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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장 -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내도 장인어른도 군인

惟石정순삼 2010. 12. 25. 09:02

'한국 군인이 약하다고? 갑자기 포탄이 날아와 옆 동료가 죽었는데
13분 후 다시 현장에 나가 대응사격을 했다… 쉬울 것 같나
바깥에선 몰라도 그 용기를 우리는 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내도 장인어른도 군인
내 몸에는 '국방색 피'가 흐른다… 여기서 나는 '앤의 남편'으로 더 유명해
'내 아내'? 아니다 '앤 맥도널드 장군'이다

군인은 군인을 낳았고, 그 군인은 아들을 낳았다. 또 다른 군인도 군인을 낳았고, 그 군인은 딸을 낳았다. 독일서 태어난 두 아이는 미 육사(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 장교가 됐고, 예정된 듯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세월이 흘러 둘은 미 육사는 물론 3사관학교 출신까지 통틀어 최초의 '장군 부부'가 됐다. 존 A. 맥도널드 소장(53), 앤 맥도널드 준장(52)이다. 군에 빠져서 살아온 30여 년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들은 한국에 빠졌다. 그 인연은 둘의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됐다. 독일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격전지였던 한국에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파견된 것은 어쩌면 필연.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자손은 한국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이번엔 그들의 의지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들이 한국에 빠진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 두 사람 중의 하나인 존 A. 맥도널드 소장을 14일 서울 용산의 한미연합사 본부로 만나러 갔다. 그는 유엔군사령부·한미연합사령부·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부장을 겸하고 있다. 한미연합사 내 서열로는 4번째쯤 되지만 한반도에서 미군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비중 있는 일이다. 첫눈에는 '장군의 부하'로 오해했을 만큼 인상이 좋고,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나타났다.

존 A. 맥도널드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장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한국과 인연 깊은 3대 군인 가족

―가족 대대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고 하더라.

"우리 집안은 물론 아내의 집안도 한국과 대단히 깊은 역사를 갖고 있다. 60년이 넘은 인연이다. 할아버지는 마셜 플랜(2차대전 후 미국의 서방에 대한 경제원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이 포함됐다) 일환으로 1948년 한국에 근무했다. 아버지도 DMZ 판문점에 근무했고, 나 역시 세 번에 걸쳐 8년 반 동안 한국에 근무 중이다. 역시 한국에서 8년 반을 근무한 아내, 앤 맥도널드 준장은 나보다 더 한국을 좋아한다. 군의관이었던 아내의 조부는 1950년 12월 원산 철수 때 함흥에서 출발하는 배에 올라 민간인, 부상병을 싣고 부산에 왔다더라. 날씨는 엄청나게 추웠고, 부상자가 얼마나 많은지 치료할 공간도 부족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 3대가 60년간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깨달은 것은 이 나라가 희망 한 줄기, 도움 한 조각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유력집단(powerhouse)이 됐다는 거다."

―특히나 한국에 오면 "집에 온 듯 편안하다"고 말한다는데, 한국의 어떤 면이 그런 느낌을 주는가.

"우선 그 어마어마한 근면함(enormous work ethic), 그리고 함께 일하는 최종위 소장이 그렇듯 따뜻한 가슴을 가졌다는 것. 그 무엇보다 군인정신(military spirit). 아버지가 1973~74년 판문점 DMZ에서 근무할 때 얘기다. 북한군 4명이 국경을 넘어와 매복해 있다가 미군 4명을 사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뉴스에 나오지 않아 아마 처음 듣는 얘기일 것이다. 그 때문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동이 있었다. 다음날 아버지 부대로 한국군 대위가 찾아와 '지난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더니 '내게 맡기라(I take care of it)'며 뛰쳐나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용맹한 작전을 펼쳤다고 하더라. 이후 두 사람은 또다시 베트남전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1군단의 중령으로, 그는 맹호부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 중령으로 파견돼 1군단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군인들이 군기가 빠졌다, 계집애 같다는 비판을 많이 한다. 미군 군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약하다(soft)는 얘기지.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연평도 사건을 좀 더 정밀하게 짚어보면 그렇지 않다. 연평도 사건은 (작전 중이 아닌) 그냥 훈련 중 포탄을 맞고 많은 사람이 다친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해병대는 다시 현장으로 나가 대응사격을 했다. 여기 앉아있는데 (기자와 함께 간) 사진기자가 포탄에 맞았다고 가정해보자. 13분 후에 다시 와서 반격한다는 게 쉬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바깥(민간사회)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그 상황에서 수십미터를 전진해 반격한다는 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오는 신병은 고작 열일곱, 열여덟살이다. 그런 어린 나이에도 나라와 자유를 지키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들이 어떻게 여린가? 그건 한국군도 마찬가지다."

