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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의 철종 생장가 유허지 비각. 부엌에 방 하나의 오두막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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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 선원면에 있는 철종대왕 외가. 염종수가 가짜 외삼촌으로 둔갑해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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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10년(1859)의 일이다. 금상의 외삼촌을 자처하는 염가(廉哥)란 자가 엄중한 대궐 관문을 뚫고 찾아와 탑전에 부복했다. 남루한 행색에 피골마저 상접한 염가는 다짜고짜 통곡하며 임금의 누선(腺)을 자극했다.
“소인이 바로 전하께옵서 애타게 찾으시는 외삼촌 염종수이옵니다. 진즉 알현하지 못한 중죄를 크게 엄벌해 주소서.”
작취미성(昨醉未醒)으로 몽롱하게 용상에 앉아 졸고 있던 철종은 깜짝 놀랐다. 등극하던 해(1849)부터 일구월심 찾아온 외삼촌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순간 주상의 용안에선 소나기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후 염종수는 조정 요직을 완전히 장악한 안동 김씨 주청에 의해 충청 병마절도사로 제수됐다. 얼마 안 돼 황해병사를 거치더니 1년 만에 서남해안 병권을 총괄하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직에 올랐다. 그러나 염종수의 마각은 곧 탄로 났다. 무위도식으로 빈둥대던 건달 염가(파주 염씨) 주제에 철종의 외가(용담 염씨) 족보를 위조해 일대 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다.
염가, 가짜 외삼촌 행세 희대의 사기극 벌여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철종이 당장 염종수를 포박해 친국하니 과연 가짜였다. 즉각 파직시키고 참수한 뒤 효수했다. 피붙이가 그리웠던 임금은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렸고 팔도 유민들은 다시 한번 세도권력을 비웃으며 조롱했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었다.
자고로 우민들이 어진 스승이나 지도자를 만남은 시대적 천복이라 했다. 이때 당시 백성들 소원은 너무나 질박했다. 그저 세종대왕 버금가는 성군과 황희 정승 같은 청백리 재상을 만나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누명 쓰고 죽지나 않으면 천명으로 여겼다. 이런 기본권조차 지켜내지 못한 세도정권이었다. 인피(人皮)를 벗겨 내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아사자 시체는 도처에 즐비한데 세도가 광속에서는 쌀과 고기 썩는 악취가 사방을 진동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라 안팎의 정세는 더욱 혼돈 속에 빠져들어 속수무책이었다. ▲철종 2년(1851) 관서·해서 지방의 수재·기근 ▲관북지방 화재·기근(1852) ▲호남지방 수재(1854) ▲경기지방 화재와 영남·해서지방 수재(1856) ▲호서지방 수재(1857) ▲관북지방 수재(1860~1861) ▲삼남·관북지방 민란(1862). 여기에다 겨울 홍수와 여름 우박의 괴변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을 함부로 하는 몹쓸 권력에 하늘마저 등을 돌린 것이다.
철종 7년(1856)에는 서·남해상에 프랑스 함대와 이양선이 출몰해 조정을 위협하며 개항과 통상을 압박해 왔다. 이즈음 세계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열강들의 광범위한 식민정책과 자원수탈로 약소국들 운명은 풍전등화 신세였다. 국제정세에 어두워 미리 대처하지 못한 국가는 망국의 길만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혹한 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 편입 못 한 나라와 민족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참혹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조정에선 망한 지 200년이 넘는 명나라를 섬기면서 청나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안하무인으로 자만한 세도권력은 가련한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연일 흥청망청이었고, 처가 척족들이 두려웠던 임금 또한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알아서 주지육림 속에서 흐느적댔다. 철종은 1 왕후에 아홉 명의 후궁을 취해 5남 7녀를 득출했으나 제6후궁 숙의 범씨 소생 영혜옹주만이 생존해 금릉위 박영효에게 하가했다. 5남 6녀 모두 출생 6개월도 안 돼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마저 시집 간 지 3개월 만에 서세했다.
