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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6>철종대왕 예릉<中>

惟石정순삼 2011. 4. 21. 07:2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6>철종대왕 예릉<中>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철종 대왕과 철인왕후의 예릉.

조선왕릉 상설제도에 따른 마지막 왕릉으로 석물들이 우람 장대하다.

인천광역시 강화읍에 있는 철종 생장가. `용흥궁'이란 편액은 흥선대원군 친필이다.

 

제24대 헌종이 23세로 예척(1849)하자 왕실 내명부(內命婦·왕비와 후궁을 일컫는 총칭)에는 조손(祖孫) 3대 과부가 동석하게 됐다.

61세의 안동 김씨 순원왕후(순조비·1789~1857), 42세의 풍양 조씨 신정왕후(추존 문조익황제비·1808~1890), 19세의 남양 홍씨 효정왕후(헌종 계비·1831~1903)였다. 조정 안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시 세 문중 간 대결은 재빠른 기지로 옥새를 확보한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측이 승리했다. 환갑을 갓 넘긴 노련한 순원왕후였다.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는 19세 떠꺼머리총각 원범(元範)을 데려다 임금(철종·1831~1863) 자리에 앉혀 놓고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졸지에 생포돼 와 생사기로에 선 죄인처럼 떨고 있는 철종에게 순원왕후가 엄히 분부했다.

 “주상은 똑똑히 들으시오. 사람이 책을 읽지 않고 고사(故事)에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소이다. 전에 배운 학문이 현달하지 못함을 탓하지 말고 강관(講官)의 가르침에 따라 환골탈태(換骨奪胎)토록 매진하시오.”

 철종은 목숨을 거두지 않고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조부모(은언군 부부)·종조부(은전군)·아버지(전계대원군)·백부(상계군)·이복형(회평군) 모두가 왕이 되려 했다는 역모에 연루돼 몰살당한 걸 알고 있었다. 용상이나 왕관보다 사는 게 우선이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고두배하며 조아렸다.

 “그저 하랍시는 대로 따르겠사오니 목숨만은 부지케 해 주옵소서.”

 이날 이후 철종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철저한 감시 속에 허수아비 임금이 됐다. 거처는 대비 내전 곁으로 정했고 수라상도 같은 주방에서 조리해 진상토록 했다. 생사가판(生死可判)권을 맡긴 것이다. 금상은 미동도 않으면서 대소사를 대비한테 품의해 결정했고 그 세월이 9년이었다.

 2년 후(철종 2년·1851)에는 영은부원군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1837~1878)로 간택했다. 6세 연하의 인물 곱고 조신한 규수였다. 당대 권문세가 처녀를 각시로 맞은 철종은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강화도령’으로 농사나 짓고 있다면 엄두도 못 낼 배필이었다.

 주상 침전에 꽃다운 후궁들 강제 입실

 꼭두각시 임금이 된 3년째로 22세(1852) 되던 해. 대비 김씨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주상이 친정토록 했다. 어떤 명분으로도 스물이 넘은 임금을 망석중이로 만들 순 없었던 것이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무지렁이 촌부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철종이었지만 당시 최고 문장의 왕사들로부터 습득한 학문은 개안(開眼)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치도(治道)와 치세(治世)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세도정권 입장에선 날로 학문이 깊어가는 철종이 위협적 존재로 다가왔다. 남자를 망가뜨리는 데 술과 여자만 한 게 또 있겠는가. 때마침 15세로 간택된 중전 김씨에겐 수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순원왕후 엄명으로 주상 침전에 꽃다운 후궁들이 강제로 입실했다. 최음제가 섞인 감로주에 기름진 안주가 밤낮없이 철종을 녹여냈다.

 임금도 처음엔 이게 바로 무릉도원인가 싶었다. 중전 김씨를 포함해 ▲제1후궁 귀인 박씨 ▲제2후궁 귀인 조씨 ▲제3후궁 귀인 이씨 ▲제4후궁 숙의 방씨 ▲제5후궁 숙의 김씨 ▲제6후궁 숙의 범씨 ▲제7후궁 궁인 박씨(직첩 없음) ▲제8후궁 궁인 이씨(직첩 없음) ▲제9 후궁 궁인 남씨(직첩 없음) 등 열 명의 여인을 밤마다 번갈아 가며 만취된 채 방사를 치렀다.