―옛 중국이야기에 이런 게 있다. '어머니가 아들이 무사한지 살피러 전장에 가봤다. 그 순간 아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자 장군이 아들의 상처를 핥아주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저렇게 장군이 잘해주니 아들이 장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울었다'는 얘기다. 군에서 장군이란 결국 병사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사람이 아닌가.

"그 병사가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라, 동료, 명예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다. 연평도에서 13분 후에 그렇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자발적인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인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데, 정말 그런가.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말을 믿는다. 전장뿐 아니라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가 질리면 동작이 둔해질 수밖에 없다. 위축되면 동작도, 생각도, 시야도 좁아진다. 모든 감각이 살아있어야 공격적이 되어서 냄새도 잘 맡고, 사각(死角)까지 포착할 수 있다. 그래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

―3대가 군에 있었다. 그 사이 군대도 많이 변했겠다.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시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점은 같지만, 군에서 쓰는 기술이 매우 다르다. 할아버지는 2차대전에서 싸웠고, 아버지는 베트남에서, 나는 그라나다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한국에서 근무했다. 할아버지는 말을 타고 전투를 했고, 아버지는 전차와 헬리콥터가 막 보급되는 시기에 군에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헬리콥터를 몰았고."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니 기술이 중요하지, 군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나온다.

"군에서도 그런 주제로 이야기하고, 할아버지와도 그 비슷한 얘기를 나눴었다. 할아버지는 기병 정찰대에 있었는데, 어떤 망원경, 어느 기계를 쓰더라도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직접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2차대전 후에는 레이더나 소나(sona) 기술이 더 발전했지만, 사람이 확인하지 않으면 기술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내 몸에는 초록(green) 피가 흐른다'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나와 아내의 할아버지 두 분이 군인이었고, 내 아버지와 장인은 영내에서 군인들과 자랐다.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 전 세계를 돌며 자랐다. 아내도 군인이다. 뼛속 깊이 군인 가족(military brat), 밀리터리 키즈였다. 그러니 내 핏줄에는 '국방색 피'가 흐르지 않겠나. 국방색(army color green)이지 결코 빨간 피는 아닌 거지."

미 육사는 물론 3사관학교를 통틀어 최초의 장성 부부인 존 맥도널드 소장. 앤 맥도널드 준장.
어림잡아 10개에 가까운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이‘가방 끈 긴’군인은 요리가 취미다. 주로 아내를 위해 요리하지만 혼자있을 때도 한다.“ 난 훌륭한 요리사이며 혼자도 잘 먹는 식성”이란다. /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솔직하게 답해주는 친구가 있는 나라

―할아버지가 본 한국과 아버지의 한국, 그리고 장군이 본 한국은 매우 다를 거다.

"할아버지는 한국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매우 곤궁한 상태일 때 한국을 봤다. 우리 집에 1973년 한국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산에 나무 하나 없고 길은 먼지투성이였다. 90년도에 한국에 왔다가 그야말로 깜짝 놀라시더라. 쫙 뻗은 고속도로, 깨끗한 공항, 한강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나도 마찬가지였고."

―경제가 발전한 만큼 한국 인심도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겠다.

"뭐, 그건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사람들이 좀 더 세련되고(sophisticated), 영어도 잘하게 됐다.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며'비 더 레드(Be the Reds)'를 외치고, 아이스 스케이터(김연아)를 보면서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부자가 됐지만, 그래도 유교에 뿌리를 두고 연장자를 존중하는 면에서는 이전과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 점도 인상적이다."

―한국에는 군인 말고 민간인 친구도 있나.

"한미친선협회 같은 곳에서 친구 몇을 만났다. 그들 사는 곳에도 방문하면서 즐겁게 교류하고 있다."

―그냥 아는 사람인가, 진짜 친구인가. 그 차이는 뭔가.

"기자인가, 철학선생인가. 글쎄, 어느 때나 전화할 수 있는 사람? 내 휴대전화에 그 사람들 번호가 있는데, 그러면 한국에서는 친구 아닌가. 한국 사람에 대해, 한국 정부가 왜 어떤 일을 결정했나, 그런 일은 왜 일어났나 같은 어려운 얘기를 솔직히 물어보고, 답해줄 수 있는 사이다."

―이력 중 '101공수 부대 작전참모차장'도 있더라.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영화·드라마로 익숙한 부대 아닌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나.

"수많은 낙하산병, 헬리콥터를 가진 훌륭한 부대다.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서 파견된 한국재건단(PRT)과 함께 업무를 연계해 수행하고 있는데, 2001년 아내가 거기서 대대장이 됐다. 사령장을 받는 날, 가족들이 꽃을 주는 시간이 있었다. 아내는 남자 배우자로부터 꽃을 받은 첫 대대장이었고, 나는 그 부대 최초의 꽃돌이였다. 군인 가족 인생 중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결혼, 결국 만날 사람이 만났다

―군인은 청혼을 어떻게 하나. '나와 결혼할 것을 명령한다' 이런 식이었나.

