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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4>고종황제 홍릉<下>

惟石정순삼 2011. 4. 21. 07:5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4>고종황제 홍릉<下>
홍릉 일자각 앞의 석조 조형물. 황제릉이어서 능 아래 세웠고 규모가 우람 장대하다. 

 

경복궁 내 건청궁 앞에 있는 향원정 연못.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며 무심한 세월을 이겨 낸 옛 모습 그대로다.

 

덕수궁에 은폐 감금돼 외부 출입조차 감시받고 있던 고종태황제에게 급보가 날아 들었다.

 “태황제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윤비 마마가 품고 있던 옥새를 난신적자 윤덕영이 억지로 강탈해 한·일 합방조약문서는 끝내 조인되고 말았다 하옵니다.”

 융희 4년(1910·경술) 8월 29일. 고종은 절망했다. 윤덕영(1873~1940)이라면 금상(순종) 계비 해평 윤씨의 백부가 아니던가. 시종(侍從)의 읍소가 아니더라도 이완용(1858~1926·우봉 이씨), 송병준(1858~1925·은진 송씨) 등 만고 역신들의 망국소행으로 나라꼴이 이 지경된 건 벽지촌부들조차 훤히 알고 있는 처사였다. 고종은 눈을 감았다.

명성황후 시해·강제 퇴위·경술국치 수모 겪어

 어디 망국에 가담한 매국노들이 이 자들 뿐이던가. 안동 김씨 60년 세도보다 더한 척족(여흥 민씨)들의 문벌 독재, 가깝게는 왕손들인 전주 이씨마저 분열해 대한제국이 침몰한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 졌다. 고종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비록 망국의 폐주 신세다만 그대들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볼 것이로다. 어찌 네 한 몸 일신 영달을 위해 지조를 훼철하고 청사에 씻지 못할 죄인이 된단 말인고. 당대의 죄과는 자손만대로 이어져 네 놈들 분묘는 파 헤쳐지고 후손들 고통은 연좌로 이어지리니….”

 이후 고종은 침묵했다. 광무 11년(1907·순종이 이해 7월 20일 등극해 융희 1년과 중복) 아들이 황제위에 오르며 태황제(太皇帝)로 강제 퇴위당한 뒤 망국(경술국치)에 이르러 이태왕(李太王)이 되는 수모가 겹쳤다. 순종황제 역시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채 창덕궁 대조전에 감금시켜 부자 간 상면조차 불가능한 위리안치 신세나 다름없었다. 일국을 통치하던 제왕 부자가 외세 개입으로 이 꼴이 된 것이다.

 고종은 1황후·1황귀비·5후궁에게서 모두 9남 4녀를 생출했으나 이중 3남(순종·영친왕·의친왕) 1녀(덕혜옹주)만이 성장했다. 대부분 유아로 사망하거나 의혹을 남긴 채 조졸했다.

 ▲명성황후는 4남을 탄출했으나 차남 순종만이 성장해 보위를 이었다. 항문이 막힌 채 태어난 원자(元子·1874)를 당시 개신교 선교사(의사)가 수술하려 했으나 “어찌 감히 왕자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느냐”고 황후가 호통쳐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귀인이었던 영월 엄씨는 을미사변(1895)으로 황후가 시해된 뒤 황귀비로 진봉됐다. 청국·일본·러시아 간의 난마같이 얽힌 안개 정국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파천(1896)했을 당시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을 출생했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간택하기 전 귀인 이씨를 총애해 사실상의 장남인 완화군을 낳았으나 13세 때 홍역을 앓다 독살 의혹을 남기고 의문사했다. 이씨는 8남도 출생했지만 유모 품에서 원인 모르게 죽었다. ▲귀인 장씨가 의화군 이강(李堈·1877~1955)을 낳아 생육하니 곧 의친왕이다. 장씨는 1남을 더 출생했으나 일찍 잃었다. ▲직첩을 못받은 정씨도 득남했는데 유아로 사망했다. ▲고명딸로 고종황제가 극진히 아꼈던 덕혜옹주(1912~1989)는 귀인 양씨 소생이다.

