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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52>헌종대왕 경릉(上)

惟石정순삼 2011. 4. 21. 07:1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52>헌종대왕 경릉(上)

조선 최초 삼연릉으로 조영된 헌종대왕 경릉.

원래 선조대왕 천장지로 동구릉 내 있으며 오른쪽이 헌종, 중앙 효현왕후,
왼쪽 효정왕후 순이다.

‘근묵’에 수록된 헌종 어필. 천하명필이었다.

 

조선 왕조사를 섭렵하다 보면 왕은 왕이었으되 치적이 묘연한 임금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제12대 인종, 제13대 명종, 제18대 현종, 제20대 경종이 대표적인데 제24대 헌종대왕(1827~1849) 또한 보위에 올라 뭘 했는지 모르는 임금이다. 이들 모두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단명한 탓도 있지만 수렴청정이나 당쟁·세도에 말려 ‘남의 인생’을 살다 간 비운의 제왕들이다. 이 중에는 천수를 못 누리고 독살당한 군왕도 있다.

 총명했던 아버지(추존 문조익황제)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희생당할 때(순조 30년·1830) 헌종은 네 살이었다. 새까맣게 속이 탄 할아버지(순조)가 왕세손으로 책봉해 놓고 시름시름 앓더니 4년 후 등하(登遐)했다. 이해 8세로 제24대 왕위에 오르니 조선 역대 임금 중 최연소 왕이 된 것이다.

8세에 임금 오른 조선 최연소 왕

 요즘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 삼천리 강토를 통치할 수 있겠는가. 조정 권력은 당연히 할머니(순원왕후·안동 김씨) 수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훤히 아는 어머니(신정왕후·풍양 조씨) 또한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일찍이 할아버지가 안동 김씨 세도평정을 위해 정략적으로 맞이한 며느리였다. 그래도 조정 권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순원왕후 명에 따라 조종됐다.

 용상에 앉은 어린 임금 뒤에 발을 치고 내리는 순원왕후의 어명은 동지섣달 얼음장보다 더 차가왔다. 국사의 모든 결재는 할머니한테 나왔고 헌종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있더라도 순원왕후한테 품의한 뒤에야 시행했다. 등극 직후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한 뒤 할머니는 대왕대비로, 어머니는 왕대비로 진상됐다.

 철없는 왕의 어명을 빙자해 순원왕후는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둘렀다. 부정한 과거 조작으로 척족들의 대거 등용을 비호하는가 하면 매관매직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이럴수록 민심은 등을 돌렸고 ‘인간 모두가 태어날 적부터 평등하다’는 서학(천주교)의 가르침에 동요됐다. 보다 못한 헌종이 옥음을 내렸다.

 “과거 시험장에 사사로이 들어와 염문한 자는 과장(科場)을 어지럽히고 어명을 거역한 죄로 다스릴 것이오. 세상에 나올 때부터 과장의 법을 어겼는데 후일 어떤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소.”

순원왕후 수렴청정 국가기강 무너져

 부패한 세도 권력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마저 문란시켰다. 질병·재앙으로 아사지경에 있는 농민들 땅을 헐값에 매입하고, 권문세가 자식들 군역은 교묘히 면제받거나 노복들이 대신했다. 더더욱 격분한 건 환정의 조작이었다. 봄철 춘궁기 양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 추수기 때 배로 거둬들이는 곡식에 모래를 섞고 저울눈까지 속인 것이다. 마침내 민초들이 분노했다.

 순원왕후는 민심의 표적을 엉뚱한 서학쪽으로 급선회시켰다. 팽배한 사회적 혼란 원인을 서학의 민심교란 탓으로 돌려 천주교 압살에 착수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를 처형하고 유진길·장하상 등 수많은 국내 천주교인을 학살했다. 헌종 5년(1839)의 기해박해로 한국 최초 김대건 신부도 이때 처형돼 군문효수됐다. 오가작통법으로 교인들을 색출하고 천주교를 엄금하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악몽 같은 질곡의 세월도 유장할 수만은 없는 법. 금상의 나이 15세(헌종 7년·1841)가 되자 국법에 따라 순원왕후도 철렴(撤簾)했다. 23세에 청상과부가 돼 34세가 된 ‘조 대비’ 신정왕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조 대비는 시어머니가 하던 대로 친정 풍양 조씨 일문을 조정의 핵심요직에 배치했다. 아버지 조만영은 주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겸직하고 숙부 조인영, 조카 조병헌, 조병구(조만영 아들) 등이 실세로 부각됐다.

