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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7>정조대와 건릉(中)

惟石정순삼 2010. 12. 19. 08:1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7>정조대와 건릉(中)

건릉(정조) 좌감(左岡)을 복토한 인공 사초지,

용릉으로 통하는 좌청룡이 허약해 비보시킨 절묘한 왕릉 품수다.


융릉(사도세자) 원찰 용주사. 정조는 융릉 참례 때마다 이곳에 들러 마음을 비우려 했다.

 

 아버지(사도세자)가 쌀 뒤주 속에서 굶어 죽는 참상을 목격한 11세의 세손(정조)은 시시각각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챘다. 그것도 남이 아닌 외조부(홍봉한)와 외종조부(홍인한)가 주축 세력인 노론파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혜경궁 홍씨)는 권력 유지를 위한 대신들 간 암투인 데다 친정아버지가 앞장서고 있어 애매하고 난감할 뿐이었다.

 정조가 살아남는 길은 섣불리 나서지 않고 할아버지(영조) 눈 밖에 안 나는 것뿐이었다. 대궐 뒤편에 ‘모든 것을 감춘다’라는 뜻의 개유와(皆有窩)란 독서당을 만들고 학문 연마에 전념했다. 이 당시 정조가 섭렵하며 독파해 낸 양서 양은 실로 방대하다. 특히 청나라 건륭(乾隆) 문화와 치세·치도·역경 관련서적들에 탐닉하며 뒷날 문예 부흥기를 이끄는 지적 소양을 골고루 축적했다.

 마침내 용상에 오르자 정조는 왕실도서관 격인 규장각을 설치하고 독서에만 전념했다. 정치는 세손 시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바친 먼 외척 홍국영(1748~1781)에게 내맡기고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대신들은 새 임금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불안에 떨었다.

 홍국영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날랜 병사들을 차출해 숙위소(宿衛所)를 만들어 왕궁 경호를 하고 정조를 제거하려던 외척들과 노론 세력을 앞장서 척결했다. 조정 내 모든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자 8도 감사는 물론 수령 방백들까지 머리를 조아렸다. 누이동생을 정조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이 되게 하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하를 주름잡았다.

 백성은 홍국영의 오만무도를 ‘세도(勢道)’라 조롱하며 금상을 의심했다. 그래도 정조는 모른 체하고 방관했다. 원빈이 20세도 안 돼 병사하자 다급해진 홍국영은 스스로 망가졌다. 은언군(정조 이복동생) 아들 상계군을 원빈 앞으로 입양시켜 왕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젊은 정조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원빈 사인이 정순왕후(영조 계비) 모살이라 단정한 홍국영은 왕후를 독살하려다 발각돼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다. 집권 4년 만이었다.

 어찌 참새가 봉황의 큰 뜻을 알겠는가. 정조는 비로소 나섰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편에 서서 아버지를 아사시킨 노론파의 무력화였다. 오랜 세월 권력을 농단하며 기득권층으로 행세해 온 그들에겐 돈이 있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사도세자 묘)이 흉지여서 화성 명당으로 이장하겠다고 선포했다. 지은 죄가 커 출구전략을 모색하던 노론 세력들에겐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노론파가 서둘러 갹출한 이장비용 성금액이 무려 18만 냥(약 200억 원)이나 됐다. 수년 후 정조는 풍수상 이유를 들어 영우원이 이장되는 화성을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도시를 옮기는 비용이 어찌 왕릉 천장 비용과 견주겠는가. 노론파들이 뒤늦게 알아차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조선시대 왕릉은 대궐 밖 10리 안에 택지함이 국법이었다. 산릉제를 지낸 임금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계산한 것이다. 오늘날의 10리는 4㎞를 기준으로 하나 당시는 약 5.2㎞였다. 따라서 당시 80리는 현재의 100리에 해당하는데 서울과 화성 간은 88리였다. 고집불통 대신들이 8리가 더 멀다고 영우원의 화성 이장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조의 고집은 더했다.

 “이제부터 화성(수원)을 80리로 명하노라.”

