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운무에 휩싸여 있는 장렬왕후의 휘릉. 인조 계비로 본의 아닌 예송(禮訟)문제에 휘말려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
![]() |
왕권의 상징인 휘릉 앞 상설들. 용맥이 급해 다른 능보다 촘촘히 세웠다.
|
건원릉 서쪽으로는 휘릉(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경릉(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원릉(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혜릉(제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 숭릉(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이 별개의 내룡맥을 타고 안장돼 있다. 서울에 있는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아홉 기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동구릉에는 모두 17위(位)의 왕과 왕비가 있으나 능호는 아홉 개만 사용하고 있다.
임금은 단릉(單陵)으로 있어도 능호가 올려지나 왕비는 왕과 함께 합폄되거나 곁에 묻히면 별도의 능호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릉 중에는 군왕 못지않은 치열한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주상 근처에 묻혀 남편 능호를 받은 왕비 능이 여럿 있다. 정희왕후(제7대 세조 왕비)의 광릉과 정현왕후(제9대 성종 계비)의 선릉이 대표적이다. 반면 금상을 두고 앞서 요절하거나 대행(大行·임금이 승하한 뒤 시호를 올리기 전 칭호)보다 오래 살아 단릉으로 존봉된 왕릉도 적지 않다. 장순왕후(제8대 예종 원비)의 공릉과 공혜왕후(제9대 성종 원비)의 순릉이 여기에 해당된다.
○ 인조, 29세 어린 장렬왕후 맞아
인조는 원비 인렬(仁烈)왕후 한씨(1594~1635)가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의 세 왕자를 남기고 다섯째 왕자(넷째도 조졸)를 출산하다 훙서하자 몹시 허망해했다. 후궁 귀인 조씨 사이에 2남(숭선군·낙선군) 1녀(효명옹주)를 뒀지만 정이 없었고, 42세로 떠난 원비를 못 잊어 했다. 3년 뒤인 인조 16년(1638) 한원부원군 조창원(양주 조씨) 딸을 계비로 맞으니 자의(慈懿)대비로 유명한 장렬(莊烈)왕후(1624~1688)다. 이때 장렬왕후 나이 15세로 44세의 인조와는 29세 차이였으며 큰아들 소현세자보다도 13세나 어렸다.
열다섯의 어린 소녀가 층층시하의 구중궁궐에 들어와 무엇을 알았겠는가. 그래도 내명부에선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 어른이었다. 인조는 꽃보다 더 곱고 양순한 나이 어린 계비를 끔찍이 아꼈다. 이괄의 난, 정묘·병자년의 양대 호란 등을 겪으며 황량하게 살다간 인렬왕후와는 비교될 수 없는 대조적인 삶이었다.
장렬왕후는 인조→효종→현종→숙종의 네 왕대에 걸쳐 65년을 재세하며 줄곧 왕실의 큰 어른으로 자리했다. 성정이 안온해 내명부 간 마찰이 적었고 정사에 관한 무관심으로 금상들로부터 섬김을 받았다. 흠결이라면 왕자를 탄출하지 못한 무육(無育)이었으나 이미 후사가 결정된 뒤여서 오히려 조정은 안정 기조에 들었다. 그러나 이렇듯 평범한 일생을 살다간 장렬왕후가 역사의 지평에 던진 화두는 태산보다도 장중하다. 장렬왕후는 왕실 국상을 당할 때마다 대신들 간 이념 대결의 정점 인물로 부각됐다. 왕후가 입어야 하는 복상(服喪) 기간을 두고 이전투구한 이른바 예송(禮訟) 문제가 그것이다.
