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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으로 예장된 현종대왕과 명성왕후의 숭릉. 동구릉 안 서쪽에 자리하며
능상에서 정자각이 안 보이는 조선의 유일한 왕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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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의 산신석. 임금이 신보다 높은 상격이어서 왕릉의 산신석은 능침 아래에 있다.
| 주어진 한평생을 살면서 까닭 없이 고단한 팔자가 있다. 조선의 제18대 임금 현종 대왕같이 힘겨운 일생이라면 왕이라 한들 선뜻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어명 한 마디면 산천초목이 벌벌 떨 것 같은 군왕 자리, 현종(顯宗)에겐 그게 아니었다.
현종(1641~1674)은 출생 배경부터 슬프다. 아버지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 가 심양에 억류돼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국적이 청나라인 조선의 유일한 임금이다. 어휘(御諱·왕 이름)가 연( )으로 탄생 당시만 해도 연이 조선의 군왕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서열이었다. 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큰아버지)와 그의 세 아들(사촌)이 있었고, 봉림대군은 인조(할아버지)의 둘째 왕자였다.
왕의 손자였던 연이 성장과정을 통해 겪은 청나라에서의 고초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여진족(만주족)의 누비옷으로 혹한을 이겨내고 어머니(인선왕후) 품에 안겨 아버지(효종 대왕)와 명의 전투 현장을 누비기도 했다. 오늘은 북간도 벌판을, 내일은 몽골 사막을 가르는 야생마와 다를 바 없는 유년 시절이었다.
○인조, 자신 몰라보는 손자 붙들고 눈물
연이 조선으로 귀국해 인조를 처음 알현한 건 네 살 때다. 봉림대군이 북경으로 들어가며 외아들 연을 먼저 귀국시킨 것이다. 인조는 할아버지를 몰라보는 손자 연을 가슴에 품고 용상이 젖도록 낙루했다. 자신은 청에 굴복해 고두배를 하고, 세자는 청에 잡혀 가 청국 사람이 다 돼 돌아온 데다 손자까지 적국에서 태어나게 하다니…. 인조는 조손(祖孫) 3대의 기막힌 운명에 한없이 오열하며 치를 떨었다.
인조는 귀국한 소현세자가 청의 구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천주학에 빠져 전파 기미까지 보이자 까맣게 절망했다. 어전에서 감히 서구문명을 운위하며 설득하려 들자 벼루를 면상에 내리쳐 자칫 세자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때로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운으로 연결되는 비정한 세상이기도 하다. 부자간의 이 불화가 종래는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급사로 이어졌고 뜻밖에도 금상 자리는 봉림대군에게 돌아갔다.
효종은 등극하자마자 청국한테 원수를 갚겠다며 친청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친명파로 조정의 새 판을 짰다. 이 또한 부왕 인조에 이어 아시아 정세를 잘못 읽은 대 이은 오판이었다. 이 같은 효종의 북벌정책은 재위 10년 내내 변함없는 외골수 화두였다. 사람의 오기가 지나치고 한이 응어리지면 그것이 곧 병이다. 효종은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외아들 연에게 대통을 넘겨주고 눈을 감았다. 9세(인조 27년·1649) 때 세손으로 책봉되고 10년 만인 효종 10년(1659) 용상에 오르니 제18대 현종 대왕이다.
첨단 과학문명 시대를 사는 현대에도 가뭄과 수해는 누구도 통제 못하는 하늘의 재앙이다. 현종의 치세 15년은 흉년·재앙·가뭄·홍수·역질·기근 등으로 백성 모두가 이 땅에 태어난 걸 원망했던 시기다. 봄 가뭄에 싹조차 못 틔운 곡식이 때 아닌 가을 물난리를 만나 전답마저 쑥대밭되기가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조정 대신들은 국상 때마다 입어야 하는 자의대비(장렬왕후·인조 계비)의 복상 기간을 두고 목숨 건 정쟁을 일삼았다. 민생은 알 바가 아니었다. 현종이 금상으로 있는 15년 동안 그칠 날이 없었던 예송논쟁의 골자를 알고 나면 허망하기까지 하다. 15세 어린 나이에 44세의 인조를 만난 자의대비가 인조와 사별하고 오래 살면서 파생된 불상사들이다.