 오늘날 수원의 ‘떼고집쟁이’ 노인들을 ‘수원 80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조의 깊은 효성을 은유한 것이어서 폄하는 말이 아니다. 이처럼 수원은 화성에 왕릉이 조영되면서 근처 백성을 이주시켜 새로 세워진 도읍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도 이때 축성된 것이다.

 화성 이전 명분은 엄청났다. 이때 노론파가 중심이 돼 걷은 돈이 물경 87만 냥(약 1000억 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속이 바닥나면 허덕이고 호주머니가 비면 비굴해지는 법이다. 재무구조가 뒤집힌 제신(諸臣)들은 비틀거렸고 정조의 치세는 날개를 달았다.

 당시의 당쟁 구도는 영조 때와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름조차 생소한 벽파(僻派)와 시파(時派)의 등장이다. 벽파는 영조 말년까지 권력을 휘두르며 사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은 노론파가 중심이었다.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정조와 맞섰고 시류를 무시한 수구 세력들이었다. 내명부의 정순왕후, 화완옹주, 숙의 문씨와 정조의 외척들이 이에 가담했다. 반면 시파는 새 시류에 영합하는 남인·소론과 일부 노론 이탈 세력들로 조합된 신당이었다. 정조의 개혁 노선을 지지하며 벽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정조는 현명한 군주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양파를 적절히 등용해 힘을 분산시킨 뒤 왕권을 강화시켰다. 자신의 관심 분야였던 문예정책을 소신껏 펼치며 백성을 보살피니 바야흐로 태평성대(太平聖代)였다. 규장각을 통해 양성된 동량들이 정국을 이끌며 개혁 시대의 사상적 주류를 형성했고, 서얼들의 등용문을 크게 넓혀 첩실·서자들의 맺힌 한도 풀어 줬다. 문벌과 당파주의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조정 진출 길을 열어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을 이루도록 했다. 이때 배출된 학자들이 실학자 정약용·이가환과 북학파의 박제가·유득공·이덕수 등이다.

 시·서·화·문학에도 발군이었던 정조는 중국문화 영향권에서 탈피해 독자적 조선문화 현창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화풍(國畵風) 진경산수 그림과 국서풍(國書風) 동국진체 글씨가 이 같은 시도였다. 일부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기도 했지만, 후일 서양문명과 만나면서 놀라운 융합 문화로 우뚝 서게 된다.

 이토록 어진 현군(賢君)에게도 편한 날은 거의 없었다. 끊임없이 용상을 노리는 역모의 무리와 사회 전반에 만연돼 가는 민중의식 때문이었다. 정조 2년(1778) 역도들이 금상을 시해하고 이복동생 은전군(사도세자 5남)을 추대하려다 적발돼 많은 인재가 희생됐다. 2년 후(1780)에는 철석같이 믿었던 홍국영이 왕통을 바꾸려다 들통 나 전리(田里)로 방출시켰다.

 전라도 진산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양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주변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천주교 의식으로 상을 치렀다. 인척 권상연이 감싸고 나서면서 정치 쟁점으로 비화됐다. 조정은 또 두 파로 갈라섰다. 천주교 및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는 벽파 위주의 공서파(攻西派)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려는 신서파(新西派) 간의 이전투구였다.

 이럴 때마다 정조가 심히 괴로워하며 임금 자리를 내던지고 초야에 묻혀 살려 했던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포착되고 있다. 뭇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최고 권력의 나라님 자리-.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필부필녀들이 차라리 낫겠다고 정조는 상심했다.

 어느 날 정조가 퇴락했던 고찰을 중창시켜 융릉(사도세자) 원찰(願刹)로 삼은 화산 용주사를 찾았다. 대웅전 앞에 회양목 한 그루를 식수하고 불상을 바라보니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바로 삼라만상에 투영된 바였다. 순간, 섬광같이 스치는 그 무엇이 정조의 생각을 두 동강 냈다.

 “마음 하나를 떨치지 못하는 내가 무슨 임금이로고!”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