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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5>순종황제 유릉<上>

惟石정순삼 2011. 4. 21. 07:5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65>순종황제 유릉<上>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위 합장릉이다.
고종·순종의 두 황제 능제향을 봉행하는 홍·유릉 재실. 근대 목조건물로 능 관리소가 함께 있다. 

 

 조선 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1874~1926)는 경천동지의 충격과 감내하기 힘든 비탄으로 53년을 살다간 비운의 군주다.

 ▲2세(1875) 때 세자로 책봉된 후 ▲9세(1882)의 유충한 나이로 여흥 민씨(1872~1904·대제학 민태호의 딸)를 세자빈(순명황후)으로 맞은 뒤 ▲같은 해(임오년·1882) 임오군란으로 할아버지(흥선대원군)에 의해 살아있는 모비(명성황후 민씨)의 국장(國葬)이 선포되는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순조의 성장기는 해가 거듭될수록 격변으로 이어졌다. ▲17세(1890) 때 목격한 천하 여걸 할머니(신정왕후)의 죽음 ▲특히 을미사변(1895·22세)으로 인한 어머니의 참혹한 시해는 심약한 순종 부부를 식물인간으로 냉동시켰다. 순종은 심야 공포증으로 소피(所避)를 홀로 못 봤고, 순명황후는 밤낮없이 흉몽에 시달리고 식은땀을 쏟으며 까닭 없이 웃었다.

 질곡(桎梏) 같은 순종의 불행은 그칠 줄 몰랐다. 황망 중 서로 의지하던 두 살 위 순명황후가 31세로 홀연히 훙서(1904)한 것이다. 보령 29세 때였다. 애당초 춘색(春色)에는 미동조차 안 해 소생이 있을 리 없었다. 명성황후 훙서 뒤 계비로 진봉된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1854~1911·영친왕 이은 생모)가 윤택영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순종 계비로 택봉한 해평 윤씨(1894~1966·순정황후)는 20세 연하였다. 윤택영(1866~1935·해풍부원군)은 바로 해평 윤씨의 친정아버지다. 세간에선 아버지의 탐욕으로 어린 생과부가 입궐했다며 안쓰러워했다.

망국사와 함께한 조선의 마지막 군주

 이후의 순종황제 여생은 치욕의 대한제국 망국사와 함께한다. 이미 황혼녘에 기운 왕조 운명을 회생시키고자 침식을 잊은 부왕 고종황제를 목도하며 순종은 슬피 울었다. 간악한 일제보다 더욱 치가 떨리는 건 망국에 앞장 선 조정 내 친일 매국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완용·송병준·이용구가 발광했고 척족들인 여흥 민씨와 해평 윤씨도 일부 가세했다.

 광무 11년(1907) 6월 때마침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이상설·이준·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해 광무 9년(1905) 체결한 대한제국과 일제 간의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호소하려 했다. 이미 내통된 미국·영국 등 구미 열강들과 일본의 훼방으로 문전 축출당하자 격분한 이준 밀사가 현장에서 할복 자결했다. 이해 7월 20일 일본은 이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등극시키니 제27대 임금 순종이다. 34세였다.

 건강한 부왕을 태상황제위(太上皇帝位)에 앉히고 졸지 황제가 된 순종은 사면초가의 고립무원 속 용상이었다. 재위 3년 1개월에 걸친 하루하루가 망국의 수순 밟기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각부 차관을 일인으로 임명해 국정 전반을 일본 통감이 총괄할 수 있도록 이른바 차관 정치구도를 확립시켰다. 공포에 질린 순종은 매국 대신들과 일제 차관이 시키는 대로 윤허만 내렸다. 이들은 연호도 광무에서 융희(隆熙)로 교체했다.

 ▲등극(1907) 직후 한일신조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어 국정운영권을 탈취한 일제는 이해 8월 재정부족을 빌미삼아 얼마 남지 않은 황실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조선은 병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융희 2년(1908)엔 동양척식회사를 임의 설립, 국토가 무방비로 개방되며 무자비한 일제 수탈이 자행됐다. 이때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은 폐허 지경에 이르고 굶어 죽는 백성들이 도처에 즐비했다. 민생고를 견디다 못한 난민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고향을 등진 채 만주·북간도를 유랑했다.

