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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3>추존 진종소황제 영릉

惟石정순삼 2010. 8. 1. 09:1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3>추존 진종소황제 영릉
추존 진종소황제의 영릉. 파주삼릉 안에 있으며 원 → 능 → 황제릉으로 추상했으나 능침 상설은 원제(園制) 그대로다.
영릉 앞 비각. 효장세자·진종대왕·진종소황제를 음각한 세 개의 능비가 함께 있다.
 봉건 군주시대는 국가를 통치하던 최고 권력자 호칭이 나라마다 서로 달랐다. 중국은 황제, 러시아는 대제 등으로 폐하라는 극존칭을 썼으나 강대국의 제후국이나 속국은 자국의 임금 호칭마저 뜻대로 못하고 낮춰 불러야 했다.

 원나라(몽골족) 제후국이었던 고려 후기에는 묘호(廟號)에 종(宗)자조차 못쓰고 원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충(忠)자를 붙여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등으로 불러야 했다. 명나라(한족) 속국이었던 조선은 임금을 전하로 비칭(卑稱)하며 군신 간 신의를 지켜내 국가 권력을 유지했다. 반정이나 쿠데타로 용상을 찬탈했다 해도 필히 명 황제 칙령이 내려야 비로소 정식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차기 대통을 잇는 세자 책봉 시에도 주청사를 보내 윤허를 받고 징표를 받아 와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도 하루 종일 중천에 떠 있지는 못한다. 욱일승천하던 명이 망하고 뒤이은 청마저 망조가 들자 이번에는 섬나라 일본이 아시아 강자로 부상했다. 조선과 청국이 결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며 고종(1852∼1919)이 황제가 돼 새로 등극했다. 이 역사적 행간에 일인들의 가공할 음모와 행패가 자행됐음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난 사실이다.

 비록 국권을 침탈당한 조선 황실이었지만 제국으로 국체가 바뀌며 고종은 ‘주상전하’에서 ‘황제폐하’로 격상되고 연호(年號)까지 사용하게 됐다. 당시 조선은 중국 황제가 등극할 때마다 숭정, 강희, 건륭, 동치 등을 바꿔 써 왔는데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광무(光武)라는 독자적 연호를 쓰게 된 것이다.

 황제 등극 이후 고종황제는 상국이었던 청국의 간섭 없이 독단적으로 국무를 처결했다. 명에서 내린 이태조 묘호 강헌(康獻)대왕을 태조고황제로 추존해 역대 조선 임금들이 황손임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그리고는 고종 이전 7대 왕과 왕비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해 올려 황실 계보를 분명히 했다.

 ○ 조선왕조 최초로 황제 칭호 

 추존 7대 황제 중 첫 번째가 이번 호에 게재되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1719∼1728)다. 진종은 일반인들에겐 물론 사학도들조차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 임금이다. 하기야 영조의 장남으로 7세에 세자로 책봉된 뒤 10세 때 하리(下痢·설사)로 세상을 떠났으니 종묘사직과 억조창생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에 가면 사적 제205호로 지정된 면적 132만3105㎡(4만239평)의 파주삼릉이 있다. 공릉(恭陵·제8대 예종원비 장순왕후), 순릉(順陵·제9대 성종원비 공혜왕후), 영릉(永陵·추존 진종소황제)이 있어 공순영릉으로도 불린다. 공교롭게도 이 삼릉의 주인들 모두 일찍 조졸해 후사가 없다.

 영조는 사저 시절인 숙종 45년(1719) 후일 정빈(靖嬪)으로 격상되는 이씨에게 기다리던 아들(행)을 득출했다. 당시로선 이복형인 장희빈 아들 경종이 세자로 있을 때여서 영조가 용상에 등극하리라고는 언감생심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지고지난한 인간사 앞날을 누가 장담하랴.

○베개보다 더 가벼워진 세자 안고 통곡

 천운이 함께해 왕위에 오른 영조는 즉위 당년(1724) 7세의 아들 행을 효장(孝章)세자로 서둘러 책봉했다. 그리고는 원비 정성왕후 서씨에게서 대군왕자를 고대했다. 비천한 후궁 아들로 태어난 게 지울 수 없는 통한이었던 영조는 적통 왕자만 탄출하면 언제든지 세자를 교체할 요량이었다.

