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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4> 숙종대왕과 명릉

惟石정순삼 2010. 7. 31. 18:3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4> 숙종대왕과 명릉
두 개의 명릉 비각.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 비가 있고
오른쪽은 인원왕후 비다.

 어떤 사안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나 깊이를 포괄적으로 조감하지 못하면 쉽게 전달하기가 어렵다. 조선왕조를 통해 붕당 정쟁이 가장 격심했던 숙종시대를 조명하면서는 다양한 측면의 접근이 우선돼야 한다. 그 첫째가 걸출한 절대 군주였던 숙종(肅宗)의 성장 과정과 성격 파악이다.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대왕의 46년 재위기간(1674~1720)을 동행하며 조정에 출사한 대신들은 마음 편히 산 날이 거의 없었다. 언제 다시 금상의 마음이 변해 유배당하거나 사약받을지 몰라 좌불안석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주상 자신도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자괴(自愧)했을까.

 “나의 결점을 점검해 보면 희로(喜)가 정도를 잃어 언로가 열리지 않았소. 시행하는 것조차 마땅함을 잃어 은혜가 고루 미치지 못한 것 같소이다. 마땅히 널리 직언을 구할 것이오.”

 숙종은 이렇게 어명을 내려놓고 자신의 속내와 다른 치도(治道)를 제시하거나 상반된 주장을 전개하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무자비하게 징벌했다. 어떤 파당의 권력집단에도 결코 왕심을 내려놓지 않아 숙종시대에 벼슬하며 파직이나 유배 안 다녀온 고관대작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숙종의 심기를 오판해 목숨을 잃은 뒤 불과 수년 후 신원된 대신들도 부지기수다. 심지어는 스승(송시열)까지 사사시키고 복작시키면서 후회하기도 했다. 임금은 이런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칠정(七情) 가운데 가장 쉽게 나오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노(怒)인데 나의 병통이 이 속에 있소. 지난 일을 상고해 보면 일시 분을 참지 못해 전에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소. 이것은 나의 함양(涵養)한 공부가 미진하여 그렇게 된 것이오. 돌이켜 반성해 보니 부끄러움만 가득할 뿐이외다.”

 그러나 이 병통으로 아까운 국가 동량들은 줄줄이 황천길로 향했다. 왕이야 마음을 바꿔 심기일전하면 그만이지만 횡액을 당한 신하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이었다.

500년 사직의 왕조 통치가 하반기로 접어들며 숙종시대가 끼친 후기 조선사회의 영향은 실로 막중하다.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숙종(1661~1720)은 출생 배경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할아버지(효종) 태몽에 나타나 왕실을 흥분시킨 것이다. 명성왕후 침실에 이불로 덮인 것이 있어 열어보니 살아 있는 용이었다. 효종은 원손을 얻을 길조라며 미리 ‘용상(龍祥)’이라 아명을 지어 뒀다.

 현종은 7세 때 책봉한 왕세자를 송시열·송준길·김좌명·김수항 등 당대 최고 석학들을 보양관(輔養官)으로 선발한 뒤 성리학에 입각한 왕도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던 숙종은 훌륭한 스승들을 정중히 예우하며 놀라운 탁견들만 골라 지식의 보고를 채웠다. 부왕이 승하하며 14세로 등극한 어린 임금을 명성왕후가 수렴청정했으나 얼마 안 가 곧 거뒀다. 금상의 학문과 식견에 대적할 신하는 감히 없었던 것이다.

