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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 소장된 영조대왕 어진.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 소생으로 52년 재위 기간 동안
놀라운 치적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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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번지 동구릉 내에 있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무덤인 원릉의 모습. 우여곡절 끝에 계비 정순왕후와 쌍분으로 예장됐다. |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英祖)대왕이 52년 동안 용상에 있다가 83세로 안가(晏駕)하자 조정 대신들은 이 세월도 짧다고 대성통곡하며 애책(哀冊)을 지어 올렸다. 오늘날의 애도사에 해당하는 애책은 당시 글 잘하는 대신들을 뽑아 짓도록 했는데 전하는 그 내용이 천하 명문이다.
“아, 대왕의 목소리와 모습은 점점 멀어져 따를 수가 없사온데 저 하늘의 흰 구름을 일러 어디로 가는지를 탄식하옵니다. 어찌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 이를 가히 잊게 되오리까. 산에 걸친 구름 띠도 처참함이여 오랜 흐림을 맺고 이슬도 깊이 흐느껴 욺이여 이른 아침의 서리로 응고되었나이다. 오, 슬프고 애통하옵니다.”
영조(1694∼1776)의 애책 중에는 대왕의 말년 건강상태를 표현한 글귀도 있어 관심을 끈다.
“오래 사시면서도 기무(起舞·일어나 춤을 춤)하는 듯 분주하셨는데 태배( 背·노인의 등에 나는 복 무늬)와 아치(兒齒·노인의 이가 빠지고 새로운 이가 나는 것)가 풀잎처럼 시들어 가심이 참으로 통한스럽사옵니다.”
○ 무수리 출신 소생 탓 험난했던 유년기
의술이 발달한 근자에도 80세를 넘기면 장수한다고 여기는데 조선 중기 83년을 살았다면 ‘산 귀신’으로 추앙받을 때다. 역대 조선 임금의 평균 수명이 47세임을 감안하면 가히 천수를 누리고도 남음이다. 희수(喜壽·77세)를 넘기면서는 노치(齒)가 빠진 뒤 새로 이가 나고 없었던 등 무늬까지 생겼다. 31세에 등극한 영조의 재위기간(1725~1776) 동안 태어나 벼슬하고 세상 떠난 신료들도 부지기수였다.
영조의 83년 생애를 반추하면 기구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우선 출생 배경부터가 천출(賤出)로 생모(숙빈 최씨)가 비천하기 짝이 없는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 떠다 바치는 종) 출신이었다. 이게 한이었던 영조는 훗날 왕위에 올라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고 서자를 관리로 등용시켰지만 끝내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하지는 못했다.
성장하면서도 도처가 목숨을 노리는 함정이었다. 이복형 경종의 생모 장희빈이 왕재로 성장하는 영조를 시기 질투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형왕(兄王) 경종의 후사가 없어 왕세제로 봉해진 이후 목숨을 노리는 역모 사건들이 노골적으로 구체화됐다. 경종을 등에 업은 소론과 영조 편에 선 노론과의 당쟁으로 영조의 운명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았다. 비록 병약한 형왕일지라도 소론 측 농간에 의한 어명 한 마디면 누군들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싸움을 먼저 청한 건 노론 측이었다.
경종 1년(1721) 노론 측 이정소가 금상의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후계자를 먼저 정할 것을 주청했다. 효종→현종→숙종의 삼종(三宗) 혈통은 오직 연잉군뿐이라며 대비 김씨(숙종 제2계비 인원왕후)를 통해 설득하자 경종도 하는 수 없이 따랐다. 대세에 밀린 소론은 분노를 삭이며 설욕할 날만을 기다렸다. 내친 김에 노론은 확고한 조정 장악을 위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자고 앙청했다. 경종이 비망록을 통해 슬그머니 윤허해 버리자 이를 뒤늦게 안 소론 측이 역모로 몰아가며 연잉군을 압박하자 명분에 밀린 노론 측도 손을 들어 버렸다.
고립무원의 절체절명 위기에 몰린 연잉군이 인원왕후를 찾아가 결백을 주장하며 왕세제 자리를 내놓겠다고 애원했다. 평소 노론 측 입장에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대비 김씨도 정국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해 연잉군 사정까지 담은 언문교지를 수차례 내려 소론 측 반발을 무마했다.