 헌종은 또 허수아비가 됐다. 안동 김씨·풍양 조씨 문중 간 정권 교체기에 파생된 온갖 가렴주구와 인명살상의 고통은 모조리 무고한 민초들 몫이었다. 생업을 포기한 유민들이 도처에 속출하고 임금 노동자나 광부로 전락한 빈민들은 사회불안 요인으로 집단화됐다. 우려는 곧 현실로 닥쳐왔다.

 헌종 2년(1836)에는 남응중·남경중 등이 은언군(사도세자 3남)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다 누설돼 능지처참당했다. 8년 뒤엔 의원 출신 민진용이 또 다른 은언군 손자를 옹립하려는 역모가 발각돼 멸문지화를 입었다. 이 같은 일련의 모반 사건들은 조정 기반이나 정치적 세력이 전무한 중인·몰락 양반들이 작당한 것이어서 사회적 충격은 더욱 컸다. 누구나 넘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우습게 보였던 것이다.

 이런 난리 통에 헌종은 전국에 창궐하던 천연두까지 걸려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소생했다. 설상가상으로 금상에게 후사가 없고 옥체마저 미령해지자 외척세도는 끝간 줄을 몰랐다. 사소한 트집으로도 안동 김씨 세력과 사생결단해 민생은 피폐되고 아사자는 산적했다. 백성들은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난 걸 원망하며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길 고대했다.

 헌종은 일찍부터 학문을 가까이하며 호색은 멀리했다. 11세 때 가례를 올린 원비 효현(孝顯)왕후 안동 김씨(1828~1843·영흥부원군 김조근 딸)는 후사 없이 16세로 일찍 승하했다. 이듬해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1831~1903·남양 홍씨)을 계비 효정(孝定)왕후로 맞았으나 역시 태기가 없자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는 초조해졌다.

왕권 무너지고 민초들은 살길 `막막'

 할머니와 어머니는 왕실 대통을 잇기 위해 제1후궁 숙의 김씨, 제2후궁 경빈 안동 김씨, 제3후궁 정빈 파평 윤씨를 정해 연일 합방토록 강권했으나 헌종은 이를 기피했다. 숙의 김씨가 유일한 혈육인 옹주를 출산(1848)했으나 해산 당일 사망했다. 헌종은 계비전과 후궁전에서 나올 때마다 다리를 휘청거렸고 두 눈엔 눈곱이 꼈다. 명 재촉을 한 것이다.

 호색엔 철골도 녹아난다 했다. 1849년 운기 허탈로 누운 지 18일 만에 창덕궁 정침에서 훙서했다. 펴보지도 못한 나이 23세였다. 재위 14년 6개월 19일 동안 순원왕후가 7년을 수렴청정했고 수재·역병·기근·역모로 시달린 세월이 9년이었다. 조정에서는 원비 효현왕후가 묻힌 동구릉 내 경릉(景陵) 우편에 예장하고 능호는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경릉을 찾은 참배객들은 조선 최초의 3연릉(三連陵)에 의아해 한다. 광무 7년(1903) 계비 효정왕후가 승하하며 함께 안장됐기 때문이다. 좌(頭)에서 향(足)쪽을 바라볼 때 맨 오른쪽이 헌종대왕이고 중앙이 원비 김씨, 왼쪽이 계비 홍씨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왕릉풍수 법도를 철저히 따른 것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세 개의 능이 조영된 특이한 구조며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이 하나의 곡선으로 연결돼 거대한 장방형을 이룬다. 부부가 모두 한 방을 쓰는 격이다. 능지에는 경좌갑향(북으로 15도 기운 동향)으로 기록돼 있으나 실제 측정한 좌향은 유좌묘향의 정동향에 가깝다. 향법(向法)상 나경으로 15도 오차는 후손 발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각도차이다.

 원래 경릉 자리는 제14대 선조대왕을 초장했던 목릉 터다. 왕실이 발흥하는 길지 명당이었으면 왜 천장을 했겠는가. 후사를 잇지 못한 임금은 죽어서도 서러운 법이다. 헌종과 효현왕후는 광무 3년(1899)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와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각각 추존되고, 효정왕후는 같은 해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살아서 진봉됐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