 국사를 처결해야 할 군왕은 침전에서 나올 때마다 휘청거렸고 부액(扶腋) 받아 오르는 용상 계단을 헛디뎌 고꾸라지기도 했다. 두 눈에는 누런 눈곱이 덮어 시야를 가렸고, 앉았다 일어서면 수십 개의 별이 어른거렸다.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이럴 때 세도 권신들은 조정인사에 재무결재까지 조목조목 아뢰었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최악의 학정·민생고

 “과인이 무얼 안다고 그러시오. 경들이 다 알아서 하시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정 대신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어전을 물러 나왔다. 관작(官爵)을 팔고 사는 매관매직이 모두 뜻대로 성사된 것이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다 보니 과거제도는 무용지물된 지 오래였고 아첨과 뇌물만이 보신책의 우선이었다. 어쩌다 정신이 든 철종이 권신들을 향해 일갈했다.

 “과거는 정실과 세력을 좇기 급급하고 명문가 자제들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채 발탁되니 종묘사직이 암담하오. 탐관오리 폐해는 홍수·맹수보다 극심해 만백성을 유랑시키고 있소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구렁에서 구휼하지 못하는 과인의 처지가 참으로 비감하기만 하오.”

 오죽하면 순원왕후조차 친정 척족들에게 벼슬을 내리며 집안 문호(門戶)가 지나치게 영성(盈盛)하는 것을 염려했겠는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못살겠다 아우성이었고 말세가 임박했다는 도참설이 난무했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최악의 학정에 민생고가 겹쳤다.

 강물이 범람하면 둑이 붕괴하고 독이 넘치면 깨지게 돼 있다. 마침내 민중이 봉기했다. 서학(천주교)과 새로 창도된 동학(천도교)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진주·함흥·제주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황한 철종과 세도정권이 진무사를 파견하는 등 미봉책을 썼으나 불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바야흐로 국난이었다.

 이즈음 왕실 내명부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화신 순원왕후가 69세로 훙서(철종 8년·1857)한 것이다. 안타까운 역사가 내리막으로 치닫는 전환점이었다. 이제 왕실 내 최고 어른은 명실공히 풍양 조씨 신정왕후(조대비)였다.

 그러나 숨 가쁘게 질주하는 유장한 역사와 폐인이 된 철종과는 무관했다. 이미 ‘섹스중독’의 중병에 든 제왕은 정사를 잊은 지 오래였고 건장했던 육신은 급속도로 쇠잔해졌다. 이날(1863. 12. 8)도 금상은 궁궐 후원에서 궁녀를 뒤쫓으며 희롱하다 갑자기 넘어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또 국상이 난 것이다. 나무꾼을 끌어다가 억지 왕위에 앉힌 지 14년 6개월 만이었다. 1 왕후 9 후궁 속에 후사 하나 남기지 못했다.

 철종은 살아생전 “내가 죽거든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릉) 오른편 언덕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중종대왕 초장지였으나 문정왕후(제2계비) 시샘으로 억지 천장된 명당 자리다.

고종이 등극하며 대리 섭정이 된 흥선대원군은 이곳(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에 좌좌오향의 정남향으로 장사 지내며 능 호를 예릉(睿陵)으로 정했다. 후일(고종 15년·1878) 철인왕후가 승하한 뒤 동원 쌍분으로 조영됐다. 오늘날의 서삼릉으로 사적 제200호다.

왕위에 오른지 14년 6개월만에 서거

 흥선대원군은 예릉을 조성하며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로 단장했다. 세도권력에 대한 왕권 과시와 함께 철종의 등극 과정이 개천에서 용 난 아들(고종황제) 처지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강화의 철종 생장가에 ‘龍興宮’이란 친필 편액을 내렸다.

특히 예릉은 조선 왕릉의 상설제도에 따라 조영된 마지막 왕릉이라는 데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철종과 왕비는 광무 3년(1899) 고종에 의해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와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추존됐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