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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6>숙종 원비 인경왕후 익릉

惟石정순삼 2010. 8. 1. 01:3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6>숙종 원비 인경왕후 익릉

  20세로 요절한 인경왕후의 능.

인현왕후·인원왕후와 함께 예장된 숙종의 명릉과 별도 산록이어서 익릉이란 능호를 갖고 있다.

 

익릉 서쪽에 있는 장희빈 묘. 268년 만에 이장됐으며 온갖 실덕으로 사사됐다.
 관 뚜껑을 덮고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일생을 논할 수 있다고 했다. 사적 제198호로 지정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에 가면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대왕(1661~1720)과 숙종 왕비들의 능이 있다. 역대 임금 중 여성 편력이 남달랐으면서도 여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숙종의 인간적 고뇌와 여인들의 흥왕·몰락사가 고스란히 멈춰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듯이 남자에게 여자가 많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숙종은 3왕비, 1폐왕비, 7후궁을 뒀지만 46년 재위기간 동안 편할 날이 거의 없었다. 수시로 변하는 왕심 탓도 있었지만 절대 권력자를 사이에 둔 여인들의 시기·질투·모함이 내명부 기둥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7세 때 왕세자로 책봉된 숙종이 11세 되던 해 인경(仁敬)왕후 김씨(1661~1680)를 만나 부부가 됐다. 둘은 동갑이었다. 대제학 김만기의 딸로 사계 김장생의 고손녀였던 김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자 할머니 인선왕후(효종왕비 장씨)는 크게 기뻐했다.

○ 천연두 걸린 인경왕후 20세에 요절

 “광산 김씨 김공(김장생)은 일찍이 나의 선고(先考) 문충공(장유) 스승인데 지금 나와 그 손녀가 왕실 며느리가 됐으니 이 얼마나 기이한 경사인고. 실로 무량한 복이로다.”

 현대에 와서는 천연두(마마)가 박멸돼 법정 전염병에서도 퇴출됐지만 예전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중병이었다. 민가에서는 ‘손님이 지나가야 사람 노릇한다’면서 두창을 앓고 난 뒤 호적에 입적시키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천연두를 거르고 왕비(숙종 1년)로 책봉된 김씨가 늘 근심이었는데 우려가 현실로 닥쳐왔다.

 숙종 6년(1680) 천연두에 걸린 인경왕후가 출산을 하던 중 홀연히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보령 20세의 애절한 청춘이었다. 첫 정을 흠뻑 쏟았던 숙종이 서오릉 안에 장사 지내며 ‘사려가 심원하다’는 뜻의 익릉(翼陵)이란 능호를 내렸다. 영중추부사 우암 송시열은 다음과 같은 명문장으로 인경왕후를 애도하며 통곡했다.

 “상천(上天)이 인덕을 베풀지 아니해 갑자기 왕후의 먼 여생을 막았구나. 이른바 신이란 존재는 진실로 밝히기가 어렵고 이(理)란 것 또한 추측할 길 없음이 이와 같도다.”

 왕후장상도 죽어지면 잊혀지고 수밀도(水蜜桃)같이 달콤한 천 년 약속도 눈에서 멀어지면 그만인 법. 숙종은 상처의 아픔을 얼른 잊고 이듬해 인현(仁顯)왕후 여흥 민씨(1667~1701)를 제1계비로 맞았다. 서인의 중추세력이었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6살 연하였다. 역대 내명부 가운데 가장 현덕한 왕비로 존숭받고 있으나 더없이 불행했던 여인이다.

 왕실 내 비극은 인현왕후의 ‘무자식 팔자’와 숙종의 끊임없는 ‘바람기’가 단초였다. 왕권을 장악한 절대 군주 앞에 세기의 요화(妖花)가 눈에 띈 것이다. 미모와 간교로 종4품 숙원 자리에서 일약 왕비까지 오른 희빈(禧嬪) 옥산 장씨(1659~1701)다. 역관 장형의 딸로 전해 오지만 장희빈 생모의 정부였던 조사석(인조계비 장렬왕후 조씨 동생) 딸로 더 알려져 있다. 장씨는 조사석과 종친 동평군 주선으로 어릴 적 궁에 들어갔다.

