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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4>전계대원군 이광 묘

惟石정순삼 2011. 4. 21. 07:19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4>전계대원군 이광 묘

영조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조카였던 전계대원군 이광 묘.

철종의 생부로 극심한 가난 속에 불우한 생애를 살았다.

철종의 생모 용담 염씨 묘. ‘함바집’ 작부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말년이 유복했다.

 

 서울 우이동에 사는 이제우(66) 선생한테 전화가 왔다. “국방일보에 연재 중인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을 스크랩하며 읽는 열광 독자인데 왕릉 취재현장을 꼭 한번 동행하고 싶다”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연재가 계속되는 지난 1년 동안 전국 독자분들의 끊임없는 격려에 힘입은 바 커 경기 포천시 선단동 산11-14에 소재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묘 취재를 함께했다. 영하 14도의 혹한에 칼바람이 몰아치던 날. 평소 취재 길의 도반(道伴)이자 죽마고우인 월보(김관동)·만중(유상호)이 동승한 차 안은 불우한 일생을 살다 간 전계대원군 이광(?~1844) 얘기로 분위기가 침잠했다. 사후 대원군으로 추존되긴 했지만, 생일날 잘 먹자고 7일을 굶어 잔치한들 무슨 소용일까 싶다.

 조선 왕조사를 운위함에 전계대원군은 참으로 생소한 인물이다. 제25대 철종 대왕 생부라는 구체적 사실(史實)에도 낯설기 그지없다.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만 떠올리는 대중적 인지도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 대원군은 또 있었다. 제14대 선조대왕 생부 이초(李 ·1530~1559)가 덕흥(德興)대원군이었고 제16대 인조대왕 생부 이부(李 ·1580~1619)는 정원(定遠)대원군이었다가 아들 인조에 의해 원종 대왕으로 다시 추존됐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잘 둬 부모가 호강함은 요지부동의 불변이치다.

 왕조사에 대원군의 출현은 왕통 승계에 유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묘(前廟)가 후사를 잇지 못해 양자를 통해 보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대통의 변고에는 반드시 피를 불렀다. 이 중에도 전계대원군은 가장 비참한 가족사를 안고 멸시 천대 속에 살다 간 유민(流民) 인생의 전형이었다.

사도세자 손자로 철종 대왕의 생부

 아버지 영조의 눈 밖에 나 쌀뒤주 속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추존 장조의황제)는 1왕비 2후궁에게서 5남 3녀를 탄출했다.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의황후)한테 장남 의소세자가 태어났으나 3세 때 조졸하고 이어 차남을 낳으니 정조대왕이다.

 사도세자의 제1후궁 숙빈 임씨가 3남 은언군 인과 4남 은신군 진을 낳고 제2후궁 경빈 박씨는 5남 은전군 찬을 출생했다. 후궁 소생의 은언군·은신군·은전군 3형제는 이복형 산( )이 정조 임금으로 등극하며 천출·걸인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만다. 역모를 꾀하는 무리마다 이들 왕자를 내세워 옹립하려 했고 죄 없는 군(君)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약을 들이키고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이 부인 진천 송씨(일부 기록에는 상산 송씨)를 득배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상계군·풍계군·전계군이다. 이 중 셋째 아들이 후일 철종에 의해 대원군으로 추존되는 전계대원군이다. 초명이 해동(海東)으로 철종 등극 후 광으로 고쳤으며 출생연도마저 불분명하다.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1986)된 전계대원군 묘 안내표지판에는 1785년생으로 표기됐으나 공인된 사전이나 선원(璿源·왕실의 계보연원) 기록에서도 전거를 찾을 수 없다. 이는 곧 출생 당시의 열악한 환경과 성장배경을 방증하는 것이다. 사도세자→은언군→전계군의 3대 가족사는 왕손으로 태어난 게 불행이었다.

