대원군은 조성하를 연락책으로 궐내 동태와 민심 판도를 수시 교환키로 은밀 내약한 뒤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여걸장부 조대비의 밀약 보장을 얻어낸 대원군은 돌변했다. 하루아침에 집안 살림을 내팽개치고 건달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등과 몰려다니며 못된 짓만 골라 행패 부렸다. 시정에선 이들의 성을 따 ‘천하장안’이라 겁냈고 대원군은 ‘궁도령’으로 비칭하며 폐인 취급당했다.

 이러면서도 대원군은 집에 가면 덕산의 2대 천자지지에 아버지 묘를 이장한 후 7년(1852) 뒤 태어난 둘째 아들 명복(고종황제 아명)을 앉혀 놓고 엄혹한 왕도교육을 시켰다. 왕실용어·도보법·용상정좌법은 물론 대신들을 꾸짖는 옥음의 광폭까지 소홀함이 없었다.

 대원군은 서울 장안 상갓집이나 잔칫날을 귀신같이 알고 염치 불고 걸식했다. 특히 안동 김씨 초상집이나 제삿날은 맨 먼저 찾아가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공밥에 공술로 얼근히 취한 ‘궁도령’이 당대 최고 권력자들에게 수작을 걸어 망신을 자청했다.

 “대감, 그 술상에 남은 술을 소인 흥선이가 치우면 안되겠소이까.”

조대비·대원군·조성하, 세도정권 붕괴 위해 공조

 세도가들은 낄낄대고 조롱하며 있는 술을 퍼 먹였다. 그리고는 만취해 비틀대는 대원군을 향해 식은 전 조각에 침을 뱉어 내던졌다. 대원군은 엎드려 기어가 침 묻은 전을 집어 들고 헤진 도포 자락에 쓱쓱 닦아 게걸스럽게 먹어 댔다. 술상을 나르던 동네 머슴들조차 혀를 찼다.

 “쯧쯧, 저게 무슨 왕손이야. ‘상갓집 개’ 같으니라구.”

 인간심사에 철심이 박히고 한이 응어리지면 그까짓 수모와 체면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 길로 대원군은 조성하 집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 흐느적거리며 망가졌던 ‘상갓집 개’가 아니었다. 그의 안광은 푸르게 번득였고 굳게 다문 입가엔 냉소가 흘렀다. 이때 조성하는 조대비 명으로 궐내 안팎을 무상출입하고 있었다.

 “근자 금상의 용태는 어떠하시다던가.”

 “대감, 오늘 아침 조례를 받으러 용상에 오르시다 넘어지셨다 합니다. 수라상도 마다한 채 후궁 침소에만 드신다 하옵니다.”

 “대비마마께 바로 아뢰도록 하여라. 흥선이가 주역 괘를 짚어 보니 금상의 명운이 이미 쇠진해 후사를 대비해야 하실 때라고. 유고 시 옥새부터 챙겨야 후환이 없을 것임도 말이다.”

생존 당시 대원군 존호 받아 권력 휘둘러

 풍수와 주역에 달통했던 대원군의 예언대로 얼마 후 주상이 돌연 세상을 떠났다. 제25대 철종이 재위 14년(1863) 만에 보령 33세로 승하한 것이다. 경천동지로 크게 당황한건 안동 김씨 권신들이었다. 세도권력의 핵심축이었던 순원왕후가 훙서한 지도 오래였고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은 조대비인데다 어보조차 그녀의 품에 있었다. 이 사태를 대비 못한 방심에 땅을 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조대비전에 시립해 있던 조정 권신 중 원로대신 정원용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아뢰었다.

 “대비마마,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익성군(翼城君)으로 봉하여 익종대왕(추존 문조익황제) 대통을 계승토록 하시옵소서.”

 안동 김씨 권신들이 일제히 들고 나서 부당함을 고하려 했으나 조대비 옥음이 훨씬 빨랐다.

 “내 경들의 하나된 뜻을 가납해 체납토록 하겠소. 바삐 서둘러 전례범절을 갖춘 뒤 익성군을 보좌에 오르게 하라.”

 이어지는 조대비의 또 다른 윤음은 삼천리 강토를 가르는 뇌성벽력의 충격이었다. 음성은 가늘게 떨렸으나 서릿발보다도 찼다.

 “주상의 보령 12세로 일천하니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봉해 대리 섭정토록 할 것이니 경들은 그리들 아오.”

 이제부터 대원군의 말 한마디는 곧 어명이었다. 어제까지의 ‘궁도령’ ‘상갓집 개’가 오늘 임금보다 더한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불세출의 걸인(傑人) 대원군은 죽어서도 수난이었다. 광무 2년(1898)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 민씨와 초장됐다가 1908년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됐다. 그 후 58년이 지난 1966년 6월 16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록에 묘좌유향(정서향)으로 다시 천장된 뒤 경기도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됐다. 용맥이 스쳐 지나가는 과협으로 유골이 뒤숭숭할 자리다.

 인간이 살아서 누린 부귀·권세가 죽어서까지 이어진다면 생자(生者)와 사자(死者) 모두 질식하고 말 것이다. 대원군 묘는 그 현장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