홍릉 합폄릉, 명성황후 시신 없어 사실상 단릉

 고종은 일인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되자 조정 대신들을 불신하고 외국인들은 기피했다. 유길준·정병하·조희연 등이 일본 낭인과 공모한 을미사변은 당시 조선 민중을 격분케 했다. 이 망종(亡種)들은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잠자던 황후를 기습해 난도질하고 차마 필설로 형용 못할 금수 만행을 자행했다. 그리고는 주검 위에 기름 붓고 불을 질러 소각했다. 이래서 홍릉(洪陵) 합폄릉은 오늘날까지도 황후 시신이 없는 사실상의 고종황제 단릉(單陵)이다.

 이런 시국에도 권력세도가·식자층·가진 자들은 몸 사리고 무기력했으나 민중들의 저항은 거셌다. 백범 김구(1876~1949·안동 김씨 구파)는 안악 치하포에서 쓰치다 일군을 맨주먹으로 격살해 일인 간담을 서늘케 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피말리는 가렴주구로 촉발된 동학민란(1894)은 급기야 대일전쟁으로 확전돼 내전양상을 띠기도 했다.

 조선 지배권을 일본에 양보하고 필리핀을 독점한 미국은 고종 21년(1884) 장로교·감리교 선교사를 이 땅에 파견해 개신교를 상륙시켰다. 교육·의료 분야로 국한됐던 선교 영역이 민생 전반으로 확대되며 교회 세력은 요원의 불길처럼 급속히 전파됐다. 일본종교 천리교와 일련정종(日蓮正宗) 계열 불교들도 틈새를 파고들어 기댈 곳 없는 민초들을 사분오열 시켰다. 이 같은 외세 종교에 대한 대응으로 태동한 민족종교가 천도교에 이은 증산교와 원불교 등이다.

 이런 환난 중에도 ▲이재선(고종의 이복형)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 한 국왕폐립 음모사건 ▲이준용(대원군 손자)이 동학군과 내통해 고종을 시해하려 한 괴변 ▲현역·퇴역 군인을 동원한 안경기의 양위음모 획책미수 ▲유배지에서 시도한 안홍륙의 독다(毒茶) 사건 등으로 고종은 수없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이처럼 배신과 변절로 점철된 혼돈 와중에도 고종은 선대 임금을 황제로 추존했다. 개국 창업왕 태조를 고황제로 추봉한 뒤 4대왕(계대로는 4대이나 동일 항렬이 있어 실제로는 7왕 : 철종·헌종·문조·순조·정조·장조·진종)도 황제위로 올렸다. 전주 건지산에 있는 시조 사공공(公) 묘에 조경단(壇)을 설치하고 강원도 삼척 장군공(公) 묘에는 준경묘(廟)를 세웠다. 모두 황제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치적들이다.

 고종은 정비 손(대군)이 아닌 철종을 철조(哲祖)로 개묘(改廟)하려 했으나 시행하지 못했다. 자신도 정비 혈통이 아니어서 법통상 심각한 하자가 발생하게 되고, 국권마저 일본에 넘어간 뒤인지라 몰락왕조 묘호(廟號)에 신경쓸 대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철종과 고종이 조(祖)가 아닌 종(宗)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순종은 명성황후 정비의 왕자여서 조선왕조가 지속됐더라고 종으로 회자됨이 마땅하다.

 사학계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중 철종실록까지만 정통성을 인정한다. 고종 예장(1919) 후 곧바로 3·1운동이 터지자 일제는 한민족 탄압에 혈안이 됐다. 1926년 눈엣가시였던 순종마저 붕어하자 이듬해 비로소 두 황제의 실록편찬에 착수했다. 당시 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 장관이던 일인 시노다가 책임 찬술한 것을 경성제대 오다 교수가 편수해 1930년 4월 간행한 것이다. 여기에 친일파 조선 지식인들까지 매수돼 사실 왜곡은 물론 일제 식민통치에 유리하도록 기술해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려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친일파 주구들을 앞세워 일제가 꾸민 협박 공갈장이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고성을 내지르며 당장 용상에서 내려오라고 삿대질을 했다. 조정을 가득 메운 망종 대신들에게 고종이 탄식했다.

 “듣거라. 인간 수명은 유한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죽는 것이로다. 국록으로 살아온 경들이 왜 하필 앞장서 나라를 망치려는고. 장차 그대들 자손들이 살아갈 세월이 막막할 것이로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