상·장·제례 문화가 간편해지고 소홀해진 작금에 와서야 그때의 예송 논쟁이 한심할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는 항상 당시 시각으로 소급해 규찰해야 한다. 성리학 이념으로 지탱되던 조선 중기 사회에서 제의(祭儀)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상의 구별이 여기서 비롯됐고 자칫 법도에 어긋나기라도 했다간 금수 취급을 당하며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졌다. 사대부가(家)마저도 신분 고하에 따라 4대(고조) 혹은 3대(증조)까지의 봉사(奉祀)가 규범으로 정해졌다. 천민층은 조부(2대) 제향도 못 올리고 아버지 제사만 지내다가 고종 31년(1896) 갑오개혁 이후 비로소 백성 모두가 4대 봉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 복상기간 논쟁으로 조정 극심한 내홍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 논쟁은 당시 조정 내 권력 판도 향배와 맞물려 극심한 내홍으로 치달았다. 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거머쥔 서인(송시열·송준길)과 권토중래를 노리는 남인 간의 양보 없는 대결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이념 대결의 중심에 늘 임금이 있어 서인과 남인은 기사회생을 거듭했다. 패자는 추풍낙엽처럼 낙마하거나 실각해 유배지로 떠나야 했고 승자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바야흐로 병자호란이 끝나 청과 맺은 군신관계로 사회 안정도 되찾고 민심도 가라앉을 때다. 외환이 수그러들자 내우가 고개를 들고 나선 것이다.
소현세자가 죽자 장렬왕후는 ‘주자가례’에 따라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 3년 상을 치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조가 살아 있어 누구도 복상 문제에 끼어들지 못했다.
첫 번째 예송 논쟁은 효종이 승하하면서 불거졌다. 이때 장렬왕후는 이미 자의대비로 존봉된 뒤다. 서인들은 효종이 임금이긴 하지만 인조의 차남이므로 기년상(朞年喪·1년)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남인들은 효종이 차남이긴 하지만 대통을 이어 장남과 다름없으므로 3년 상을 치러야 한다고 정면 응수했다. 이때 용상에 앉은 현종(효종 아들)이 서인 측 주장을 채택해 남인은 실각하고 말았다.
두 번째 대결은 자의대비 며느리인 인선왕후(효종 왕비)가 훙서(현종 15년 1674)하면서 맞붙었다. 이번에도 명분은 동일하나 왕비(여자)여서 상복 기간이 짧아졌을 뿐이다. 서인 측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大功說)을 지내야 하고, 남인 측은 중전이었으니 큰며느리와 같으므로 1년(朞年說)의 상복 기간이 맞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의 왕심(王心)은 남인에게 쏠려 서인 세력이 위축됐다.
○ 숙종, 자신 부정한 송시열에 사약
마지막 싸움은 자의대비 손자인 현종이 승하하면서 송시열이 예송 문제를 다시 거론해 불붙었다. 내용이야 1·2차와 다를 바 없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복안이 깔려 있었다. 적통이지만 차남인 효종을 왕위 승계권에서 분리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셋째 아들에게 대통 승계권이 옮겨가는 것이다. 남인 측에서는 즉각 복상 문제를 빌미 삼아 역모를 도모하려는 획책이라고 몰아쳤다.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어린 임금 숙종은 이것이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내렸다. 이후로도 조정은 전국 지방·재야 유림들 간 예송 논쟁으로 장구한 세월을 허비했다. 좀 더 상세한 논쟁 핵심은 효종과 현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같은 당파 간 논쟁의 와중에서 일생을 살다 보니 자의대비가 드러낼 공·과는 이렇다 할 게 없다. 본의 아니게 남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정쟁불씨의 뇌관 역할만 해 온 생애였다. 무심한 세월이 흐른 숙종 14년(1688) 신병을 얻어 훙서하니 보령 예순다섯으로 계비로 입궐한 지 50년 만이었다.
장렬왕후가 붕어하자 조정에서는 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 내룡맥에 유좌묘향(酉坐卯向·정동향)으로 장사 지내고 능호를 휘릉(徽陵)으로 올렸다. 능지(誌)에 ‘규룡( 龍·뿔 없는 용)이 서리어 휘감긴 듯하고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앉은 듯하니 하늘이 아끼고 땅이 비장해 둔 자리’라고 기록한 명당이다. 다만 순전(능 앞 사초지)이 급한 단혈(短穴)인 것은 용맥이 솟구쳐 어쩔 수 없는 물형이다. 자식이 없어도 남이 조아리며 제사 지내는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특별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3>현종대왕과 숭릉 (0) | 2010.07.31 |
---|---|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2>효종대왕과 영릉 (0) | 2010.07.31 |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0>인조대왕과 파주 장릉<下> (0) | 2010.07.30 |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9>인조대왕과 파주 장릉<上> (0) | 2010.07.30 |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8> 추존 원종대왕과 장릉 (0) | 2010.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