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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5>숙종대왕과 명릉<下>

惟石정순삼 2010. 8. 1. 01:0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5>숙종대왕과 명릉<下>

제2계비 인원왕후릉에서 바라본 숙종대왕과 인현왕후의 쌍릉.

동원쌍봉의 이강릉이어서 왕릉 형식을 놓고 논란이 많다.

 

 

숙종대왕릉 뒤에서 바라본 명릉의 물형 산세. 신풍 숙종이 택지한 곳으로 명당의 길격을 고루 갖췄다.
 우리의 옛 선비들에게 명분과 신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송시열·윤휴·이원정·허적·김수항·박태보…. 모두가 숙종대왕이 수족처럼 아끼며 존중하던 명신들로 붕당싸움이 가장 극렬했던 당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역대 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왕의 행장기에 숙종은 ‘여간해선 웃지 않는 신중하고도 엄격한 군주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묘호(廟號)도 엄숙할 숙(肅) 자를 쓴 숙종이다. 숙종은 권력의 속성을 명경지수 보듯 관통하고 있었다. ‘왕은 아무나 될 수 없고 신하는 골라 등용하면 된다’는 만고 이래 통치역사를 일찍이 섭렵했다. 때로는 ‘입안의 혀’를 주저없이 절단했고 철석같이 굳은 맹세도 여반장처럼 파기했다. 임금과 신하들의 첫 번째 기(氣)싸움은 14세로 등극하던 해(1674) 시작됐다.

○ 역모 발각된 남인 권력 독식 마침표

 인선왕후(할머니)와 부왕 현종의 훙서로 숙종의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벌인 서인과 남인 간의 이념싸움이었다. 숙종은 스승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들을 몰아내고 외척들이 가담한 남인 편에 왕심을 실어 서인 정권을 거세했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겨우 조정을 장악한 남인 세력들은 서인들의 처벌 수위를 두고 다시 강·온파로 양분됐다.

 남인의 권력 독식은 7년을 넘기지 못했다. 숙종 6년(1680) 남인의 허견 등이 인평대군(인조의 3남) 셋째 아들 복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역모가 발각된 것이다. 이른바 ‘삼복(三福)의 변’이다. 20세가 된 숙종은 발작에 가깝도록 격노했다. 남인들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고 내쳤던 서인들을 조정으로 복귀시키니 이것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사건’이다.

○ 신하 이념투쟁 왕 결심따라 생사 갈려

 경신년에 진압된 이 모반 사건으로 숙종은 더욱 치밀해지고 영악해졌다. 누구도 믿지 않고 대신들 간 권력 분산만이 왕권 강화책임을 터득하게 됐다. 이 무렵 서인 세력이 또 분열됐다. 서인 측 김석주(숙종 외척)가 비열한 수법으로 남인 박멸을 기도하자 소장파들이 반발하며 노론과 소론으로 원수지간이 돼 버린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신하들 간의 이념투쟁은 왕의 결심 여하에 따라 생사 여탈권이 번복됐다. 금상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런 숙종에게도 태산 같은 근심이 있었으니 계비로 맞이한 인현왕후 여흥 민씨(1667~1701)에게서 대통을 이을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이 대궐 뜰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얼핏 절세미모의 젊은 여인이 눈앞을 스쳐갔다. 곁에 있는 제조(提調)상궁에게 하문했다.

 “방금 지나친 아이가 뉘인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나인 장씨이옵니다.”
 “속히 가까이 오도록 이르라.”

 장씨가 금상 앞에 부복했다. 과연 나라를 기울게 하고도 남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이날 밤 장씨는 하늘 같은 임금의 승은을 입고 타고난 자태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숙원(종4품)이 된 지 얼마 안 돼 6품을 건너뛴 소의(정2품)로 승격되자 장씨의 기고만장은 내명부를 덮고도 남았다. 이럴수록 인현왕후는 위축됐고 숙종의 발길도 뜸해졌다.

 경사는 겹친다 했다. 장 소의가 아들(후일 경종)마저 낳으니 왕실의 환대는 말할 것 없고 숙종의 기쁨 또한 절정에 달했다. 금상의 변덕이 다시 발동했다. 소생 없는 인현왕후를 폐서인시켜 궁에서 내쫓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킨 뒤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번에는 서인 송시열이 죽어도 안 된다고 숙종과 대치했다.

