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조와 왕비 김씨의 합장 능인 건릉. 후일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로 추존됐다.
|
 |
아버지 사도세자 융릉을 참배하러 가는 정조의 능행도.
홀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동행하며 가는 곳마다 눈물을 뿌렸다.
|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대왕이 보위에 오른 지 13년 되던 1789년 8월. 아버지 사도세자 묘(영우원)를 천장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 배봉산록에 도착한 아들 정조는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전날부터 식음을 전폐한지라 이미 용안은 창백했고 서 있기조차 힘겨워 휘청거렸다. 배종한 예조판서가 면복(冕服·제왕이 입는 곤룡포)이 아닌 면복(緬服·부모의 면례 때 입는 시마복)을 입은 대왕께 아뢰었다.
“전하, 군주의 예로서는 아무리 생친부(生親父)라 할지라도 면복을 입는 것이 아니옵니다.”
피눈물로 범벅된 정조가 면복 자락으로 용안을 훔치며 답했다.
“지난날 과인이 최마(衰麻·굵은 베옷)를 입지 못해 오늘 그때를 돌이켜 복을 입고자 하는 것이오. 지극한 슬픔을 펼치려는 것이 어찌 예에 어긋난다 할 수 있겠는가.”
정조 13년 사도세자 묘 천장 … 면복 입고 통곡
이윽고 개광(開壙)하여 정조 앞에 봉출된 사도세자의 유골은 참혹했다. 반풍수가 잡은 묘혈은 흉지 중의 흉지였고 광중에는 물이 차 목불인견이었다.
“차라리 내가 일찍 죽어 이 꼴을 보지 말아야 했을 것을…. 어찌 이런 험지에 28년을 계셨단 말인고! 천지신명이 무심하도다.”
대왕은 경기도 화성으로 이운되는 영순(靈 ·임금 시신을 운구하는 상여)을 부여잡고 날이 저물도록 통곡했다.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 융릉을 지성으로 보살폈고 매년 홀로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능행(幸)하여 참례했다. 한양으로 환궁하며 융릉이 멀리 보이는 고개에 행렬을 멈추게 하고 다시 한번 아버지 묘를 바라봤다.
명발화성회수원(明發華城回首遠·밝을 때 화성을 출발해 돌아갈 길이 먼데) 지지대상우지지(遲遲臺上又遲遲·지지대 고개에 이르러 늦추고 또 돌아보누나).
현재 수원의 지지대 고개 지명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능행 때마다 정조는 소를 잡아 인근 백성을 배불리 먹였는데 ‘수원 왕갈비’도 여기서 유래한다. 이토록 정조는 효성이 극진했고 뒤주 속에서 굶어 죽은 아버지 한을 골수에 사무쳐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정조(1752~1800) 일생은 그야말로 형극의 가시밭길이었다. 어휘(왕 이름)는 산( )이며 ‘이산(李 )’으로 더 알려졌다. 형 의소세자가 일찍 조졸(3세)해 8세 때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세손에 책봉됐다. 그러나 세손을 둘러싼 당시 내명부 갈등과 조정 안 권력구조는 목숨 부지조차 위태로운 급전직하의 오리무중이었다.
세자 위(位)에 있던 아버지는 시국을 오판해 조정 실세였던 노론파와 등졌고 정신발작까지 겹쳐 이미 권력 승계권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11세 세손이 좌참찬 김시묵의 딸 청풍 김씨(1753~1821)와 가례 올릴 때 불안증세가 도져 중도에 업혀나갈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열 살 아래 서(庶) 시어머니(정순왕후)에게 시달리느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선 세손에게도 한 줄기 빛이 있었으니 외척 홍국영의 등장이다. 풍산 홍씨 문중에서도 벼슬길에 소외됐던 홍국영은 미리 장래를 예단하고 세손을 경호하며 철저히 보호했다. 훗날 그가 고위관직에 올라 분탕질친 국정 난맥상은 상상을 뛰어넘지만, 당시 세손 입장에선 천군만마였다. 수시로 닥쳐오는 살해 위협을 견디다 못한 세손이 영조 앞에 부복했다.
