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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9>남연군 이구 묘<下>

惟石정순삼 2011. 4. 21. 07:4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9>남연군 이구 묘<下>
새 황제 탄생이 두려워 일제가 끊어놓은 남연군 묘 후룡맥. 산 양쪽의 절단 흔적이 역력하다.

남연군 묘 건너편의 보덕사 극락전.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 고종 등극 후 새로 지어준
 비구니 사찰이다.

남연군묘 입구에 자리한 거북이 물형의 구사봉.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변신한다.

 

권력에 갈급했던 자가 졸지에 득세하면 세상이 만만해지는 법이다. 하옥 김좌근(1797~1869)의 청탁서찰을 품에 넣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천지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대원군은 하옥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경기·충청 지역에 소문부터 냈다. 비록 ‘상갓집 개’로 괄시받는 신세였지만 철권군주 영조 대왕의 엄연한 고손자였다. 세상에선 ‘남의 집 옥벼루 빌려 상납하고 얻어낸 게 겨우 아버지 묘 이장이냐’고 대원군을 소인배라 비웃었다.

 표리부동으로 득의양양한 대원군이 지사(地師) 정만인과 덕산 상가리를 다시 찾았다. 꾀죄죄한 예전의 대원군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하옥의 서찰만 들이밀면 수령·방백 모두가 삭신을 오그리며 칙사 대접을 했다.

상여로 몇날며칠 여러고을 민폐 끼치며 이운

 “정 지사, 자네는 어인 연유로 이 혈(穴)을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로 소점(所點)했는가. 흥선이가 심히 궁금하니 어서 지평(地評)을 확인해 주게나.”

 “그야 대감께서 더 소상히 아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아, 돌다리도 두들겨 본 후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가는 법이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아는 게 최고라고 거들먹거리는 놈일세. 풍수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욕심을 내려놓고 물탐(物貪)을 비워야 명경지수처럼 땅속이 드러나 보이는 거지.”

 정만인은 대원군이 신풍(神風)인 줄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미 선경에 든 그의 경지를 새삼 경탄했다. 그가 풀어낸 해박한 풍수 비결은 이러하다.

 풍수에서 자미원(紫微垣)은 북극 소웅좌 부근에 있는 명당이다. 오직 천제(天帝)만이 소유하고 묻힐 수 있는 궁궐이나 왕릉 터로 전해 오는 천하제일의 명당 이름이다. 자미원 물격(物格)을 빠짐없이 갖춘 길지를 자미원국(局)이라 하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도 여러 곳이 입증됐다.

 한반도의 낭림산맥은 평안북도로부터 흘러 강계 부근에 맨 처음 천시원국(天市垣局)을 형성해 놓았다. 그 맥이 묘향산으로 낙맥한 뒤 번신(飜身)하면서 평양 근교를 자미원국으로 결혈시켰다. 이 묘향산맥은 또 마식령 중추맥으로 이어지며 송도(개성) 일대에 다시 자미원국을 펼치니 만월대 궁궐터다.

 이와는 달리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내리뻗은 백두대간 정기가 토함산 지맥까지 연연출룡(連連出龍)해 돌출혈로 융기하니 신라 천년 도읍지 경주 자미원국이다. 부산 금정산까지 연결되는 낙동정맥을 지칭한다. 또 하나의 자미원국은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함경도 두류산을 거쳐 급강하하다 원산에서 갈라선다. 이 한북정맥 속기처(束氣處)에 혈장(穴場)을 맺으며 우뚝 서 용틀임한 대명당이 북악산 아래 경복궁 터다.

 말없이 경청하던 흥선대원군도 정만인의 숨겨진 내공에 내심 탄복했다. 그러나 대원군에겐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한 후 천자가 태어날 덕산 묏자리가 당장 더 화급했다. 술술 풀어내고 있는 정만인의 부아를 은근히 질렀다.

 “자네는 안다는 게 겨우 양택지뿐이라던가. 그렇다면 이 땅에 음택지 자미원은 가당찮다는 말이렷다.”

