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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8>남연군 이구 묘<上>

惟石정순삼 2011. 4. 21. 07:4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8>남연군 이구 묘<上>

흥선대원군 생부 남연군 이구 묘.

당판 앞의 자연석은 옥새를 의미하며 이 묘를 쓴 후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몰락했고

고종 ㆍ순종 두 황제가 출현했다.

남연군 묘 입구에 있는 일월한문.

군왕지지의 필수 물형으로 해(왼쪽·양)와 달(오른쪽·음)이 물길을 막아 수구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며 왕실 계보는 가늠할 수 없이 복잡해지고 만다. 아저씨(제25대 철종)가 조카(제24대 헌종)에게 절하도록 만든 세도정권의 역보(逆譜) 조작에 이어 제26대 고종이 등극하는 과정은 가히 극적이기만 하다.

 예로부터 한 가문의 대(代)를 잇는 혈계 전통과 양자(養子)와 계자(繼子)를 입적(入籍)하는 일은 가장 큰 중대사였다. 여기서 양자는 한 촌수 아래의 강보에 싸인 남아를 영아 적부터 양육하는 것이고, 계자는 한 촌수 아래 사내를 대를 잇기 위해 아들로 삼는 것으로 구분된다. 고종의 혈계를 추적하다 보면 이 같은 역사적 화두가 해독되며 흥선대원군과 그의 생부 남연군(南延君)이 역사속에서 전면 부각된다.

 한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힌 뒤 역사의 축(軸)을 돌려놓은 묘가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에 있는 남연군 이구(李球·1788~1836)의 묘다. 남연군 묘는 예사로운 묘가 아니다. 이 묘를 쓴 후 아래에 적시하는 몇 가지 측면에서 엄청난 역사적 파장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내명부서 왕족 종친으로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남연군 묘를 이곳에 이장한 후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몰락하며 ▲두 황제(고종ㆍ순종)가 출현했고 ▲이 묘를 잘못 건드려(도굴 실패) 8000여 명의 천주교인이 몰살당했다. 또한 이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에서 유일무이한 명당으로 공인하는 자미원국(紫微垣局)이라는 데 풍수학계의 이견이 없다.

 남연군의 궤적에는 인생만사 교훈이 따른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며 보잘것없는 하찮은 처지라 해 얕잡아 보다간 큰 봉변당한다. 선현들은 뽕밭이 바다 되고 바다가 뽕밭 되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경책해 왔다. 남연군의 인생 역전은 그의 가계 내력에서 극명히 확인된다.

 이야기는 제19대 숙종시대로 소급된다. 숙종에겐 경종(생모 장희빈)·영조(생모 숙빈 최씨)·연령군(생모 명빈 박씨)의 세 왕자가 있었다. 숙종은 막내 연령군(1699~1719)을 지극히 아꼈는데 그가 21세로 요절하자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 어명으로 소현세자 5대손인 상대(尙大)를 계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도록 했는데 상대는 사도세자(영조 아들)와 동항렬이다.

 상대가 득남을 못해 대가 끊기자 영조는 다시 은신군(사도세자 서열 4남·생모 숙빈 임씨)을 계자로 들여 후대를 잇게 했다. 은신군은 은언군(전계대원군 생부·철종 조부)의 친아우이며 제22대 정조와 이복형제 간이다. 은신군이 역모 누명을 쓰고 제주도 유배지서 분사(憤死)해 또 절손하게 됐다.

 정조 아들 제23대 순조가 또다시 자신과 먼 형제 항렬인 남연군을 계자로 세워 은신군 혈통을 승계토록 했다. 이때 남연군은 인평대군(제16대 인조 3남) 6대손인 병원(秉源)의 아들로 왕통 승계와는 전혀 무관한 내명부 촌수였다. 계자로 승습되는 연령군 혈계에 입적되자 남연군은 단박 영조대왕 증손자 반열에 편적(編籍)됐다. 남연군은 철종 아버지인 전계대원군과도 형제 항렬이 됐다.