매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융릉 참례
“할바마마, 세손 자리에서 물러나 모르는 곳에 숨어 살고 싶사옵니다. 다만, 하루에 세 번 문후를 여쭙는 직분만을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조는 비통한 상념에 잠겼다. 인간이 자행하는 권력의 끝 간 곳이 어디기에 아비가 자식을 죽이게 하고 종국엔 나이 어린 손자 목숨까지 노린단 말인가. 금상의 어명에 굴하기는커녕 목숨 걸고 항거하는 저자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고. 돌연 대신들이 두려워졌고 군왕 또한 별것 아니라는 자괴심에 고개를 숙였다.
칼끝 같은 세월이 흘러 영조가 승하한 뒤 세손이 대통을 이으니 정조(正祖)대왕이다. 천신만고의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등극했지만 정조는 용상에 있으면서도 편할 날이 없었다. 25세의 젊은 사왕(嗣王)은 이미 영조 명에 의해 서(庶) 백부인 효장세자(추존 진종소황제) 앞으로 입양돼 보학(譜學)상 사도세자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하던 날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경들은 똑똑히 들으시오. 과인은 효장세자 손이 아닌 사도세자 아들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오.”
신왕의 서릿발보다 찬 어명은 내명부는 말할 것 없고 조정 대신들 속내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세상에 아비 죽인 원수를 수수방관할 불효자 그 누구이겠는가. 이는 곧 사도세자 죽음에 연루된 대소신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복수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내명부에서 정순왕후가 이를 갈았고 외조부를 비롯한 외척 세력과 노론 측 중신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대들었다.
정조는 재위하는 동안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란 시호를 추상하는데 그쳤고 끝내 왕으로 추존하지 못했다. 집착을 넘어선 생부 포한(抱恨)은 결국 역대 전조와 다를 바 없는 수많은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 미궁으로 남아 있는 왕의 독살설이 당시의 정황과 무관치 않음을 역사는 주목하고 있다.
보령 49세 승하 … 효의왕후 김씨와 합장
조선 후기 정조의 등장은 우리 역사에 태산 같은 격동기를 예고한다. 문예부흥의 절정기와 함께 개혁사상을 내포한 실학자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천도교·증산교 등 민족종교 출현이라는 맥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학으로 불리는 천주교가 왕권과 정면대결하며 숱한 옥사를 치르고 헤아리기조차 끔찍한 순교자들이 속출한다.
결국, 만인평등의 개혁사상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면서 봉건군주체제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다. 일찍이 우리 선조는 ‘말은 곧 씨앗이 된다’고 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경계했다. 정조 24년(1800) 정월, 융릉을 배례한 정조가 능 동쪽 산기슭을 돌아보며 호종한 수신(守臣)에 일렀다.
“이 언덕이 아름답고 마음에 닿는구나. 그대는 돌을 잘라 수릉지(壽陵地)로 잘 표시해 두도록 하라.”
수릉지는 생전에 임금이 자신의 능 터로 택지한 곳이다. 그해 6월 28일 대왕은 갑자기 병환이 위중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보령 49세였다. 임종을 지킨 사람들은 대신·승지·사관뿐이었고 궁첩이나 내시는 누구 하나 가까이에 없었다. 대신들이 침전에 들었을 때 대왕은 이미 혼수가 깊었고 겨우 손을 내저으며 ‘수정전’이라고 입을 뗐다. 수정전은 계비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에게 고할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곧 숨을 거뒀다.
정조는 유언대로 아버지 융릉 옆 동편에 자좌오향의 정남향으로 예장됐다. 조정에서는 건릉(健陵)이라 능 호를 올리고 후일 효의왕후 김씨와 합장했다. 처음 올린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뒤에 정조로 개묘되고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른 뒤 광무 3년(1899)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와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됐다.
<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