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아가는 중년 삶의 이야기

특별기사이야기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5>철종대왕 예릉<上>

惟石정순삼 2011. 4. 21. 07:2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5>철종대왕 예릉<上>

전주 어진 박물관에 있는 철종대왕 수용.

사고무친으로 왕위에 올라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희생당했다.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철종대왕 어필.

 

 조선왕조 개국 458년째인 1849년 음력 6월 6일. 이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봄부터 시작된 가뭄에 논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고 파종한 전작(田作) 작물 대부분이 싹조차 못 틔웠다. 타들어 가는 대지에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느닷없이 마른번개가 치더니 뇌성과 함께 우박이 쏟아졌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백성은 말세가 가까웠다며 고향을 등지고 정처없는 유랑길에 나섰다.

순원왕후, 시신은 `뒷전' 옥새만 `차지'

 이때 왕실에는 더 큰 위기가 닥쳐왔다. 8세에 등극해 재위 15년이 된 23세의 헌종대왕(1827~1849)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할머니(순원왕후·안동 김씨)와 어머니(신정왕후·풍양 조씨) 성화로 2 왕후 3 후궁을 둔 헌종이었지만 본디 여색을 멀리해 뒤이을 후사조차 없었다. 조정 권력을 양분해 국정을 농단하던 두 문중 수뇌부에 비상이 걸렸다.

 순조 등극(1801) 초부터 악명 높은 세도정치로 국정을 파탄시킨 안동 김씨 일파가 순원왕후를 에워싸고 긴급대책을 논의했다. 주상의 용태는 이미 글렀으니 예척 후 대통을 잘 세워 권력유지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일치였다. 입시한 문중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뢰었다.

 “왕비 전하, 화급히 어보부터 챙기셔야 하옵니다. 만에 하나 신정왕후가 차지하는 날이면 우리 문중의 멸문지화가 눈앞임을 명심하셔야 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창덕궁 정침에서 금상이 위독하다는 황급한 전갈이 왔다. 권신들은 부리나케 정침으로 달려갔고 순원왕후는 재빨리 옥새함을 치마폭에 감쌌다. 같은 시각 신정왕후는 천금보다 귀한 외아들의 죽음을 맞느라 천지를 분간 못 했다. 풍양 조씨 세도권력은 거두 조만영(조대비 친정아버지)이 병사(헌종 12년·1846)한 후 추진동력을 상실한 지 오래여서 수구회의조차 별무효과였다.

 이날 헌종은 경칩 날 봄볕에 잔설 녹듯 스르르 운명하고 말았다. 백성은 비록 헌종의 치적이 몇 권(동국사략·삼조보감·동국문헌비고 등)의 서적 찬수와 권율 사당(행주산성) 건립, 일부 저수지 제방을 수축하는 것에 그쳤지만, 인생이 불쌍해 통곡했다. 진외가·외가의 진흙탕 권력싸움에 큰 뜻 한번 펴지 못한 채 악명만 뒤집어쓰고 갔다는 동정심에서였다.

 옥새를 품에 넣은 순원왕후는 또다시 왕실의 큰 어른이 됐다. 어보는 곧 제왕과 국권의 상징이다. 조정 대소신료들을 소집해 놓고 산천초목이 벌벌 떨도록 지엄한 분부를 내렸다.

철종 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

 “경들도 주지하다시피 작금 영조대왕의 혈손은 강도(江都·강화)에 우거 중인 전계군 아들 원범밖에 없소. 속히 예의를 갖춰 입궐토록 해 헌종의 대통을 잇게 하시오.”

 조정에선 즉시 연(輦·차일이 있는 가마)을 띄워 강화 길을 재촉게 했다. 세도 권문의 고관대작들이 타는 여(輿·차일 없이 열린 가마)와는 격이 다른 어거(御)였다. 호위병이 위의를 갖춰 창을 들고 줄지어 따라갔다. 백성은 영문을 몰랐다.

 헌종이 승하하던 날 강화의 인적 드문 산골. 19세 원범(元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무지게를 받쳐놓고 낫질하느라 여념 없었다. 홀어머니(용담 염씨)와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무지렁이처럼 살아가는 일상이었다. 이웃집 처녀 동갑내기 순이(성명 미상)가 몰래 삶아 건네준 감자 몇 개로 점심을 때운 뒤 담배를 가랑잎에 말아 꼬나물었다. 원범이와 순이는 훗날 신랑·각시가 되기로 부모 몰래 약속한 사이였다.