"오, 노. 그녀를 만나보면 내가 아무것도 명령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거다. 그녀와 나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쉽게 만나지는 못했다. 마치 평행선처럼. 둘 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버지니아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서 학교에 다녔고, 가족들끼리 인연이 많이 겹친다(두 사람의 웨스트포인트 재학 기간도 2년이 겹친다). 그녀는 국방부에서 나를 관할하는 인사장교로서 독일에 있는 나와 통화하기도 했다. 어느 날, 내 예전 상관이자 당시 그녀의 상관이 '키 크고,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를 만나보지 않겠나'라고 하면서 소개해줬다. 어느 추운 겨울, 비행기를 타고 온 그녀를 캔자스공항에서 처음 만났고, 18개월 후 약혼했다. 89년에 결혼했으니 이제 21년째다."

―첫인상은 어땠나. 떨었나.

"만나기 전에 사진 한 장 못 봤다. 처음 본 순간 얼었다. 일단 그녀 미모에 매혹 당해서. 게다가 매우 유쾌한 기질(fun spirit)을 가진 사람이다. 만나면 알게 될 거다."

―그럼 아내를 위해 청소나 설거지 같은 것도 하나, 장군이?

"물론. 그뿐만 아니라 양고기 스테이크를 정말 훌륭하게 만들고, 아스파라거스 요리도 잘 만든다. 옥수수빵도 굽고."

―한식도 만들어본 게 있나.

"아직은 없고, 다만 만두를 사서 튀겨 먹은 적은 있다. 어디 좀 가르쳐줄 사람 없나…."

―그녀는 왜 군인이 되기로 했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나(앤 맥도널드 준장은 미국이 관장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치안권이양사령부의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다 지난 10월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아내에겐 5자매가 있었는데, 그들과는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존경했고, 학문으로서의 군사학을 좋아했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30년을 군에 있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군인끼리 결혼에 장단점은 무엇인가. 앤 장군은 듣지 못하니 (걱정하지 말고) 말해보시라.

"그래도 어쨌든 듣게 될 거다. 하하. 우리가 함께 있건, 떨어져 있건, 인사교류부터 리더십, 헬리콥터 부대 얘기 등 많은 정보를 나눌 수 있다. 단점이라면, 헤어져 사는 것. 아프가니스탄에 함께 배치받았지만, 부대는 1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오가면서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자 부대에서 생활했다. 회의가 있을 때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헬리콥터 부대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군에 가족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잠깐 보여줄 게 있다."

그가 상의 주머니에서 〈Anne's Husband(앤의 남편)〉라고 쓰인 명찰을 꺼냈다. 이 명찰 뒤쪽에는 벨크로 테이프가 달려 있어 기존 명찰 위에 덧달 수 있다. 이 명찰을 달더니 그는 "여기서는 앤이 나보다 유명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이 명찰을 달면 사람들이 더 잘해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앤 맥도널드 준장은 미 육사를 졸업한 이듬해인 1981년 의정부 미항공여단 소속 조종사로 근무한 뒤, 93~95년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또 99~2004년까지 주한미8군 작전장교, 17항공여단장을 역임, 주한미군에서 그녀는 유명인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미국 여성계에서 더 유명하다. 앤 맥도널드 장군은 1976년 미 육사가 여성 입학을 허용한 첫해 입학한 여성 생도 119명 중의 한명. 현재 미 육사 내 여성 생도 비율은 약 15%지만, 당시에는 논란이 뜨거웠다. 앤 장군은 지난해 미 여성지 '애틀랜타 우먼'이 뽑은 '올해의 여성'에 선정된 후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여성 입학을 두고 군대는 물론 모든 국민이 한마디씩 했지만, 변화에 따른 당연한 반발이었다"며 "'그럼, 할 수 있어'하는 마음으로 대들었지만 우릴 두 팔 벌려 환영해준 사람도 없었고, 그렇게 힘들 줄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헬기 조종사 출신인 앤 장군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 격전지는 물론 미 국방성에서 탁월한 업적으로 2006년 '별'을 달았다. "테러와 싸우는 곳이면 이라크 아니라 어디라도 가겠다", "우리 둘 다 아이를 원했지만 그 때문에 (군 생활을) 감속(slow down)할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그녀, 군인이다. 맥도널드 장군은 기자가 "당신 아내(your wife)…"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앤 맥도널드 장군(General Anne Macdonald)"라고 정정했다.

