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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중인 정조대왕 어필. | 정조대왕(1752~1800)의 용안은 늘 수심으로 가득 찼다. 조정 근신(近臣) 간 권력투쟁은 절묘한 탕평책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정작 대통을 이을 왕자가 없었다. 40이 가까운 임금에게 후사가 없음은 국가적 변고와 재앙으로 이어짐의 예고였다.
11세 때 가례를 올린 한 살 아래의 효의왕후(1753~1821·청풍 김씨)에게서는 태기가 없어 대군 탄출을 일찍이 접었다. 25세로 등극(1776)한 정조에게 의빈(宜嬪) 창녕 성씨가 낳은 장남 문효세자(1782~1786)는 종묘사직의 홍복이었으나 5세에 조졸하고 말았다.
정조 14년(1790) 왕실에 대경사가 났다. 수빈(綏嬪) 반남 박씨가 원자 공(순조대왕)을 순산한 것이다. 문효세자를 가슴에 묻은 지 9년 만이었다. 수빈은 3년 뒤 숙선옹주를 출생해 정조를 더욱 기쁘게 했다. 이듬해 춘삼월 정조는 대신들과 가족을 궐내로 불러 내원 경치를 관람시키고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시냇가 흐드러진 꽃과 벌·나비를 희롱하며 군신 간 술잔이 오갔는데 저녁이 돼서야 파했다. 이 일이 전해지자 저자에서는 조정과 백성이 편안하다 하여 태평성대로 칭송했다. 이후 정조는 원빈(元嬪) 홍씨(홍국영 동생)와 화빈(和嬪) 윤씨가 무출이었으나 크게 괘념치 않고 정사에 몰두했다.
그러나 정조의 후기 치세는 녹록지 않았다. 중국에서 은밀히 전파된 서학(천주교)이 왕실과 양반사회를 잠식하며 민중의식으로 발아했기 때문이다. 정조 15년(1791) 신해사옥(辛亥邪獄) 당시 날로 창궐하는 서학을 탄압했으나 오히려 교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창해 확장 일로로 치달았다. 이는 곧 봉건 군주체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정조 19년(1795)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벽파 세력으로 천주교와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가 기선을 잡으면서 정조를 옹호하며 천주교를 신봉하고 묵인하던 신서파(소론·남인)가 대거 몰락하고 말았다. 남인파 실학자로 촉망받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수세에 몰려 유배를 떠난 시기가 이때다. 다산은 형 약전·약종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지목돼 문초를 받게 되자 자신의 신앙관을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천주교에 관심을 뒀던 것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접근했다. 이를 위해 서학에 능통한 신부를 만났을 뿐이다.” 이후 두 형은 옥사하거나 귀양 갔고 다산도 결국 유배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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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경기전(慶基殿) 내 어진박물관에 있는 정조대왕 어진. 1989년 이길범 화백이 그린 국가표준 영정이다. | 이해 늦가을 혜릉(경종 원비) 앞을 지나던 천주교인 윤구종이 말에서 안 내리고 불손히 통과하자 의금부서 체포해 국문했다. 서학에 심취했던 그는 “천주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며 패역된 진술을 하다 즉결 참수형에 처해졌다. 조정에서는 서양 서적을 소지한 자 모두 관가에 자수케 하고 책들은 모아 불태워 버렸다. 금상의 서조모 정순왕후 간섭으로 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왕은 조야에 분부를 내렸다.
“바야흐로 양기가 쇠퇴하면 음기가 해롭게 일어나는 법이오. 사설(邪說)이 방자하게 떠돎은 정학(正學)을 안 밝힌 때문이니 영남의 옥산·도산서원에 특별 제사를 올리도록 하오.”
정조가 재위하는 24년 3개월 19일 동안 백성은 편안했다. 양반들의 욕구에 따라 후실을 취해 놓고 그 자식들은 차별하는 사회적 병폐를 과감히 혁파했다. 정조가 설립한 왕실도서관인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 출신 박제가 등을 전격 기용, 새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형정(刑政)을 개정해 온갖 악형을 금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宮差) 징세법을 폐지토록 했다.
