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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3>헌종대왕 경릉 <下>

惟石정순삼 2011. 4. 21. 07:1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53>헌종대왕 경릉 <下>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733호 헌종 가례도병.

 비단 채색의 8폭 중 세 폭 부분으로 1844년 그린 것이다.

1왕 2왕후 비석이 유일하게 함께 있는 헌종대왕 경릉 비각.

 

네 살 적에 아버지(효명세자·추존 문조익황제)를 여읜 헌종대왕(憲宗大王·1827~1849)은 진전(眞殿·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전각)에 봉안된 생부 수용( 容)을 우러를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했다. 철이 들수록 할머니(순원왕후·안동 김씨)가 야속했고 어머니(신정왕후·풍양 조씨)는 가련했다.

15세 되던 해 할머니가 철렴하고 친정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어머니 명을 따랐다. 어느새 조정에는 외조부·외삼촌·외당숙 등 외척 세력들로 넘쳐났다. 조정 세력 판도는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외가)와 외가의 이전투구 판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헌종은 내명부에 문안들 때마다 옥체가 움츠러들었다. 독기를 품은 할머니(진외가)의 눈초리와 위풍당당한 어머니(외가)의 엄명이 교차할 때마다 헌종은 심히 괴로워하며 독백했다.

“이 강토가 안동 김씨·풍양 조씨만의 나라가 아닐진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고. 인간사 모두가 잠시 일었다 스러지는 포말(泡沫)보다 못한 것을 겨우 가문 영달을 위해 진명(盡命)하려는가. 정녕 권세와 부귀가 요괴스러움을 한탄하노라.”

20세가 돼 가는 청년 임금은 백성을 위해 뜻을 펴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수치스럽고 용렬해 보였다. 이럴 때마다 헌종은 왕관마저 내던지고 계비 효정왕후(남양 홍씨)와 단둘이 강촌에 묻혀 촌부로 살겠다는 일념을 수시로 떠올렸다. 진정 이 고통, 이 충정을 대신할 자만 있다면 언제라도 훌훌 내던지고 싶었다.

 세실 제독 군함 이끌고 외연도 정박

설상가상으로 내우외환이었다.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 앵베르·모방·샤스탕 신부를 처형하고 천주교인을 집단 학살한 것이 외교 쟁점으로 비화한 것이다. 헌종 12년(1846) 프랑스 해군 세실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정박해 국왕에게 국서를 전달하는 긴장사태가 발생했다. 천주교 탄압에 엄중히 항의하는 외교문서였다. 조정은 기겁했으나 대처 능력이 없었다.

이에 앞서 1년 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 호가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서해안과 제주도 연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갔다. 이때 풍양 조씨가 장악한 세도 권력이 대처한 외교적 대응은 청국을 통해 관동주재 영국 당국에 항의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영국 군함의 서·남해안 불법 측량 사건은 후일 우리 영토의 무단점령이란 엄청난 사건으로 연계된다. 고종 22년(1885) 영국이 청국·러시아·일본과의 세력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함대를 시켜 거문도를 강제 점령해 버린 것이다. 영국군은 이름조차 해밀턴 섬으로 바꾸고 2년 동안 주둔하다 세계 여론에 밀려 철수했다. 또 프랑스에서는 한국 최초 김대건 신부를 처형한 뒤 군문효수한 사건을 외교분쟁으로 확대시켰다. 압력에 굴복한 조정이 청나라를 통해 답신을 보내니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다.

역병·기근에 백성들 살던 곳 등져

헌종 14년(1848) 들어서는 남·동해안과 서해상에 이양선(異樣船)이 수시로 출몰해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럴 때마다 세도 정권은 ‘언 발에 오줌 누기’로 대충 달래거나 위협해 쫓아 버렸다. 여기에 내우(內憂)마저 가중됐다. 석 달 가뭄으로 싹조차 못 틔운 문전옥답을 갑작스러운 뇌성폭우가 휩쓸어 자갈밭으로 만들었다. 역병과 기근을 못 견딘 난민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 등짐지고 살던 곳과 이별했다. 국가적 재앙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도심을 배회하다 유리걸식하는 부랑배가 됐고 일부는 범죄 소굴로 빠져들었다. 자고로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인 법. 난리 통에 영웅호걸 있고 개천에서 용 난다고 했다. 죽지 못해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장사가 대박으로 이어져 벼락 졸부가 되는가 하면 폐광을 사들인 뒤 금맥이 터져 거부된 자도 속출했다.

