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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역대 왕 및 추존왕의 생모 일곱 후궁의 신위를 봉안한 칠궁. 영조 생모 숙빈 최씨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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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의 원릉 비각 안에 있는 계비 정순왕후의 묘호비(廟號碑). | 조선 제21대 영조대왕에게는 임금으로서도 풀지 못한 두 가지 한이 있었다. 보산 83세로 52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도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천추의 통한이었다. 궁중에서 가장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던 어머니를 왕비로 추존하는 것과 정비(正妃) 몸에서 대군 왕자를 탄출해 대통을 승계하는 것이었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일찍이 서세(숙종 44년·1718)한 생모 숙빈 최씨를 단계적으로 추존하려 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 측 대신들에게 숙빈과 영조가 살던 잠저에 사우(祠宇)를 건립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반응은 뜻밖이었다. 폐주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복위시켰으나 중종이 등극하며 다시 폐위된 역사적 과오를 실례로 들며 “그것만은 안 된다”고 극력 반대했다.
○ 숙빈 추존 군왕으로서도 불가항력
호시탐탐 용상을 엿보는 소론 측 세력이 틈새를 노리고 있어 군왕으로서도 불가항력이었다. 영조는 하는 수 없이 경복궁 북쪽(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1)에 신위를 봉안하고 숙빈묘(淑嬪廟)라 칭했다. 존호를 화경(和敬) 숙빈으로 추상한 뒤 육상묘(毓祥廟)로 바꾸고 영조 29년(1753) 육상궁이라 개명했다.
육상궁은 고종 19년(1882) 화재로 소실된 후 다음 해에 다시 세워졌다. 순종 1년(1908) 저경궁·대빈궁·연호궁·선희궁·경우궁 등 5개 묘당을 이곳에 옮겨 육궁으로 부르다가 1929년 덕안궁이 이안되면서 칠궁(七宮)이라 했다. 칠궁은 역대 임금 및 추존왕을 출생했으나 후궁 신분이어서 왕비로 추존 안 된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한 맺힌 곳이다.
칠궁 동쪽으로부터 신위를 살펴보면 ①육상궁(영조 생모 숙빈 최씨) ②연호궁(추존 진종소황제 생모 정빈 이씨) ③덕안궁(영왕 생모 순헌 귀비 엄씨) ④경우궁(순조 생모 수빈 박씨) ⑤선희궁(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 ⑥대빈궁(경종 생모 옥산부대빈 장씨) ⑦저경궁(추존 원종 생모 인빈 김씨) 순으로 봉안돼 있다.
영조에게는 아들복이 없었다. 달성부원군 서종제 딸을 원비(정성왕후)로 맞았으나 영조 33년(1757)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대군 왕자를 얻지 못했다. 두 살 위였던 정성(貞聖)왕후가 훙서하자 영조는 크게 슬퍼하며 홍릉(弘陵)이라 능호를 내리고 애책(哀冊)도 직접 내렸다.
“내 이때를 당하여 먼저 택조(宅兆·묘자리)를 가리고 능호를 주관하였으며 허우지제(虛右之制·광중 오른쪽을 비워 추후 남자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는 제도)를 써 두었으니 또 무엇을 근심하리오.”
그러나 후덕한 정성왕후 곁에 묻히고자 했던 영조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야멸찬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으면서 대궐 안 내명부는 또다시 반목과 모함의 아수라장이 돼 버리고 만다. 홍릉 편에 상세히 다루겠지만 동구릉 안 원릉의 영조 자리는 원래 서오릉 내 홍릉이었다. 현재까지도 정성왕후 오른쪽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어 탐방객들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영조는 2남 11녀 모두를 후궁에게서 얻었다. 제1후궁 정빈(靖嬪) 이씨가 장남 효장세자(1719~1728·추존 진종소황제)를 낳았으나 10세 때 설사병으로 서세했다. 영조는 식음을 전폐하고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의 비탄에 잠겼다. 우환은 겹쳤다. 화순옹주(정빈 이씨 2녀)를 충남 예산으로 하가시켰는데 남편(김한신)이 38세로 죽자 영조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굶어 죽은 것이다. 영조는 부왕의 어명조차 거역한 딸이 하도 괘씸해 장례를 살피지 않고 “왕도 이 꼴을 당하는가”를 반추했다. 이 화순옹주가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다.