○ 백성 굶어 죽어도 당파싸움은 더 치열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자의대비는 주자가례에 따른 장남 예우로 3년 복상을 치렀다. 문제는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훙서 때였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송시열·송준길)들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인(허목·윤휴) 세력들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용상에 올랐으므로 3년 상이 마땅하다고 맞섰다.
이때 현종이 서인 측 상소를 받아들이자 남인 측은 파직되고 유배지로 쫓겨 갔다. 앙갚음을 벼르며 권토중래를 노리던 남인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현종 15년(1674) 자의대비 며느리이자 현종 모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한 것이다. 이른바 제2차 예송싸움이다. 서인 측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이므로 자의대비 복상 기간이 9개월(대공설)이어야 한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남인 측은 왕비 자리에 있었으므로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버텼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정 권력 판도에 변수가 생겼다. 서인 세력이었던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남인 측에 가담한 것이다. 예상대로 현종이 남인 상소를 수용하자 이번에는 서인들이 몰락했다.
○ 심성 어진 현종 당쟁때마다 괴로워해
심성이 어질고 우유부단했던 현종은 이토록 극심한 당쟁에 휘말릴 때마다 심히 괴로워했다. 전국 도처의 지방 관리들은 기근으로 아사한 천민들을 매장하느라 업무조차 마비될 지경이었다. 현종은 대신들한테 각혈할 것 같은 심정으로 옥음을 내렸다.
“백성이 굶어 죽어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슬프고 딱하여 밥이 넘어가질 않소. 차라리 빨리 죽어 조금이나마 민생의 곤췌(困 )에 보답하고 싶소이다. 양민들 곤궁을 생각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구려.”
이날 대궐 안은 몸 둘 바 모르는 대신들의 통곡소리가 진동했으나 가식이었다. 이튿날부터 예송정쟁은 계속됐고 급기야는 지방 유림으로까지 확대돼 이 시대를 두 동강 냈다. 결국 이 싸움은 현종이 예척(승하)한 후 아들 숙종의 추상 같은 어명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현종 재위 기간은 뜻밖에 북방이나 왜구의 외침이 없어 평온했던 때다. 임금과 신하가 일심동체로 종묘 사직을 위해 전념했더라면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누렸을 시기다. 일과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복상 기간 문제를 권력 향배와 연루시켜 한 시대를 냉동시켜 버렸다. 능력 있는 군주로 추앙받을 수 있는 당저를 무력한 임금으로 이 시대 정객들이 추락시켜 놓았다.
현종은 청국의 유년 시절 영양 부족으로 몸이 허약한 데다 평생을 악성 안질에 시달렸다. 온양온천의 행궁에 자주 들러 심신을 요양하는 일이 잦았다. 부왕의 북벌계획이 실효성 없다고 판단되자 즉각 중단하고 대신 훈련 별대를 창설해 군비를 증강했다. 동철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해 문화부흥을 꾀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하늘의 재앙과 예송논쟁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멜 등 네덜란드인 8명이 제주도에 14년간 억류됐다가 탈출해 ‘하멜표류기’를 쓴 것도 이즈음이다.
때 아닌 풍수논쟁으로 멀쩡한 영릉(효종릉)을 여주로 천장하는가 하면 비구니 사찰을 헐어 여승들을 환속시키기도 했다. 폐묘됐던 신덕고황후 강씨(태조고황제 계비)를 종묘에 부제( 祭)해 정릉에 제사 지내는 날에는 ‘세원지우(洗寃之雨·원을 씻는 비)’가 내리기도 했다.
19세에 등극한 효종이 15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병고를 못 이겨 붕어하니 보령 34세였다. 동구릉 내 유좌묘향(정동향)의 서쪽 용맥에 명성왕후와 쌍릉으로 예장한 후 능호를 올리니 숭릉(崇陵)이다. 일반 출입이 통제된 비공개 능이며 능상에서 정자각이 보이지 않는 조선 왕릉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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