 저 멀리서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행렬이 다가왔다. 원범은 덜컥 겁이 났다. 할아버지(은언군)·아버지(전계대원군)·큰형(상계군)도 임금이 되려 했다는 역모죄에 몰려 잡혀가 죽었는데 이젠 내 차례가 됐나 싶었다. 낫자루를 내던지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으나 어느새 호위대장이 앞길을 막아선 뒤 부복하며 아뢰었다.

 “전하, 어서 연에 오르시옵소서.”

 원범은 “난 일자무식으로 배운 것이 없으며 왕이 되려고도 한 적 없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호위대장은 발버둥치는 원범을 덥석 안아 연(가마) 위에 앉혔다. 원범을 태운 가마가 순이네 집 앞을 지날 때 밖을 내다보니 순이가 울고 있었다. 순간 둘의 눈길이 마주쳤다.

 “원범아, 네가 오늘부터 나라님이래. 너 나랑 한 약속 잊으면 안 돼. 네가 나를 버리면 난 죽어 버릴 거야. 원범아, 가지 마.”

 어느새 호위병 하나가 튀어나와 순이 입을 틀어막으며 논둑에 내동댕이쳤다. 바동거리는 순이를 바라보며 원범은 소리내 울었다. 저 착한 순이 하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나를 어느 누가 사내라 하겠는가. 날이 저물어 가마가 대궐에 도착했다. 대소신료가 입시한 가운데 순원왕후가 근엄한 얼굴로 원범을 맞았다.

 원범은 이날(6월 6일)로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관례(冠禮)를 행한 다음 6월 9일(1849) 헌종의 주상(主喪)이 됐다. 당일 순원왕후 품에 있던 대보(大寶)를 전해 받고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제25대 철종대왕(哲宗大王ㆍ1831~1863)이 된 것이다. 급조된 임금이었다. 이날부터 이름을 변으로 고치고 자(字)는 도승(道升), 호(號)는 대용재(大勇齋)라 했다. 철종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금상의 보령 15세가 넘으면 친정하는 게 국법이었지만 순원왕후는 천하 무식의 속 빈 강정 철종이 학문을 익힐 때까지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19세 철종은 이날부터 천자문을 강습받으며 왕실 법도를 익히는 데 전념했다. 바로 안동 김씨 세도가들이 바라던 정국이었다. 2년 후(철종 2년~1851)에는 영은 부원군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1837~1878)로 맞았다. 여섯 살 연하의 왕비를 만난 철종은 첫눈에 반했다. 강화 뒷집 처녀 순이는 잊은 지 벌써 오래였다.

왕실 족보 뒤집은 안동김씨 세도정권

 철종이 등극하며 왕실의 선원계보(璿源系譜)는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헌종의 생부 익종(효명세자·추존 문조익황제)과 형제 항렬(6촌)인 철종이 보위에 오르며 아저씨(철종)가 조카(헌종)에게 절하는 전대미문의 역보(逆譜·족보를 거꾸로 뒤집는 것) 만행이 세도정권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순원왕후는 철종이 헌종의 양자로 뒤를 이어 왕통을 승계했음을 천명했다. 더 큰 망발이었다. 이로 인해 왕실 촌수는 가늠할 수 없이 뒤엉켰다. 재종질부(7촌 조카며느리·헌종 왕비)가 어머니 되고 육촌형수(신정왕후)가 할머니로 둔갑한 것이며 당숙모(순원왕후)는 종증조할머니가 돼 버렸다.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천륜을 배반한 패악이었다.

 사학계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 실정(失政) 중 항렬을 뒤집어 철종을 등극시킨 사건을 가장 추악한 몰인지사(沒人之事)로 손꼽는다. 다른 왕손을 용상에 앉히려 해도 이미 쓸 만한 왕족은 역모로 몰아 죽여 지친(至親)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런 세도권력이 백성을 염두에 두고 종묘사직의 장래를 염려했겠는가. 철종이 재위하는 14년 6개월 동안 조선왕조는 망조(亡兆)가 깊어 석양녘에 기울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