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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융릉의 소나무 군락지.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정조가 씹은 후
능침 앞 솔숲에는 해충이 범접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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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설 명 |
사도세자 선( )을 둘러싼 영조대왕 당시 왕실 내명부와 조정 분위기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구 하나 세자편이 돼 거들어 주기는커녕 말 그대로 절해고도에 유리된 고립무원의 사면초가 처지였다.
의대(衣帶)결벽증과 기상천외한 언행으로 일찍이 부왕 눈 밖에 난 사도세자와 함께, 해괴한 습벽으로 측근 신료들을 불안케 하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이인좌의 난(영조 4년·1728년) 평정 이후 이상한 의심 행태를 자주 보였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은 즉위 초 탕평책을 급히 서두르다 권력 축에서 밀려난 소론 측이 왕권을 뒤엎으려 한 역모사건이다.
이후 영조는 죽을 사(死)자와 돌아갈 귀(歸)자를 보면 신경질적으로 과민반응했다. 조의(朝議) 때나 외출 시 입었던 옷은 반드시 갈아입었고 불길한 말을 하거나 들었을 경우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 심지어는 서정대리를 분담시킨 세자한테 대답을 들은 뒤에도 서둘러 귀를 닦았다. 대신들은 부전자전이라며 크게 우려했다.
○ “죽는 것이 상책이나 세손이 서러워”
생모 영빈 이씨도 아들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한 남편 영조에게 통곡하며 사정했다.
“고질이 점점 깊어 이미 중병이 되었음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소인이 차마 모자 간 정리로는 못할 일이오나 대처분을 내리시되 세손(정조) 모자만은 보살펴서 종사를 편안케 하시옵소서.”
세자빈 혜경궁 홍씨 또한 시아버지 영조의 냉혹한 결단을 돌이키기엔 대세가 글렀다고 판단했다. 홍씨는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에 당시의 피할 수 없는 여인의 숙명을 이렇게 적었다.
“나 차마 그의 아내 입장에서 이 처분을 옳다고는 못하겠으나 일인즉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내가 따라 죽어서 모르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어린 세손이 있어 결행치 못하다. 다만 세자와 만난 연분을 서러워할 뿐이다.”
노론 측 핵심 인물이었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 편이 아니었다. 천방지축의 세자는 집권세력 노론 중신들과 대립각을 세워 후일 등극하면 축출해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던 터였다. 목전의 권력 앞에 혈연이 대수겠는가.
홍봉한은 아우 홍인한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도 같은 격간도동(膈間挑動)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세자 증세를 공개하며 한숨지었다.
명철총민했던 어린 세손은 저간의 이런 정국 구도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할아버지(영조), 서조모(정순왕후), 외할아버지(홍봉한), 외종조부(홍인한)를 죽을 때까지 미워했다.영조 명으로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묘(영우원)를 화성 명당으로 천장해 현륭원으로 격상시켰다. 세자 신분의 원(園)을 화려한 왕릉격으로 조영해 놓고 비통하게 굶어 죽은 아버지를 못 잊어 자주 찾았다.
○ 정조, 융릉의 송충이 씹으며 자탄
어느 해 모춘(暮春) 융릉에 다시 온 정조가 갑자기 발길을 멈춰섰다. 능침 앞 솔잎을 송충이가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냉큼 손으로 잡아 입으로 씹으며 구슬피 자탄했다.
“네 아무리 인간사와 무관한 미물일지언정 어찌 감히 이곳 송엽을 먹이 삼아 연명하는고! 내 아비 설운 사연은 북망산 뜬 구름도 알겠거늘 미천한 그대 미물이야말로 덧없이 미망하도다.” 순간, 사도세자 능역은 배종했던 고관대작들과 궁궐 나인들의 통곡소리로 진동했다. 능행을 호종한 신하들까지 모두 합세해 송충이를 잡아 씹어 없앴다. 이후부터 융릉 앞 소나무에는 송충이와 해충이 범접 못했다.