일제, 왕실·대신 매수해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런 총체적 국난 속에서도 친일 매국분자들은 일제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 권세 누리고, 굶주린 양민들 농지마저 위토로 할애받아 가족들과 호의호식했다. 이 자들은 매국 대가로 축적된 재산을 빼돌려 일본·미국에 자식들을 유학 보내 출세시켰다. 순종은 통분에 떨며 하얗게 밤을 지새웠지만 경국지왕(傾國之王)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현듯 동시대 등극(1868)해 서양문물을 전폭 수용, 유신개국 단행으로 일본을 혁신시킨 메이지(明治) 일왕과 신하들을 떠올렸다. 도대체 조선 국왕과 대신들은 무얼 했는가로 생각이 미치자 순종은 흠칫 놀랐다. 부왕 고종황제에 대한 불충이요 외가·처가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순종의 이런 장탄식과 달리 시국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됐다.

 융희 3년(1909) 기유각서를 강제로 작성해 아예 사법권을 강탈한 일제는 재판권을 행사하며 군부·법부를 해체시켰다. 마침내 순종은 허위(虛位) 황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간교한 공작에 매국 대신들이 부화뇌동한 대한제국의 자화상이었다. 침략 악행에 가속이 붙은 이토는 일본 귀국 후 소네 통감을 거쳐 군부 출신 데라우치를 새 조선총독으로 부임시켜 조선 조정을 더욱 옥죄었다.

 같은 해(융희 3년·1909) 일제 각의는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제멋대로 통과시킨 뒤 조선과 만주 문제를 러시아와 사전 협상키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했다. 회담을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했을 때 대한제국 군인 안중근(1879~1910)의 총탄에 명중돼 이토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일제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등을 충동해 조선합방을 더욱 서둘렀다.

 왕실과 대신들을 매수·회유해 ‘조선인의 원에 의해 조선을 합병한다’는 명분으로 마침내 한일합병조약을 강제 성립시켰다. 1910년 8월 29일 이른바 경술국치일이다. 이날 어전회의에 참석한 조선 대신들과 일인 차관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시위병을 도열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 망국조약에 서명하도록 순종을 협박, 강요했다.

 이를 병풍 뒤에 몰래 숨어 엿듣던 계비 순정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싸 안고 내전 은밀한 곳에 숨어 버렸다. 뒤늦게 안 윤덕영이 쫓아와 옥새를 탈취한 후 합방 문서에 날인하니 조선왕조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윤덕영은 순정황후의 큰아버지고 이때 계비 나이는 17세였다. 이리하여 단기 3725년(1392) 태조고황제 이성계가 창업 개국한 조선왕조는 제27대 왕 519년만인 단기 4243년(1910)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순종·원비 순명황후·계비 순정황후 `삼위 합장릉'

 이후 순종은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창덕궁에 감금된 채 울분을 삭이는 망국왕 신세가 됐다. 역시 덕수궁에 은폐돼 연명 중인 부왕 이태왕(李太王)에게 하루 세 번 전화 문안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풀길 없는 망국한이 사무치더니 육신으로 전이돼 죽을 병으로 도졌다. 1926년 3월 1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회한으로 얼룩진 겁생(劫生)을 접고 영결종천하니 보령 53세였다.

 이해(1926) 4월 볼모로 일본에 잡혀갔던 영친왕이 급거 귀국, 옛 재신(宰臣)들과 종친·인척들을 소집해 묘호는 순종(純宗), 제호(帝號)는 효황제(孝皇帝)로 올렸다. 양주 용마산 내동에 초장된 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여흥 민씨를 먼저 천장(4월 25일)한 뒤 순종황제를 합장(6월 10일)해 능호를 유릉(裕陵)으로 정했다. 묘좌유향(정서향)의 유릉은 홍릉(고종황제)의 좌청룡 내룡맥에 해당하며 왕릉풍수상 대길 발복지가 아니다. 1966년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해평 윤씨가 합폄되면서 조선 유일의 삼위(三位) 합장릉이 됐다.

 조선 민중들은 고종과 순종의 두 황제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고종의 인산(因山·장례일)일엔 3·1운동이 일어났고, 순종의 예장일엔 6·10 독립만세 운동이 성난 파도처럼 일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