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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9>순조대왕 인릉(上)

惟石정순삼 2010. 12. 19. 08:1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9>순조대왕 인릉(上)

활기찬 조각기법의 인릉 석물들. 18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적 양식이다.

 

활기찬 조각기법의 인릉 석물들. 18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적 양식이다.

 

 주어진 한평생을 살아가며 유난히도 고달프게 살아가는 형극의 인생길이 있다. 조선 제23대 순조대왕(1790~1834) 생애처럼 고난에 찬 역경의 연속이라면 임금 노릇은 고사하고 자청해 인생길을 다시 가겠노라 나설 사람이 있을까 싶다.

 순조(純祖)의 탄강은 화려했다. 장남 문효세자를 잃은 정조에게 수빈 박씨에게서 출생한 순조는 온 나라의 기쁨이었다. 조정이 안정돼야 백성도 편안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원자로 정호(定號)한 뒤 철저한 왕자 교육을 하던 중 11세 되던 해(정조 24년·1800) 1월 1일 왕세자로 책봉했다.

온 나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순조

 이 해 정조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안동 김씨(1789~1857·순원왕후)를 세자빈으로 낙점한 뒤 이간택까지 마쳐 놓았다. 조정 실권이 안동 김씨에게 이동되는 것을 염려한 정순왕후 경주 김씨(영조 계비) 눈에서는 증오의 불꽃이 튀었다. 같은 해 6월 28일 정조는 돌연 훙서했다. 신료들과 백성은 왕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짐작하면서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피를 부를 수 있는 왕권 교체기에 왕실의 최고 어른은 정순왕후였다. 때마침 세자 책봉을 고하러 청나라에 갔던 주청사가 귀국 중이었는데 다시 발길을 돌려 세자의 왕위 습봉(襲封)을 칙서로 받아오게 했다. 어린 순조는 울면서 왕위에 올랐다.

 정순왕후는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를 차지하고 곧바로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이제 조정 주도권은 경주 김씨가 장악하게 됐다. 친정 6촌 오빠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손자(정조)에게 충성했던 시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조정은 또다시 일촉즉발의 살얼음판 정국으로 표변하며 급속히 냉각됐다.

 순조 등극 시의 내명부 실상은 그야말로 층층시하였다. 생모 수빈 박씨(정조 후궁)와 서모 효의왕후(정조 원비)의 두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고, 할머니(혜경궁 홍씨·사도세자 빈)와 서증조할머니(정순왕후)도 극진히 받들어야 했다. 정순왕후는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 아래였으나 왕실의 법도상 당연히 내명부 최고 수장이었다.

 벽파(노론) 측 실리라면 물불 안 가리던 정순왕후가 순조 즉위 유시를 공포하며 앞세운 건 서학(천주교)을 진멸하는 ‘척사(斥邪)’ 정책이었다. 군신 간 상하관계를 부정하는 서학을 궤멸시키고 시파와 남인들이 주로 믿었던 천주교를 탄압해 정적을 제거하는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벽파 실세로 권력을 거머쥔 김관주·심환지 등은 정조를 보좌해 탕평책을 이끌었던 시파 중신들을 대거 살육하고 귀양 보냈다.

 당시 조선사회 내 천주교 세력은 국가권력의 통제 단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17세기 인조 때 소현세자와 홍대용 등이 반입한 서학 서적이 연구 차원에 머물다가 내세를 믿는 정신종교로 진전된 건 18세기 들어와서다. 숙종 이후 권력층에서 몰락한 남인 소장학자들과 재야 지식층을 무섭게 파고든 것이다. 이승훈·정약용·이가환·권철신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정조 말년에 이미 1만여 명을 넘어섰고 왕실 깊숙이까지 침투해 있었다.