돈이면 안 될 게 없고 ‘망자(亡者)도 벌떡 일어난다’는 세상이었다. 이들은 졸지에 번 거금으로 벼슬자리와 양반 지위를 샀다. 평생 업보의 굴레였던 상놈·천민의 피맺힌 한을 풀고 면천(免賤)의 길로 나선 것이다. 권문세가 곳간에는 양곡이 썩어 흩어졌고 졸부들 주방에는 술과 고기가 넘쳐났다. 다름 아닌 말세였다.

이즈음 경주 지방에는 수운 최제우(1824~1864)라는 범상치 않은 청년이 천지신명의 운기를 터득해 도통득도를 이뤄가고 있었다. 몰락 양반(경주 최씨) 후손이었던 수운은 절망과 도탄에 빠진 민중 속을 치밀하게 파고들며 놀라운 힘으로 결집시켰다. 서학에 맞서 동학(東學)이라 창도하고 해월 최시형→의암 손병희로 도맥을 이으니 천도교의 시원이다. 그 후 동학은 증산 강일순(1871~1909)의 증산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의 원불교로 대맥을 형성하며 민족종교의 근간이 된다.

무릇 시대의 조류는 우연한 게 아니다. 천지조화로 밀려오는 대양의 조수(潮水)를 감히 인력으로 어쩌겠는가.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가 농민층 분해로 이어지고 부농층과 부상(富商)들이 무리로 결성되며 신분 질서가 무너져 갔다. 절대왕권의 봉건군주 체제가 도전을 받으며 총체적 위기로 다가온 것이다. 400년 세월 조선사회를 지탱해 온 반·상 계급이 붕괴되고 자아·자주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원왕후, 시신은 `뒷전' 옥새에만 `눈독'

지지리도 복이 없는 조선 백성들이었다. 조정에 또 변고가 생긴 것이다. 헌종 12년(1846) 당대 세도정치의 거두 조만영(신정왕후 아버지)이 세상을 떠나며 풍양 조씨 일문이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문중 자체 내 알력이 겹친데다 야전 수장을 잃으면서 세도 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수몰해 버렸다. 순원왕후(58)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고 신정왕후(39)는 절통함에 땅을 쳤다.

무기력한 제왕에겐 세월도 원수였다. 정사에 임해서는 진외가와 외가 간의 처절한 복수극, 편전에 들어와서는 견원지간의 고·부가 뿜어내는 무서운 살기, 궐 밖을 내다보면 못 살겠다 발버둥치는 백성들의 아우성. 23세 헌종대왕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대왕은 계비 홍씨와 혼례 올릴 때 그린 가례병도(嘉禮屛圖·1844·보물 제733호)를 보며 다섯 살 아래의 효정왕후를 은밀히 불렀다.

“중전, 내 오늘만은 여보라 불러보고 싶소이다. 어쩌다 용상에 올라 이 못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소. 과인이 오래 살아 호강시켜 줘야 할텐데 기력이 이미 쇠진됐나 보오.”

홍씨는 금상 옥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둘 사이에 소생은 없었으나 정은 깊었다. 그 해(헌종 15년·1849) 임금은 아침 햇볕에 이슬 스러지듯 크게 앓지도 않다가 승하했다. 순원왕후는 대행(大行) 시신에 온기도 가시기 전 왕권의 상징인 옥새부터 챙겼다. 그 기민함이 신정왕후보다 몇 수 위였다. 가문의 영달과 멸문이 걸린 중대 사안이었다.

순원왕후는 친정 안동 김씨 척신들과 전광석화 같은 승통 논의 끝에 강화도에서 농사짓는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 원범을 끌어다 왕위에 앉히니 곧 철종대왕이다. 전계대원군을 지나쳐서는 복잡다단한 철종의 혈계를 알 수 없어 다음 호에서 다룬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