절망하던 영조에게 제2후궁 영빈(暎嬪) 이씨가 낭보를 안겼다. 사도세자(1735~1762)를 낳은 것이다. 2세 때 서둘러 왕세자로 책봉하고 당대 최고 학자들로 하여금 세자의 왕도교육에 전념토록 했다. 이후 제3후궁 귀인 조씨, 제4후궁 폐(廢)숙의 문씨에게서도 왕자를 원했으나 옹주만 출생했다.
○ 대군과 군 예우 천양지차
영조의 대군왕자에 대한 갈망은 집요했다. 비록 용상에 오르긴 했지만 후궁 소생이란 출생 신분이 철천지한이었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왕위 대통만은 정비(正妃) 손인 대군으로 잇고자 했다. 조선조 모든 왕자들은 영의정(정1품)보다 더 높은 무급이면서도 대군과 군에 대한 예우는 천양지차였다. 후궁 손이 벼슬을 아무리 높이 해도 대군 손의 격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영조는 끝내 이 열등감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66세로 접어든 임금이 새 장가를 가 대군을 낳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영조 35년(1759) 6월 자신보다 52세 어린 오흥부원군 김한구 딸을 계비로 맞으니 바로 정순왕후(1745~1805)다. 이때 정순(貞純)왕후 나이 15세였다.
역사는 이쯤에서 나이 어린 정순왕후의 등장에 주목한다. 사학계서는 표독하고 당찬 정순왕후가 입궁하면서 500년 사직의 조선왕실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영조가 승하한 뒤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이 여인이 그려낸 역사의 자화상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붕당싸움으로 뒤엉킨 대신들 간 사투는 뜻밖에 천주교 탄압으로 이어져 수많은 인재들이 정순왕후의 명으로 처형된다.
○ 정순왕후 증오심 사도세자 죽음 몰아
정순왕후에게서 대군 왕자를 원했던 영조는 크게 실망했다. 정순왕후 역시 초조해졌다. 영조와의 사이에 잉태조차 못 해 본 왕후에게 10세 연상의 사도세자는 눈엣가시였고 그를 낳은 영빈 이씨 또한 원수보다 더 미워했다. 이 증오심이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진 단초다.
이때 조정 안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정국이었다. 노론·남인의 주도 속에 미약한 권력을 유지하던 소론 측이 사도세자를 앞세워 만회를 획책하면서 정국 혼란은 거듭됐다. 이를 미리 간파한 노론 측 김한구(정순왕후 아버지), 홍계희 등이 나경언을 사주해 사도세자 비행과 난행을 정순왕후한테 고해 바친 것이다. 사도세자의 그릇된 행실은 침소봉대돼 곧바로 영조 귀에 들어갔다.
진노한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가 억울함을 극간하며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부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끝내 세자가 자진을 거부하자 흥분한 영조가 뒤주 속에 가둔 뒤 대못을 쳐 굶겨 죽게 했다. 세자는 칠흑 같은 뒤주 속에서 아바마마를 목놓아 부르며 애원하다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누가 인생을 일러 육신 쓰고 나들이하는 긴 법계여행 중 잠시 쉬었다 가는 나그네라 했던가. 뒤주에서 꺼낸 세자 시신을 확인한 영조는 경악했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육신인데, 남도 아닌 내 자식을 이리도 참혹하게 죽이다니…. 내 안에 들어 있는 흉한 몰골의 또 다른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영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죽은 세자에게 사도(思悼)란 시호를 내리고 이 사건에 연루된 대소 신료들을 조정에서 축출했다. 이후로도 영조는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말년에는 정신마저 오락가락했다. 이 모든 역사의 현장에 11세 왕세손이 지켜보며 훗날을 벼르니 그가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대왕이다. 신료들에겐 구중궁궐의 처마 끝에 걸린 시뻘건 적란운이 비할 데 없이 심란하게 다가왔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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