나라 안은 기근·홍수, 밖에선 개항 요구
남부여대로 타향을 떠도는 유민(流民)들은 삼삼오오 떼 지어 다니며 야유하고 수군댔다. 여자가 잘 따르는 염복(艶福)을 탐내다가는 누구나 저 지경에 이른다며 적수공권의 걸인 신세를 위안 삼았다. 궐내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23세로 청상과부가 돼 안동 김씨 압제하에 가문마저 몰락해버린 풍양 조씨 신정왕후(조대비·추존 문조익황제비)의 철천지한이었다. 조대비는 나이 많은 시어머니(순원왕후·안동 김씨)가 죽기만을 축수했고 머지않아 자신의 세상이 올 것을 확신하며 왕재(王材)를 찾고 있었다.
이 간극을 절묘하게 파고든 희대의 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다. 풍수와 명리·주역에 관통했던 대원군은 살얼음판 같은 염량세태를 마음껏 희롱하며 천하대세를 읽었다. 후사 없이 훙서할 금상의 뒷일을 정확히 예측했던 것이다. 조영하(1845~1884·조대비 조카)를 포섭해 조대비와 은밀히 내통하며 후일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고종황제 아명)을 보위에 앉히기로 내약해 두었다. 부패정권을 향한 조대비와 대원군 간 천추의 한이 안동 김씨 몰락을 자초하는 연계제휴로 가시화된 것이다.
이런 거대한 음모를 알 리 없는 안동 김씨 일문 권세가들은 방심했다. 국익은 안중에도 없었고 가문 영달에만 미혹된 나머지 뒷날 용상에 오를 만한 영특한 왕손은 역모죄로 옭아 사사시켰다. 이럴수록 대원군은 굴신과 굴종을 주저하지 않으며 시정잡배 파락호로 위장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어느 날 철종이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다’는 권신들을 향해 용상에서 꾸짖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도 연명 못해 굶어 죽는데 팔도 관리들이 올린 장계를 보면 선정 아닌 것이 없소. 어찌해서 수령·방백들마저 민생을 이리도 소홀히 한단 말이오. 그대들이 조정 녹봉을 타 먹는 백관들이 맞소이까.”
그래도 세도정권은 우이송경이었다. 이미 승하한 임금과 왕비를 칭송하는 시호·존호의 추시(追諡)에 몰두했고 임금이 내리는 사패지 확보에만 혈안이었다. 철종 8년(1857) 순원왕후가 훙서하자 순조 대왕과 합장하며 순종이었던 묘호를 순조로 천묘(遷廟)했다. 후궁 왕자(君)가 재위한 뒤 예척하면 일단 종(宗)으로 예우했다가 적통성 시비가 사라지면 조(祖)로 고치는 전례(典禮)에 따른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또 철종의 가계를 신원시켰다. 세도권력이 역모로 몰아 죽인 할아버지(은언군)ㆍ아버지(전계대원군)ㆍ백부(상계군)ㆍ이복형(회평군)을 복작 안 시키면 대통승계 법통에 중대 하자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자해지였으나 소가 웃을 아전인수의 자가당착이었다.
뒤늦게 치세에 힘쓰려 했으나 때는 늦어
뒤늦게 철들어 치세와 치도를 깨닫게 된 철종은 무기력한 군왕의 처지를 비관하며 탄식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신이 겪은 민생고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남다른 애정으로 백성을 살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야생마보다 강인했던 타고난 건강도 어느덧 무너져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용상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해(1863) 초가을. 쇠잔해진 육신을 부액받으며 서삼릉에 들른 철종이 희릉·인릉·소경원·효창원 등을 돌아보며 독백했다. 죽음을 직감한 영물(靈物)의 예시였다.
“한 육신 죽어 왕릉이나 원(園)에 묻힌들 크게 대수로울 일이며 무명잡부 묘에 진토가 돼간들 빈부귀천이 따로 있으랴. 어찌 인간의 한평생이 이리 허망할 수 있단 말인고.”
이날 환궁 이후 철종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33세였다. 강화에 있는 철종 생장가(용흥궁)와 외가(강화읍 선원면) 동네 사람들은 슬피 울었다. 원범이가 임금이 안 되고 농부로 살았으면 백수도 더 했을 것이라며 한양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묻노니, 도대체 그대들의 권력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 일생을 이토록 망쳐 놓는단 말인가.”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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