 정만인이 깜짝 놀랐다. 나경을 들고 얼른 대원군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올시다. 바로 대감이 점지한 이 자리가 황제필출 자미원이로소이다. 임금 제(帝)자 형국의 저 조산(祖山·혈처 뒤의 먼 산) 산세와 온갖 귀봉들이 자리한 주변 국세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응축됐던 정만인의 비장 음택풍수 한 수 한 수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 풀리듯 연이어 되살아났다. ①음택 자미원 입구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봉(日月峰)이 있어 물의 파구를 막아야 하니 곧 일월한문(日月悍門)이다. ②이 물 곁에 거북이나 물고기 형상의 구사봉(龜蛇峰)이 자리해 ③소와 기러기를 상징하는 금수봉(禽獸峰)에 물을 공급해야 상생할 수 있다. ④묘 앞 오방(午方·남쪽)에는 좌룡우마의 용마봉(龍馬峰)이 받쳐줘 입궐을 대기해야 하고 ⑤북두칠성을 닮은 영험한 화표봉(華表峰)이 잡신 근접을 막아야 최고의 길격이다.

묘 도굴 실패로 1만명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대원군은 덕산면 상가리 입구부터 숨겨진 양 산록의 5격(五格)이 정만인 입을 통해 재확인되자 이곳이 틀림없는 왕생지지임을 더욱 믿게 됐다. 이장할 명당에 올라선 대원군은 다시 한번 놀랐다. 웅엄장대한 산세가 거대 계곡으로 중첩돼 적이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 요새처럼 안온했다. 그러나 남연군을 이장할 혈처에는 가야사(伽倻寺) 산신각 탑이 봉안돼 있었다.

 대원군 생각은 치밀하고도 용의주도했다. 예산 수덕사 본사(本寺)에서 대법회가 있다고 속여 승려들이 절을 비운 사이 가야사에 불을 질렀다. 대원군은 기왕 폐허가 된 몹쓸 땅을 묏자리로 내주면 나중에 새 절을 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훗날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고종 황제)에 오른 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절이 남연군 묘 건너편에 있는 오늘날의 보덕사(報德寺)다.

 억지 춘향으로 천하명당을 얻어낸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는 남연군 묘를 파묘해 예산까지 거창하고 화려한 상여로 이운(移運)했다. 몇날 며칠을 여러 고을에 민폐 끼칠 때마다 대원군은 하옥 대감 친필 서한을 은근히 꺼내 보였다. 안동 김씨 권문세가들도 흥선대원군이 소란 피우며 이장하는 줄은 알았으나 “그까짓 흥선군이 뭘 알겠느냐”며 실소하며 방치했다. 마침내 남연군 유골이 장지에 이르자 대원군은 정만인을 재촉했다.

 “자네 재혈(裁穴)을 어찌하겠는가. 천하에 둘 없는 자미원도 유골을 모시는 재혈이 어긋나면 수포로 돌아가는 법일세.”

 “대감, 이 자리는 돌로 둘러싸인 석곽에 광중 자리에만 흙이 있는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이올시다. 당판에 놓인 저 옥새석을 보소서. 뒷날 소인을 괄시하면 아니 되십니다.”

 곤향(坤向·서에서 남으로 45도) 득수(물길이 들어옴)에 손향(巽向·동에서 남으로 45도) 파수(물길이 나감)이니 좌향은 건좌(乾坐·서에서 북으로 45도) 손향(巽向)이라. 파수와 향이 똑같은 손향의 당문파(물길이 직선으로 나감)이긴 하나 남주작이 가로막아 후손 발복에 큰 영향은 못 준다. 여기에 건(좌)과 곤(득수)이 정배(正配·바른 짝)를 이루니 풍수를 아는 지관치고 어느 누가 고개 안 숙이랴. 주역에서 건(乾)은 하늘이고 아버지요, 곤(坤)은 땅이며 어머니다.

일제, 묘 뒤쪽의 거대한 후룡맥 완전히 절단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 묘(기념물 제80호·1989년 지정)를 이장(1846)한 지 7년(1852) 만에 고종 황제가 되는 둘째아들 명복을 얻었다. 이 묘를 잘못 건드려 역사에 끼친 파장은 필설로 형언키 어렵다. 고종 등극 후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천주교인들이 합세해 미수에 그친 남연군 묘 도굴 실패로 1만 명 가까운 교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섭정 대원군의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국운을 가로막은 쇄국정치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순종 이후 또 다른 황제 출현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묘의 거대한 후룡맥을 완전히 절단해 놓았다. 남연군 묘 현장에는 그 소행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