○ 역모사건 몰리자 인원왕후 찾아 하소연
이후 왕세제는 경종에게 문안 가는 것조차 차단됐고 임인옥안(壬寅獄案·옥사와 관련된 문초안)에도 연잉군의 혐의 기록이 함께 남아 있다.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의 이 모역 사건에 연잉군의 가담 여부는 아직까지도 미궁 속이다. 이 사건으로 노론 측 대신 60여 명이 처형당하고 170여 명은 유배 가거나 치죄됐다.
삼수역 모반사건으로 정국 주도권을 잡은 소론 측은 연잉군이 평소 조회 보러 다니는 청휘문을 막고 살해할 음모까지 꾸몄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30이 넘은 왕세제는 왕자로 태어난 운명을 원망했고 이 지경에 이르면서까지 임금 자리에 올라야 하는가를 고뇌했다. 지지기반이던 노론이 몰락하고 신변위협까지 조여오자 극도로 몸을 사린 채 경종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경종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재위 4년 만에 금상이 승하하자 이번에는 백성들이 연잉군을 의심했다. 왕세제가 형왕 경종의 탕약 제조에 깊이 개입했다는 의혹이었다.
경종 3년(1723) 임금의 병환이 심할 때 약원도제조 이광좌(1674~1740)가 당시 명의로 이름 높던 이공윤을 주부(主簿)로 임명했다. 이공윤은 날마다 독한 약만을 지어 올려 경종의 병이 더욱 악화됐다. 연잉군이 이 사실을 알고 이공윤에게 타일렀다. “진원(眞元·경종)이 날로 위독해지는데 속히 원기 회양탕(回陽湯)을 지어 올려 소생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이광좌와 이공윤이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좀 더 두고 보시면 나을 것입니다.”
○ 노론·소론 골고루 등용 권력분산 실현
이들은 끝내 회양탕을 쓰지 않았고 1년도 안 돼 경종은 약독이 올라 탈진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며칠 후 왕세제는 인정전에서 임금으로 등극했다. 그 후 이광좌는 영의정으로까지 기용됐다. 천신만고 끝에 군왕이 된 영조는 왕위에 오르던 날 인정전 뜰에서 기막힌 꼴을 당했다. 영조 즉위를 비웃는 부도한 비방이 난무했고 보록(寶 ·옥새를 넣는 작은 상자)을 뜰 모퉁이에 메쳐 나뒹구는 소리가 어좌까지 들렸던 것이다. 대궐 내 환관과 궁인들 중 경종(소론)의 잔존세력이 만만찮았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영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참았다.
등극 과정이야 어떻든 일단 보위에 오르고 나면 천하가 임금의 것이다. 권신들은 또다시 새 군왕을 향해 숙배하고 복명을 좇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이제 죽음과 몰락의 길은 소론 측 몫이었다. 예상대로 신임사화에 연루된 수괴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노론 정권이 들어섰다. 영조가 재위하는 동안 정권교체가 없을 것 같은 노론 세력들의 등등한 기세였다. 그러나 영조는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도 영명하며 능수능란한 영주(英主)였다. 당쟁 피해로 목숨을 잃을 뻔한 과거를 거울삼아 오히려 당쟁을 국정운영에 활용했다.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노론과 소론을 고루 등용해 권력을 분산시켰다. 중신들끼리 싸움을 조장해 콧대 높은 권신들의 기를 꺾은 이른바 탕평책이다.
평소 과격하고 성급했던 영조대왕 재위 52년 동안 조정과 백성들은 무소불위 권력에 눌려 옴짝달싹 못했다. 하해 같은 성은에 감격하는가 하면 강상이 무너지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중흥 기틀을 마련한 놀라운 치적 또한 실로 방대하다. 원릉(元陵)에 얽힌 곡절 많은 풍수비화, 66세 영조가 52세 연하의 계비 정순왕후를 맞아 야기된 왕실의 분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이는 복잡한 당쟁 구도 등은 다음 호로 이어진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