○ 숙종의 `女難' 왕실 내 비극 시작

 숙종은 장희빈이 아들까지 낳자 더욱 깊은 미혹에 빠져들었다. 착한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씨를 왕비로 진봉하는 과정에서 아까운 대신들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이 와중에도 숙종은 숙빈 최씨(영조 생모), 명빈 박씨, 귀인 김씨, 영빈 이씨, 소의 유씨와 직첩을 받지 못한 이씨·박씨 등 7후궁을 둬 모두 3남을 얻었다.

 무심한 세월이 흐른 뒤 장희빈의 해괴한 실행과 눈 먼 행악이 숙종에게 발각됐다.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은 것이 들통 난 것이다. 숙종은 한때 세상을 다 줄듯이 아끼며 사랑했던 여인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눈이 뒤집힌 장씨가 순순히 받을 리 없었다.

 “전하, 죽기 전에 세자를 한 번만이라도 가까이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어 가는 사람 소원 못 들어줄 게 무엇이겠는가. 세자가 어명으로 장씨 품으로 다가갔다. 순간, 표호로 돌변한 장씨가 세자의 하초(下焦)를 훑어 버렸다. 세자는 기절했고 장씨는 억지로 따라 분 사약을 삼키고 절명하니 43세였다. 후일 왕위에 오른 세자(경종)는 원비 단의왕후와 계비 선의왕후를 뒀으나 끝내 후사를 잇지 못했다. 이 같은 왕실 비극은 숙종의 행장에 완곡한 표현으로 기록돼 있다. 자신이 낳은 차대 임금을 눈앞에 두고 생목숨 끊어야 하는 장희빈의 절통함이 어땠을까 싶다. 숙종이 지엄한 어명을 내렸다.

 “종사와 세자를 위해 부득이 희빈 장씨를 자진시키니 내 마음이 슬프오. 깊이 생각한 바 이 처분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소. 이후로는 국법으로 밝혀 빈으로 하여금 왕비에 오르지 못하게 하오.”

 장희빈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 지냈다가 죽은 지 268년이 지난 1969년 도로공사로 묘지가 수용되면서 서오릉 안 경릉(추존 덕종) 서록에 이장됐다. 불과 40여 년 전 일이다. 자좌오향의 정남향이긴 하나 명당·흉지를 운위할 자리조차 못된다. 그나마 타관객창에 홀로 버려져 있다가 남편의 명릉 가까이 묻힌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짐은 산 사람들의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서오릉 내 여러 왕릉 중 숙종과 그의 왕비릉을 답사하면서는 각별한 감회가 교차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한 평생을 참으로 잘 살아야 되겠다는 역사의 훈교(訓敎)가 그곳에 있다. 혹자는 살아생전 호의호식하고 일신영달을 누리면 그만이라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결코 그런 삶을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 숙종의 여인들 서오릉 한자리에 오롯이

 축좌미향(丑坐未向·서남향)의 익릉을 찾은 참배객들은 세 공주를 낳아 일찍 떠나보내고 자신마저 요절한 인경왕후 일생을 연상하며 측은지심을 내보인다. 스무 살에 세상 떠난 왕비에게 무슨 궤적이 있겠느냐 위로하며 그래도 익릉이란 능호 아래 단릉으로 존재함을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들이다.

 숙종은 제1계비 인현왕후와 쌍분으로 예장된 뒤 능호를 명릉이라 했다. 원비 인경왕후가 있었으나 생전 지지리도 속 썩인 인현왕후 옆에 묻히고자 한 왕의 유명에 따른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서나마 남편 곁에 묻혀 다행이라며 왕후의 덕을 기리고 못 잊어 한다.

 숙종릉 왼쪽에 있는 제2계비 인원(仁元)왕후 경주 김씨(1687~1757)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숙종보다 27세나 아래였다. 좌상우하(左上右下)의 조선 왕릉 배치를 벗어나 능호에 대한 이론이 많다. 숙종과 한 능역에 있다 하여 명릉으로 함께 회자되는 걸 탐방객들은 아쉬워한다.

 ‘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 쓰인 대빈묘(大嬪墓)를 스치는 과객들마다 ‘저게 그 못된 장희빈 묘’라며 삿대질하고 눈을 흘긴다. 희빈 장씨 영혼이 이 현장을 목도한다면 어떤 회한을 풀어낼까. 장씨가 또 한번 인간으로 환생해 260여 년 전 그 인생길을 반복한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듯싶다.

 이처럼 익릉을 중심으로 숙종과 여인들에 얽힌 삶의 대조가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더불어 명문거족의 딸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어쩌다 후궁 신세가 돼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한숨이 서오릉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