 영조 가족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태동됐다. 애타는 적자 소식은 감감했고 네 후궁들은 옹주만 낳았다. 영조 4년(1728) 10세 되던 해 효장세자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 풍양 조씨와 가례를 올렸다. 흥에 겨운 만조백관들은 반석같이 탄탄한 왕조의 앞날을 찬탄하며 금상과 차왕(次王)에게 국궁사배를 올렸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이튿날부터 어린 세자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를 계속했다. 영조는 불길한 예감에 모골이 송연해졌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팔도 명의가 동원되고 진귀 탕약을 달여 진상했지만 백방(百方)이 무효였다.

 효장세자보다 네 살 위였던 세자빈 조씨(1715∼1751·추존 효순소황후)는 시집오던 날부터 어린 신랑 병구완에 밤을 낮 삼았다. 하필이면 세자가 장가들던 날 병들었으니 조씨 자신은 물론 친정 문중에서도 면목 없고 황당스러운 일이었다.

 다급해 동궁의 병석을 찾은 부왕에게 세자가 아뢰었다.

 “아바마마, 세상에는 명의가 없사오니 번고스럽게 여러 약을 마구 쓰지 마소서. 아무래도 소자는 어렵겠사오니 조용히 하세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영조는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세자를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다. 탈진으로 피골이 상접해진 세자는 베개보다도 더 가벼웠다. 임금은 “왕위라도 내놓을 테니 세자만은 구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간구했지만 사방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며칠 후 효장세자는 이승에서의 삶을 영결했다. 백성들도 슬피 울었다. 세자 책봉 4년째로 장가간 지 두 달 만인 영조 4년(1728) 11월 16일이었다. 수없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용상에 오른 지 4년 된 35세의 임금 영조는 세자가 떠난 서녘 하늘을 넋없이 응시하며 홀로 독백했다.

 “오호통재(嗚呼痛哉) 오호애재(嗚呼哀哉)려니 애통하고도 슬픈 일이로다. 인간사 오고 감이 무상할진대 권세와 부귀 또한 헛것이어라. 자식을 앞세워 가슴에 묻은 아비가 누구 앞에 나서 임금 노릇 할손가.”

 세자를 떠나 보내며 영조는 또 한번 단장의 고비를 넘긴다. 14세의 세자빈이 식음을 거부해 물조차 넘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조씨는 출상하는 날 세자 상여를 부여잡고 “이미 뒤를 이을 후사가 없는데 살아서 무엇하오리까”라고 각혈하며 통곡했다. 영조가 급히 편전으로 들게 해 친히 달래고 전의를 불러 겨우 목숨을 연명시켰다.

 이후 세자빈 조씨는 청상과부로 23년을 외롭게 살다가 37세 되던 해(영조 27년·1751) 시아버지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세자 신분으로 서세한 효장세자가 황제로까지 추존되는 과정 또한 왕실 비극과 위태로운 조선 국운이 겹쳐지며 극적인 반전을 거듭한다.

○  원→능→황제릉으로 존호 높아져

 효장세자가 떠난 지 7년 후 영빈(暎嬪) 이씨 몸에서 태어난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한 존재였다. 뒷날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는 사도세자가 당대 붕당정치로 희생되자 영조는 경솔했던 자신의 결정을 절통해하며 후회했다. 그리고는 사도세자 아들 정조를 효장세자 앞으로 입양시켜 대통을 잇게 한 것이다.

 제22대 임금 정조대왕은 즉위하던 해(1777) 양부 효장세자를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존하면서 원(園)을 능()으로 격상했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뒤 광무 3년(1899) 진종소황제로 다시 추상해 영릉은 황제릉이 됐으나 상설(象設)은 원제(園制) 그대로를 유지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각 안 능비만 세 개일 뿐이다.

 을좌신향(북으로 15도 기운 서향)의 능침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추존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가 동원쌍분으로 예장돼 있으며 영릉에는 이런 응어리진 회한들이 엉켜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