 끼니가 간데없어 무위도식으로 소일하던 남연군 가계에 일대 역전의 발단이 되는 계기였다. 대가 끊긴 친진(親盡) 왕족 종친으로 남연군에 봉해지며 수원관(守園官·세자 묘지기·1815)과 수릉관(守陵官·왕릉 관리직·1822) 등 미관말직을 지내다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에겐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의 네 아들이 있었다.

미관말직 지내다 49세 세상 떠

 자고로 지고지난한 인생항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이중 막내 흥선군이 바로 조선말엽 30여 년 동안 정치지평을 뒤흔들며 천하대세를 개벽시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인두겁으로 몸받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영욕의 시말을 남김없이 감내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대원군은 추존 문조익황제(제24대 헌종 생부)와 제25대 철종과도 형제 항렬이다.

 대원군과 함께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종식시켜 조선 말기사를 반전시켜 놓은 조대비(추존 문조익황제비)는 대원군의 형수뻘이며 헌종은 조카 항렬이다. 이에 따라 헌종과 고종은 형제 항렬이 된다. 다소 복잡다단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 왕실 혈계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대통승계와 직결된다. 훗날 고종이 등극하는 과정에서 조대비와 안동 김씨 세력 간 정면대결로 치달으며 법통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파락호 야인시절이던 어느날, 당대 최고 신풍지사(神風地師) 정만인과 대원군이 천하제일 명당길지를 찾아 충청도 일대를 샅샅이 뒤지며 주유천하를 하고 있었다. 홍성·청양·보령의 3개 군을 아우르는 오서산 산록에 이르자 정만인이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대감, 이 자리라면 만석꾼으로 천 년은 가겠소이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이 정도 팔자면 나라님 덕에 잘 먹고 잘 사는거지 더 이상 무슨 복록을 바라겠는가. 흰 쌀밥에 고깃국만이 다는 아닐세. 눈치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정만인은 얼른 알아챘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며칠 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가야사에 이르렀다. 절 뒤의 산신각에 오른 두 사람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감! 틀림없는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올시다.”

 순간, 대원군이 황급하게 정만인의 입을 막으며 손사래를 쳤다.

 “자네 땅을 보는 줄 알았더니 땅속까지는 못 보는구려. 내가 보기에 재혈만 잘하면 현감 둘 정도는 나오겠네. 함부로 입 놀리지 말고 말조심하게나.”

 대원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정만인은 간이 벌렁거리도록 떨었다. 임금이 나올 묘 자리를 잡거나 쓰는 사람 모두 역모죄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할 때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이런 왕생지지(王生之地)가 지관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두 사람은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 남연군 묘의 이장을 결심한 대원군은 서둘러 한양으로 귀경해 영초 김병학 판서집을 찾았다. 평소 영초는 안동 김씨 세도가 중 대원군 처지를 동정해 친밀하게 지내는 처지였다. 그 집에는 오래전부터 가보로 전해오는 중국산 옥벼루가 있었다.

대원군, 아버지 묘 이장하기로

 “영초 대감, 저 벼루를 하루만 빌려 주신다면 잘 보고 갖다 드리겠소이다.”

 영초는 아무런 의심 없이 옥벼루를 내주었다. 그 길로 대원군은 득달같이 영의정 하옥 김좌근 집을 찾아갔다.

 “하옥 대감, 이 옥벼루는 소인이 어느 선비한테 난 한 폭을 쳐주고 얻은 것인데 본래 한 쌍이었으나 하나는 어디 가고 홀로 남았소이다. 소인은 간직할 처지가 못 되고 설사 소장한다 해도 결국 술값으로 날릴 것 같아 대감한테 진상하러 왔소이다.”

 하옥이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이 부러워하던 영초의 진품 옥벼루와 똑같은 것이었다. 하옥이 쾌히 승낙하며 낙낙해졌다. 이 틈을 놓칠 리 없는 대원군이었다.

 “대감,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충청감사에게 소인 청을 들어주라는 편지 한 장만 써주시오.”

 하옥은 즉석에서 흥선군 청을 무조건 들어주라는 편지를 일필휘지로 써 건네주었다. 당대 최고 권세가 하옥 대감 친필에 충청감사는 설설기며 남연군 묘 이장을 알아서 주선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