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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합장릉인 수릉.
세도와 얽힌 풍수논쟁으로 두 번이나 천장하는 수모를 겪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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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에서 바라본 수릉 사초지. 평지에 가까운 능지여서 아담한 구릉이다.
| 외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순조 27년·1827)을 맡겨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섭하게 한 순조 대왕의 용안이 모처럼 활짝 폈다. 19세의 세자가 자신보다 더 백성을 잘 보살펴 발군의 통치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풍은 부원군 조만영의 딸(풍양 조씨)을 세자빈으로 간택한 것도 크게 만족스러웠다. 통제 불능이었던 처가(안동 김씨) 세도폭정도 사돈(풍양 조씨) 문중과의 치열한 세력 다툼으로 다소 수그러들었다.
또 경사가 겹쳤다. 그해 7월 세손(제24대 헌종 대왕)이 태어난 것이다. 역경 속의 인생사가 이만큼만 순조롭다면 다시 인도 환생해 무명 촌부로라도 살겠다는 희열로 넘쳤다. 죄질이 가벼운 민생범을 방면하고 궐 안에서는 왕실 번창을 축수하는 연회가 연일 벌어졌다. 태평성대인가 싶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세자 가례를 올리고 고(姑·순원왕후)부(婦·세자빈)간 갈등을 예상하지 못한 바 아니지만 의외로 심각했다. 조정세력을 좌지우지하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 이전투구가 시어머니-며느리의 대리전으로 옮겨붙어 내명부에는 항상 전운이 감돌았다. 세자빈은 세손을 탄출하며 더욱 당당해졌다. 순조는 영명한 세자를 대견해하면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홍(內訌)이 늘 근심이었다.
박빙 같은 세월이 흘러 대리청정 4년(순조 30년·1830)이 되던 해 봄. 의욕적인 치정을 펼쳐 백성 간 신망이 두텁던 세자가 돌연 중병에 들었다. 목구멍이 부어 음식을 못 넘기는 기망( 妄)이란 급환이었다. 수일 전까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부왕 즉위 30년 경하연을 주관했던 건강한 세자였다.
황급해진 순조가 다산 정약용을 승지로 복직시켜 병구완토록 했으나 궁중 비방조차 무효였다. 마침내 세자는 득병한 지 열흘 만인 5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넋이 나갔다. 세자가 숨진 희정전 서협실(西夾室)에서 차디찬 시신을 부둥켜안고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다 실신했다.
“사람의 일이 꿈과 같음을 통곡하노니 어찌 하늘의 이치도 믿을 게 못 된단 말이냐. 네 유고(遺孤·아비 잃은 어린아이로 헌종을 이름)가 울어대는 것을 어루만져 달라는 이 절통함을 무엇에 비길손가. 나도 너를 따라갈 일만 남았구나.”
이때 세손 나이 겨우 네 살이었다. 순조는 현실(玄室·무덤) 지문을 세자 외조부 김조순에게 쓰도록 명했다. 김조순은 “여러 날 동안 가슴을 두근거리며 두려워하다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훌쩍이고 울면서 쓴다”고 탑전(榻前·임금의 자리 앞)에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의 천장산 의릉(제20대 경종 대왕) 왼쪽 언덕에 세자를 장사지내고 연경묘(延慶墓)라 했다. 이후 순조는 정사를 내던지고 생존 자체를 버겁게 여기며 죽지 못해 연명했다. 권력이라는 수단으로 사람을 모함해 죽고 죽이는 세태를 증오하며 개탄했으나 누구도 어쩌지는 못했다.
그렇게 세자를 보낸 지 5년. 공교롭게도 순조 역시 세자와 같은 기망 증세로 음식을 못 넘기는 고통 속에 신음하다 훙서했다. 이때 왕실의 최고 수장은 의당 순원왕후 김씨였다. 여덟 살의 세손을 등극시켜 대통을 잇게 하고 당일부터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조정 권력은 또다시 안동 김씨 수중으로 장악됐다.