"아내가 대대장이 된 날 나는 그 부대 최초의 꽃돌이가 됐다
군인 인생 중 가장 자랑스런 순간이었다"

미군은 공부하는 군인에게 프리미엄을 준다
비행학교, 해군 아카데미, 비즈니스 스쿨…군대가 사회에 뒤처지지 않도록 공부했다


군인, 반전, 그리고 반미

―얼마 전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강연했다. '부하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군생활을 즐겨라' 등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 중 가장 핵심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협력의 중요성을 아는 거다. 한국에서는 육군은 육군, 해군은 해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합동(joint)체계를 갖춘 지 오래되지 않지만, 해군에서 5~10년을 배우고 해병대·육군·공군으로 가면 엄청난 효율을 기대할 수 있다. 더불어 한국이 미국·호주·영국 등 다른 나라들과 연합(combine) 훈련의 중요성도 잊지 말라고 했다. 지금 현장에서 만난 이가 나중에는 좀 더 끈끈한 동지가 되는 걸 경험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베트남 전장에서 한국 장교를 다시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초기 이라크 전,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에도 참가했었다. 당시 전황이 긴박해 매우 위험했는데, 당신이 그럴 때 본국에서는 반전 시위가 일어났다. 어떤 생각이 들었나.

"바그다드 서쪽부터 도심으로 치고 들어갈 때, 72대의 헬리콥터로 선두에 서서 기갑부대를 이끄는 임무를 수행했다. 아침마다 BBC에서는 30분씩 뉴스를 했는데, 거기서 시위 현장을 보여주더라. 관련 보고서도 올라오고. 한쪽에선 전쟁 반대, 다른 쪽에선 찬성 데모가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잠재적인 핵무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군인은 정치적 타협이 불가능할 때 나서는 사람들이다. 군인은 전장에 가는 마지막 사람(선택)이어야 한다. 그 경우도 그랬다. 그건 국민도, 정치인들도, 군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50년대 주한미군은 한국을 구해주고, 원조식량을 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80년대부터 그 인식이 달라져 '미군 철수하라'는 시위가 잇따랐다.

"아, '미군 물러가라(US Army Go Home)'?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안보에 주한미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30년 전 60%에서 최근엔 82%가 됐다더라. 어떤 경우에는 미군 병사들이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이웃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아닌 미국이 한국의 최우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2002년 두 소녀가 안타깝게 사고로 사망한 슬픈 사건, '미선·효순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 시위대가 몰려와 게이트를 닫았지만, 몇몇이 의정부 캠프 클라우드의 펜스를 끊고 넘어와 외치기 시작했다. 좀 슬프고 긴장되긴 했다. 그러나 그 행위 역시 민주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왜 북한의 엄청난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말하는 좌파 인사가 아직도 있다.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는 이들을 보면 당혹스럽다. 아마도 천안함 사건과 똑같은 연평도 사건을 보면서 이제 좌파 인사들도 명확한 증거가 나왔다고 생각할 거다."

―군 장성은 기업 사장과 비슷한 점도 많아 보인다.

"많은 예산을 움직이고 고객을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선 그렇다. 하지만 기업체를 운영하면 자기 병사를 목숨이 달린 전장에 내보내는 책임을 어깨에 지지는 않겠지."

―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의 자질이라면.

"이기고 싶어하는 사람, 발전하겠다는 욕심이 있는 사람."

―장성이 갖춰야 할 미덕은?

"겸손, 그리고 남의 말을 잘 듣고, 참을 줄 아는 것."

―'군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의무(Duty)!"

〈2급 비밀. 이번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온다는 것은 2급비밀에 해당하니…〉 한미연합사 본부의 정보참모부장 방 앞에는 유머러스한 가짜 비밀 공지문이 붙어 있었다. 가족들과 헤어져 지내는 군인들의 애절한 유머 감각이다. 여느 군과 비슷하게 'APO AP 96205-○○○○'라는 사서함 주소로만 존재하는 한미연합사. 거기에도 사람 그리워하고 때때로 외로움도 느끼는 군인이 살고 있었다. "때로는 포근한 침대와 뜨끈한 샤워, 그리고 따스한 밥이 그립다. 하지만 그건 그거. 그런 걸 슬퍼하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라고 말하는 그런 군인이.

“한국에서는 아내가 더 유명하다”는 맥도널드 장군은‘앤의 남편’이라는 가짜 명찰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 채승우 기자

맥도널드 소장은

1957년 아버지의 주둔지였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 해군대 석사, 센트럴 미시간대 석사. 노스캐롤라이나 비즈니스 스쿨 졸업. 미 82공수부대사단 82전투항공대대 비행장교, 그라나다 '긴급분노(Urgent Fury)' 작전과 걸프전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 등에 파견. 아프가니스탄 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이번이 세 번째 한국 근무로 현재 유엔사·연합사·주한미군사 작전참모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