빈민 구제책의 일환으로는 자휼전칙을 반포해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때 아사자를 줄였다.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로 백성이 배곯을 때나 역병이 돌 때도 내탕고를 털어 고통을 덜어 줬다. 정조는 하늘이 내린 임금도 죽고 나면 초야에 묻히고 역사적 평가가 뒤따름을 선왕(先王)들의 생애를 통해 절감했다.
원래 타고난 성품이 신중·검소하고 화려함을 싫어 했던 정조는 사치를 멀리했다. 옷은 항상 정결히 빨아 입었으며 조례 때 곤룡포 외에는 비단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거처하는 내전에는 횃대 몇 개와 면포 요뿐이었고 창문과 벽도 덧바르고 지냈다. 나랏일에는 부지런하고 사적인 일에는 검약했다.
백성은 대왕의 덕을 하늘처럼 높이 칭송했다. ‘따뜻하기는 봄과 같고 유연하기는 비와 같으며 편안하기는 넓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같다’면서 금상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를 행복해했다.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 못지않은 정조의 왕도치세는 눈부신 문물 전성기를 이루며 조선후기 문예 부흥을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세손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활자를 개량해 임진자·한구자·생생자·춘추관자 등으로 기능을 개선했다. 이로 인한 놀라운 인쇄술의 발달은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수많은 서적 간행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호를 딴 ‘홍재(弘齋)전집’도 완성해 학문의 깊은 완성도를 내보였다.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필파초도(보물 제743호)와 필국화도(보물 제744호)는 당시 필화법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이토록 놀라운 치적을 쌓아 백성으로부터 경모받는 임금이었지만 정조는 늘 왕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평상시 왕노릇하는 데 즐거움이 없어 홀연히 왕관을 내던지고 자유롭게 살려는 마음을 보듬고 있었다. 구중심처의 산해진미보다 초가삼간의 소찬조식(素饌粗食)을 그리워하며 허술한 미복 차림으로 민가에 나가 백성의 삶을 두루 보살폈다.
이런 임금에게 조정 신료들은 세종대왕 이래의 성군 출현이라며 감복했다. 대덕칭송이 담긴 휘칭(徽稱)을 올리려는 중신들 간 상소가 빗발쳤으나 끝내 윤허치 않고 준엄한 어명을 내렸다.
“경들은 과인을 기쁘게 하려 하지 말고 변방 경계와 국경 수비를 간극(間隙) 없이 해 백성들의 심려나 줄이도록 하시오.”
사심 없는 임금의 윤음에 조정 대신들은 물론 팔도 방백들까지 크게 감동했다. 어느덧 노론·소론·남인·벽파·시파 간의 벽이 허물어지며 200년 넘게 조선사회를 짓눌러 온 당쟁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대왕이 49세로 돌연 승하하자 전국 방방곡곡은 통곡의 산하로 변했다. 조정에서는 처음 대행(大行·왕릉에 예장되기 전 임금 신분)에게 정종(正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렸으나 고종 때 정조(正祖)로 개묘한 뒤 광무 3년(1899) 정조선황제로 추존했다.
종(宗)과 조(祖)의 구분에 대하여는 이미 전조 기사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종(宗)은 계승왈종(繼承曰宗)이라고 해 정상적으로 대통을 이었을 때 종이라 했고, 조(祖)는 유공왈조(有功曰祖)여서 재위 기간 공을 높여 묘호를 올렸다. 그러나 여기에는 왕실 내명부만의 기막힌 곡절이 숨겨져 있다. 종은 왕비 탄출의 대군(大君)이었고, 조는 후궁 소생의 군(君)이었던 것이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와 조선왕통의 중시조가 되는 세조를 제외하고는 어떤 임금도 종·조 묘호 작법에 어긋남이 없다. 철종과 고종이 예외임은 해당호에서 다룰 예정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