비운의 사도세자는 이처럼 아들 잘 둔 덕에 추존 황제위까지 오르지만 정작 그의 권속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을 살다 갔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하나 표독한 연하 시어머니 정순왕후 등쌀에 오금 한번 펴지 못한 채 기구한 생을 마감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정조의 친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은 깊어만 갔다. 2남(의소세자·정조) 2녀(청연·청선공주)를 뒀으나 장남 의소(懿昭)세자는 3세 때 조서했다.
사도세자는 제1후궁 숙빈 임씨에게서 3남 은언군과 4남 은신군을 득출하고 제2후궁 경빈 박씨한테 5남 은전군을 얻는다. 비록 세 왕자는 사사되거나 양자로 대를 잇지만 말기 조선왕실 혈통이 이들에 의해 승계됨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누가 다난한 인생사를 장담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영조는 자신이 굶겨 죽인 아들을 통해 조선왕조가 문닫을 때까지 왕대를 이었다.
은언군은 서학(천주교)을 몰래 접했다가 할머니 정순왕후한테 발각돼 사약받고 분사했으나 상계군·풍계군·전계군 삼형제를 남겼다. 이 중 막내 전계군이 제25대 철종대왕 생부가 되는 전계(全溪)대원군이다. 철종은 후사 없이 승하했다.
은신군 가계는 양자로 이어지는 극적 반전을 거듭한다. 숙종의 6남 연령군(영조 이복동생)이 후사 없이 서세하자 영조는 부왕이 아꼈던 연령군 앞으로 자신의 손자 은신군을 입양시켜 봉사(奉祀)토록 했다. 은신군 역시 계대를 잇지 못하자 이번에는 왕손 이병원(인조 3남·인평대군 6대손)의 아들 남연군을 다시 양자로 들여 후사를 도모했다. 남연군은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 네 아들을 낳아 왕실을 번창시켰다.
이 중 막내아들 흥선군이 제26대 고종황제의 생부되는 희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당시 왕실계보상 후일 흥선군 아들이 보위에 오르리라 예상한 사람은 조선 천지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왕실 계촌으로 따지자면 흥선군은 당당한 영조대왕의 고손자가 되는 항렬이다.
○ 칼날 밟 듯 살아 온 일생사 서술
은전군은 홍대간 등이 역모를 일으켰을 때 왕으로 추대됐다는 죄목으로 이복형 정조에 의해 사사당했다. 은언군 2남 풍계군을 입양해 대를 이었으나 순조→헌종→철종조에 이르는 안동 김씨 60년 세도 치하에 수명을 다하고 죽은 사도세자 왕손은 불과 손꼽을 정도다. 정조 역시 증손자 되는 24대 헌종이 후사를 못 이어 왕실 대통은 이어지나 자신의 혈통은 단절되고 만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홍씨가 회갑 되던 해(영조 19년·1795년) 친정 조카 홍수영의 간곡한 소청으로 쓰여진 회고록이다. 61·67·68·71세 등 네 번에 걸쳐 집필됐으며 당시 붕당의 미묘한 문제, 소름 끼치는 온갖 무서운 사건 속에서 칼날을 밟으며 살아 온 일생사가 산문체 형식으로 서술돼 있다. 한중록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경종(장희빈 아들·영조 이복형) 계비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저승전이 빈집 된 지 오래인 데 어느 날 사도세자가 강보에 싸인 남의 아기를 데려다 홀로 두게 했다. 취선당(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곳)에는 소주방을 만들어 자신의 유흥 오락처로 만들었다. 또한 저승전에서 퇴출당한 궁녀들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 입궁한 궁녀들과 싸우게 했다고 적고 있다. 영조는 장희빈과 경종으로 인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장본인이다.
영조대왕과 사도세자가 부자지간으로 얽힌 뼈저린 악연-. 그래도 역사는 ‘어찌 아비가 자식을 죽일 수 있느냐’고 아들 정조의 한이 서린 융릉 능상에서 장탄식을 몰아쉰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