역사는 이쯤에서 갑작스러운 세자의 죽음으로 나이 스물셋에 청상과부가 된 세자빈 조씨(1808∼1890)를 주목한다. 세칭 ‘조대비’로 유명한 조씨는 치마만 둘러 여자였지 어떤 권력세도가도 범접 못한 강심장의 여장부였다. 고종 27년까지 83년의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마음껏 휘둘렀던 ‘철의 여인’이다.
그러나 어린 아들(헌종)이 등극했을 때는 시어머니 위세에 눌려 숨도 크게 못 쉬었다. 23세로 후사 없이 훙서(1849)한 헌종의 대통을 정할 때는 46세였으나 이때도 궐내 어른은 순원왕후 김씨였다. 강화도에서 농사짓는 일자무식의 이원범을 강제로 데려다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세도횡포를 자행해도 지켜만 봐야 했다. 이후부터 조대비와 안동 김씨 문중 간에는 삼생을 거듭해도 풀지 못할 원한이 쌓여갔다. 파란만장하면서도 고난에 찬 조대비의 인생역정은 해당 묘조(廟朝)에서 다루기로 한다.
헌종은 등극 직후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면서 연경묘를 수릉(綏陵)으로 진호했다. 왕위를 계승할 때 부왕 능침이 없으면 정통성 문제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하는 법이다. 헌종은 할아버지(순조)를 이어 용상에 올랐으므로 아버지 효명세자의 왕위 추존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광무 3년(1899) 고종황제가 익종을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개묘(改廟)하며 조대비도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함께 추존해 올렸다.
문조는 죽어서도 수난의 연속이었다. 헌종 12년(1846) 풍수지리상 불길한 흉지라는 풍수논쟁이 격화된 것이다. 결국, 초장지를 택지한 안동 김씨 세력 일부가 거세당하고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됐다. 철종 5년(1855)에 또 풍수논쟁이 불거졌다. 이번에는 풍양 조씨 일문이 낙마하고 현재의 동구릉(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내 임좌병향(동으로 15도 기운 남향)에 안장됐다. 이처럼 왕조시대 풍수싸움은 정적 제거 수단으로 수없이 활용됐다.
현릉(제5대 문종대왕) 내룡맥에 자리한 수릉은 후일 신정왕후가 승하하며 합장으로 용사됐다.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안은 청룡 작국(作局)으로 능침 앞 안산도 뛰어나다. 문조의 계자(系子·헌종의 동생 항렬)로 양자가 된 고종황제의 왕손들이 현재까지 번성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풍수학계 해석이다.
조선 시대 임금이 예척하면 그 장례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먼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이 설치되고 조정에서는 재위 시 행적과 치적이 축약된 묘호를 정해 올렸다. 국상 기간은 통상 3∼5개월이 걸렸고 국풍(國風)이 명당 길지를 택지하고 나면 능호와 함께 제왕을 찬양하는 시호(諡號)를 지어 바쳤다. 훙서 후뿐만 아니라 재위 시에도 시호를 진호(進號)했는데 임금은 넉 자씩이고 왕비는 두 자씩이었다. 공덕을 의논해 조정에서 작호한 것이다.
순조의 시호는 문안무정(文安武靖) 헌경성효(憲敬成孝)인데 지면관계상 넉 자만 풀이하면 이렇다. ▲시법(諡法)에 충실하고 믿음으로 예에 접한 것(文) ▲여러 백성이 편안히 힘입은 것(安) ▲보전하고 크게 공을 세운 것(武) ▲부드러운 덕으로 무리를 편안하게 한 것(靖)이란 큰 뜻을 내포하고 있다.
추존 문조익황제의 시호는 무려 113자로 역대 임금 중 가장 길다. 헌종과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고종이 입승대통한 뒤 황제로 등극하면서 많은 시호를 올렸기 때문이다.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나 산릉제향 시 대축관이 시호를 독축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신정익황후도 58자나 된다.
조선 시대 왕이나 왕족들 목숨은 바람 앞 등불과도 같았다. 왕보다 잘나고 똑똑하면 역모에 몰려 죽음을 당하고 권력의 편에 서지 않는 임금 또한 성치 못했다. 아까운 효명세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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