왕실서 버림받고 빈농으로 살다 객사

 아들이 미우면 손자도 달갑지 않은 법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뒤 후회는 했으나 손자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손자 산으로 왕위는 잇게 했지만 정조 역시 능수능란한 할아버지의 시험에 들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물며 죽은 아들 첩 자식이 뭐 그리 대단했겠는가. 더구나 영조 곁엔 며느리보다 어린 꽃다운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는 서 손자 셋을 죽든 말든 내팽개쳤다.

 견디다 못한 은언군이 일을 저질렀다. 영조 47년(1771) 끼니를 이으려고 상인들에게 진 빚 소문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 것이다. 조왕(祖王)은 진노했다. 왕손으로 품위를 실추했다는 것이었다. 호구지책으로 꾼 손자 빚을 변제해 주기는커녕 되레 직산 현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시켰다. 제주도에서 먼 바다와 청천 하늘을 원망하며 연명한 지 4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은언군(전계군 아버지)에게 또 불행이 닥쳤다. 이복형 정조가 등극한 지 10년(1786) 되던 해.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의 모반죄에 연루돼 어명으로 자결한 것이다. 이때 둘째 아들 풍계군도 곁에 없었다. 이복동생 되는 은전군이 홍상간의 역모 때 왕으로 추대됐다 해 자진한 뒤 대를 잇기 위해 풍계군을 양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에게 아들 전계군을 데리고 강화에 가 은거해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은언군 부부와 전계군은 아무 연고 없는 강화 벽촌에 내버려졌다. 왕실에서 버림받은 몰락 왕손을 돌봐줄 사람 그 누구도 없었다. 정조 21년(1797) 울화가 치민 은언군이 강화를 탈출하려다 잡혀 오히려 그곳에 안치되고 말았다. 유배지가 된 것이다.

 급전직하의 절박한 상황에선 천애절벽의 나뭇가지라도 잡게 돼 있다. 사면초가의 은언군 일족에게 서학(천주교)이 전하는 복음은 ‘하늘의 소리’였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더 좋은 내세가 있다는 가르침을 따라 청국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를 받았다. 청상과부 며느리 신씨(전계군 형수)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던 해(1801)인 신유년 가을. 다시 조정 권력을 장악한 벽파(노론)세력은 정순왕후와 함께 서학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때 전계군 부모와 형수는 왕실 본보기로 가차없이 사사됐다. 참으로 박복한 전계군(철종 생부)이었다. 혈혈단신이 돼버린 것이다. 이후 전계군이 강화 움막에서 보낸 기구한 일생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다.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일일 잡역부로까지 떠돌며 막행막식으로 살아갔다. 때로는 금상(순조)과 사촌간이란 촌수도 잊었다.

 전계군은 초취 전주 최씨(추봉 완양부대부인)가 장남 회평군(초명 원경·1827년생)을 낳고 죽자 후실(성씨 미상)을 만나 차남 영평군(초명 경응·1830년생)을 출생했다. 재취로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용담 염씨(廉氏·?~1863)를 다시 만나 덕완군(초명 원범)을 낳으니 바로 ‘강화도령’ 철종 대왕이다. 염성화의 딸이었던 철종 생모는 공사현장 식당(함바집) 작부였다. 병명도 모른 채 객사한 전계군은 경기 양주군 신혈면 진관에 초장됐다. 천만뜻밖에 셋째 아들 원범이 임금으로 등극하며 철종 7년(1856) 현재의 포천 장지로 천장 됐고 그해 전계대원군으로 추존됐다. 왕방산 아래 임좌(북에서 서로 15도)병향(남에서 동으로 15도)의 명당에 초취 전주 최씨와 합장돼 있다. 용담 염씨는 전계대원군 묘 좌청룡 아래 자좌오향(정남향)의 함몰지점에 용사됐다. 왕을 탄출했으나 첩의 신분이었음이 뼈저리다.

 전계대원군 묘에는 왕릉 못지않은 병풍석과 함께 철종 어필의 묘비가 있다. 숙맥(菽麥) 임금 철종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세도 정권이 세운 신도비까지 있으며 6·25전쟁 당시 인민군 당사로 썼다는 99칸의 안가(安家) 일부가 전하고 있다. 사람 팔자 누구도 장담 못할 현장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