 숙종은 송시열을 사사시키고 차제에 서인 세력을 몰락시켜 버렸다. 명분을 내세운 스승의 항거였지만 인현왕후 아버지(민유중)가 서인의 중추 세력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조정 권력은 다시 남인들 손에 넘어갔고 기사년에 있은 정변이어서 기사환국(己巳換局·1689)으로 부른다.

○  女難 끊이지 않던 숙종 장희빈에 사약

 숙종은 살다 보니 장희빈도 싫어졌다. 이미 숙빈 최씨(제1후궁)에게 정을 쏟아 왕자(후일 영조)까지 탄출했다. 또 다른 여섯 후궁들과 지내다 보니 어질고 현덕한 인현왕후가 새삼 그리워졌다. 이때 마침 서인의 김춘택·한중혁 등이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서인 세력을 원천 제거하려던 남인들이 관련자를 하옥하고 심문한 뒤 숙종에게 사후보고했다. 임금 의중을 잘못 읽은 것이다.

 숙종은 진노해 남인들을 축출하고 또다시 서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사가에 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켜 한 궁궐 안에서 살도록 했다. 이 해가 갑술년(1694)이어서 사서에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난히도 여난(女難)이 많았던 숙종의 여인들에 관해서는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칠 줄 몰랐고 왕실의 먹장구름은 걷힐 날이 없었다. 복위된 뒤 시름시름 앓던 인현왕후가 숙종 27년(1701) 35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한 것이다. 이 모든 불행이 장희빈의 모함과 악행에서 비롯된 것임을 뒤늦게 안 숙종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분기탱천한 것이다.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만들어 놓고 무녀를 불러 굿을 했는데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죽기만을 빈 것이 탄로난 것이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토록 명을 내렸으나 거부하고 사약을 내려도 먹지 않자 억지로 입에 부어 절명토록 했다. 차기 왕위를 이을 세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 소론 세력은 왕세자(경종)를 옹호했고 노론 측은 숙빈 아들(영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무당으로 인한 변고여서 ‘무고의 변’으로 불린다.

 이후로도 조정은 오례(誤禮)문제, 고묘(告廟)논란, 임술삼고변, 회니(懷尼)시비, 북벌론의 허실논쟁 등으로 환국이 거듭되고 옥사가 그칠 줄 몰랐다. 이럴 때마다 숙종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用捨出陟權)을 유감없이 발휘해 신권을 제압했다. 후일의 사가들은 신료들 간 붕당정치 하에서 손상됐던 왕권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보인 명군(明君)으로 기록하고 있다.

○  왕권 안정되자 놀라운 통치력 발휘

 대신들 간 이전투구로 오히려 왕권이 안정되자 숙종의 통치력은 놀랍게 펼쳐졌다. 선조 말 이래 숙원사업이던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토지개혁을 종결짓는가 하면 상평통보를 주조해 중앙관청 및 지방관아 등에 통용시켰다. 왕실족보인 선원록을 간행하고 신증 동국여지승람, 대명집례, 대전속록 등을 간행해 문물 정비에도 기여했다. 재위 기간 중 쟁쟁한 학자들을 대거 배출시켜 조선 후기 성리학 전성기를 이루게 함도 숙종의 큰 치적으로 꼽히고 있다. 명나라 인적(印跡)을 본떠 옥새를 만든 뒤 청국옥새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건강 악화로 몇 차례 위기를 넘긴 숙종은 환후가 위독해지자 고명대신 이이명을 불러 연잉군(영조)을 경종 후계자로 삼아줄 것을 유언하고 붕어했다. 그러나 사관의 입회 없이 내린 이 유명이 후일 유혈이 낭자한 신임사화의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풍이었던 숙종은 뒤늦게 아꼈던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친림하여 명당자리를 잡고 바로 그 옆에 자신의 현궁(玄宮) 터를 소점해 놓았다. 금상의 불찰로 원통하게 일생을 마친 인현왕후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