 숙종은 부왕 재위 15년간 예송싸움의 당쟁에 휘말려 왕권이 추락당하는 걸 목격하며 세자 시절을 보냈다. 등극하던 해(1674) 1월 할머니 인선왕후(효종 왕비)가 승하하고 8월에는 부왕마저 훙서하자 또 예송정쟁이 벌어졌다.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임금은 영명했다. 대신들 간 권력이 일방으로 독점되면 조정이 기울고 왕권마저 약화된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숙종은 현종의 유지에 따라 남인 측 주장대로 대공설을 지지해 서인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는 추후 어느 누구도 예송문제를 거론 못하도록 어명으로 봉쇄했다. 집권과 실각을 거듭하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한 권문 대신들은 또 다른 정쟁이 야기될 때마다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싸웠다. 이른바 환국(換局)으로 사초에 기록되는 치열한 붕당 싸움은 숙종 재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거듭되며 이때마다 당대의 숱한 명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무모한 대신들 간 권력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임금이었다. 왕심의 향배에 따라 조정 내 세력 판도는 출렁였고 왕에 대한 충성심은 갈수록 견고해졌다. 숙종은 이 같은 환국정치를 절묘하게 활용했다.

 숙종대왕은 재위기간이 긴 데다 왕조사에 획을 그을 만한 치적들도 뛰어나다. 3왕비, 1폐왕후, 7후궁을 거느리며 환난도 많았다. 특히 인현왕후를 서인 폐출시키고 희빈 장씨를 중전 자리에 앉히며 파생된 일련의 환국사태와 참혹한 옥사는 숙종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며 구중궁궐을 피로 물들였다. 난마같이 얽힌 당시의 시대상과 비화들은 다음호로 이어진다.

숙종대왕과 인현왕후의 쌍릉. 인원왕후는 별도로 예장돼 동원이강릉 형식이나
능호는 명릉이라는 한 이름이다.

 숙종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풍수에 달통해 신풍으로 추앙받으며 그에 관한 설화도 무수하다. 당시 왕실이나 사대부가의 필수 덕목이었던 풍수를 송시열·김수항 등 당대 최고 학자들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다.

 숙종은 신하들 간 당쟁으로 신권이 약화되자 왕실 내의 숙원 난제들을 속 시원히 매듭지었다. 폐위된 지 240년이 넘는 단종을 복위시켜 시호를 올리고 영녕전에 부묘했다. 당시까지 공정(恭靖)대왕이란 명나라 시호로 불리던 제2대 정종(定宗)대왕에게 묘호(廟號)를 추상하는가 하면 폐비 단경왕후(중종 원비)에게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또한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소현세자의 폐세자빈 강씨도 복위시켰다.

 숙종 38년(1712) 앙숙 간이었던 청나라와 담판을 지어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우고 현재의 국경으로 확정지었다. 영의정 이유(李濡)의 상소를 받아들여 북한산성을 개축해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확보했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서는 막부정권과 협상해 왜인들의 울릉도 출입금지와 귀속문제를 확정지었다.

 이토록 내치와 외치에 몰두하는 숙종에게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신하들이 술을 너무 과음해 몸이 상하는 일이었다. 전날 폭음으로 결장하는 관리들이 늘어나자 한탄하며 타일렀다.

 “나라를 망치고 몸을 상하게 하는 화가 여럿 있는데 그중 술독에 빠져 덕을 상실하는 것이 가장 심하오. 군신상하가 밤낮없이 노력해도 백성 구제가 어려운데 술을 마시며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는가.”

 숙종의 이런 행장(行狀) 속에서는 따뜻한 인간적 풍모를 느끼게도 된다. 임금 역시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을 지닌 인간이었음을 공감하는 편린이기도 하다. 숙종은 인경·인현·인원왕후의 세 정비를 통해 왕자를 얻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희빈을 통해 낳은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영조가 후사를 잇는 과정에서 왕실은 또 망가지고 무고한 대신들이 세상을 떠난다.

 애증의 감정 노출이 심했던 숙종이 안질과 각기병으로 재위 46년 9개월 16일 만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붕어하니 보산 60세였다. 숙종릉은 먼저 승하한 인현왕후(제1계비) 옆에 미리 정하고 쌍릉으로 예장한 뒤 명릉(明陵·갑좌경향)이라 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사적 제198호) 옆 별도 능역에 있으며 인원왕후(제2계비·을좌신향) 능도 함께 있다. 동원이강릉 형식이나 능호는 명릉이라는 한 이름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