수렴청정으로 권력잡은 정순왕후

 정순왕후는 어린 임금 순조의 어명을 빙자해 철퇴를 가했다. 바로 순조 1년(1801)에 일으킨 신유박해다. 200명 넘는 천주교인이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주살당했다.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 부부도 서학을 신봉하다 역모로 몰려 사사당하니 할머니가 손자 부부를 죽인 것이다. 백성은 삼조(三朝)에 걸쳐 오래 사는 늙은 왕후를 원망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노 왕후의 야망은 끝 간 줄을 몰랐다. 이번에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조정 요직을 잠식해 가는 안동 김씨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간택을 마친 뒤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왕비 책봉이 유보된 김조순의 딸을 왕비 간택에서 제외하는 책략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반발은 뜻밖에 거셌다. 이 역사적인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 간 정면 대결은 결국 안동 김씨 측 승리로 끝나 14세 김조순의 딸이 13세 순조와 가례(1802)를 올리니 곧 순원(純元)왕후다. 이때도 순조는 지켜만 볼 따름이었다.

 금상의 나이 15세(순조 4년·1804)가 되자 천하의 정순왕후도 국법에 따라 수렴청정을 거두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절대권력의 정상에서 일조일석에 추락한 뒤 마음을 잘못 다스리면 예외 없이 중병으로 이어진다. 정순왕후는 이듬해 1월 61세로 승하했다. 장수를 잃은 병사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경주 김씨와 벽파의 멸문지화는 자명한 수순이었다.

 안동 김씨 일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정의 모든 권력이 그들의 손아귀로 굴러 온 것이다.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김조순은 김이익·김이도·김달순·김희순·김명순 등 일족을 조정 요직에 두루 앉히고 국정을 농단했다. 국가 인사행정의 근간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온갖 전횡과 부패로 정치 기강은 무너진 채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시정에는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이 난무하고 천주교 세력은 요원의 불길처럼 곳곳에 번져 나갔다.

 견디다 못한 순조가 처가 일족으로 넘쳐나는 조정 근신들을 내려보며 의미심장한 옥음을 내렸다.

 “구중의 깊은 곳에 있다 하여 민정을 모른다고 생각지 마오. 경들은 근자에 와 나라 위해 제대로 한 일들이 없소이다. 사람을 탄핵하기만 했을 뿐 죽이지 말라는 의논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소.”

 깊은 밤 심산유곡을 혼자 걷다 늑대를 만나 겨우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다. 후일의 사가들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안동 김씨 60년 세도(勢道)정치가 백성을 절망케 하고 조선왕조 국운을 낙조로 물들였다고 탄식한다.

 세도(世道)란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 해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 세력들이 표방했던 통치철학이다. 정조 등극 초 4년간 권력을 독식했던 홍국영을 빗대 ‘勢道’라 조롱했는데 순조 등극 이후 안동 김씨가 국정을 장악하며 고착된 용어다. 이후 등장하는 세도의 의미는 후자인 ‘勢道’이다.

 순조가 재위하는 34년 동안 조선 강토는 신고(辛苦)의 연속으로 신음했다. 가뭄·홍수·반란·도적·역병·기근이 19년간이나 지속했고 나머지 세월은 국상을 치르느라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정순왕후(1805)에 이어 혜경궁 홍씨(1815), 효의왕후 김씨(1821), 수빈 박씨(1822)가 연달아 승하했기 때문이다.

재위 34년 끊임없는 재앙의 연속

 순조는 처가의 횡포가 국기(國基) 혼란으로 요동치자 극약처방을 내렸다. 순원왕후가 낳은 효명세자의 빈궁을 풍양 조씨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 대항세력으로 맞세운 것이다. 그러나 영특했던 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중 23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순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삭히다가 속병이 들어 버렸다.

 기망(목이 막혀 호흡이 답답하고 음식을 못 넘기는 병)으로 순조는 1834년 숨을 거뒀다. 한 많은 보령 45세였다. 경기도 파주 장릉(長陵·인조대왕) 좌측 능선에 예장했으나 풍수상 흉지라 하여 논란이 자심했다. 철종 8년(1857) 순원왕후가 승하하면서 현재의 인릉(仁陵·사적 제194호·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에 합폄으로 천장됐다. 자좌오향의 정남향이다. 이 해 묘호를 애초의 순종에서 순조로 개의(改議)한 뒤 광무 3년(1899)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와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해 올렸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