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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성내 병사를 진두지휘하며 청군과 항전한 남한산성 수어장대.
45일간 버텼으나 끝내 굴복해 민족의 수모와 굴욕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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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 태종에게 고두배한 삼전도의 ‘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비’로도 불리며 천대 끝에 다시 세워졌다. | 무릇 한 국가를 책임진 군 통수권자의 판단과 명령은 무고한 인명의 생사와 직결될 때가 많다. 더구나 그것이 국운을 좌우하고 수많은 백성의 생존 여부와 연관되는 일이라면 더욱 심각해지고 만다. 반드시 거기에는 후일의 역사적 심판과 평가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고금이 다를 바 없다.
조선 중엽 제16대 인조대왕 재위 기간(1623~1649) 중 종묘와 사직을 이끌어 간 조정 대신들에 대한 사가들의 시선은 험악하다. 자파 이익과 대의명분이 무엇이기에 질곡 속에 연명하는 백성들을 도탄 속에 함몰시켰는지…. 이들은 국가 보위와 백성 안위는 뒷전이었고 자기 보신과 권력 유지만이 백사 우선이었다.
계획적인 쿠데타로 광해군 정권을 몰락시킨 인조반정 실세들이 내세운 반정 명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살제폐모(殺弟廢母 : 형·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모시킴)에 대한 공분이었고, 다음이 왕조 창업 이래 명(明)을 섬겨 온 신의에 대한 배반이었다. 왕위 계승과 얽힌 살제폐모 사건은 반정의 구실이 됐지만 명에 대한 군신 간 신의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외교문제였다.
○ 인조 등극 `명·청 등거리 외교' 깨져
후금(청)을 건국해 명을 위협하던 여진족(만주족)과는 광해군의 실리적인 명·청 간 등거리 외교 전략으로 살얼음판 같은 평화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서자 광해군을 조선 임금으로 인정 않는 명에 대한 광해군의 불만도 있었지만 위협적인 세력으로 발흥하는 청에 대한 무마책이기도 했다. 이 균형이 인조가 등극하면서 깨진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청이었다.
조정은 명과의 신의는 영세불변이라는 척화파(斥和派)와 명·청 간 중립 노선이 현실적이라는 주화파(主和派)로 양분됐다. 결국 반정(反正)세력의 척화파가 대세를 장악하며 노골적인 친명정책으로 기울자 후금이 쳐들어온 것이다. 동북아시아 세력 판도를 잘못 읽은 인조의 오판으로 민족의 수난과 비극이 또 닥쳐온 것이다.
‘형제의 의를 맺자’고 협박한 정묘호란(1627)과 ‘군신관계로 섬겨야 한다’는 병자호란(1636)의 두 전쟁에서 조선은 청에게 무참히 패했다. 특히 남한산성(국가사적 제57호)의 항전으로 기록되는 병자호란에서의 패배는 나라의 근간과 국기(國基)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임금과 대신들은 동지섣달 엄동설한 속에 45일 동안 산성 안에서 버티면서도 척화·주화파 간 사생결단을 멈추지 않았다. 종국엔 조선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고두배(叩頭拜)를 올리고 세자는 볼모로 잡혀 적국에 압송됐다. 이때 명은 내부사정이 급박해 원군을 파견하지 못했다.
○ 삼전도서 淸에 `군신의 예' 굴복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와 소현세자가 서문으로 나아가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표하고 굴복하니 이것이 삼전도 치욕이다. 이후 후금은 명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인조 22년(1644) 국호를 청으로 바꿔 중원대륙을 지배하게 됐다.
이들은 철군하며 온갖 만행과 분탕질을 쳤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고 척화파 대신들을 포로로 연행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무고한 조선 부녀자를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던 국가 경제는 대공황에 빠져 들었고 또다시 사회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문란해졌다. 청에서 귀국한 부녀자 수난과 가문의 붕괴가 새로 시작된 것이다. 생명보다 중시됐던 정절이 짓밟히고 심지어는 태중의 몸으로 돌아온 아녀자가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 해서 환향녀(還鄕女)로 불렀다. 짐승 보듯하며 사람 취급을 안 해 끝내 자결하거나 노비 또는 천민층으로 전락했다.
이 당시 행실이 바르지 못하거나 몸 파는 여자를 ‘화냥년’이라 불렀는데 환향녀의 비하칭이다. 비극은 왕실로도 이어졌다. 청나라 수도 심양에 잡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8년 만에 귀국하면서 조선 왕실은 감당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소현세자가 변해 있었던 것이다.
○ 소현세자 귀국 두 달만에 변시체로
애당초 청 태종은 친명파 인조를 폐위시키고 유배 중인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청에서는 음모를 바꿔 차기 왕위에 오를 소현세자(1612~1645)를 극진히 예우하며 새로운 서구 문명으로 세뇌시켰다. 그곳에서 천주교 선교사 샬 아담을 만나 천주교 경전을 익히고 천문 역산서(曆算書)와 번역서, 과학서적 등에도 조예를 쌓았다. 귀국하면서는 천주상까지 반입해 세자빈 강씨(동부승지 강석기 딸)와 천주교를 도입할 계획까지 수립했다.
시대를 앞서 가는 선각자가 속절없이 당하고 이른 봄에 일찍 나오는 새싹이 얼어죽는 것 또한 역사의 교훈이다. 인조는 격노했다. 골수에 맺힌 애비의 철천지한을 무시하고 청국 사람으로 변해 버린 소현세자는 이미 자식이 아니라 원수였다. 거기에다 세자는 청으로 다시 돌아가 명을 정벌하는 청군의 북경 전투에 참전해 명을 멸망시키고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2개월 만인 인조 23년 4월 23일 변시체로 발견됐다. 온 몸은 새카맣게 탔고 뱃속에서는 선혈이 쏟아졌다. 인조는 서둘러 아들 소현세자를 장시 지내고 고분고분한 둘째 왕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니 후일의 효종대왕이다. 왕실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1년 뒤 폐세자빈 강씨를 폐귀인 조씨와 함께 세자 독살 혐의로 사사시키고 세 손자를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이때 장손 경선군(13)과 차손 경완군(8)은 노복들의 치독(置毒)으로 죽었지만 인조는 이를 모른 체했다. 인조는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리며 조정 대신들을 향해 추상 같은 어명을 내렸다.
“오늘 일의 뜻은 인륜을 밝히고 후환을 막으려는 데 있소. 옛 말에 작은 것을 그르치면 큰 일을 어지럽힌다 하였기에 나도 실상 어쩔 수가 없었소.”
성리학에 반대되는 서학과 천주교에 빠져든 세자를 인조와 당시 조선사회는 용서치 않았다. 현재까지도 세자의 독살설은 미궁 속에 있지만 34세의 건장한 청년 세자를 돌연 급서케 한 사망 원인은 전후 사정으로 미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모두가 병자호란의 결과로 파생된 왕실과 백성들의 불행이었다.
이런 환란 속에서도 인조는 총융청과 수어청의 새 군영을 설치해 국경 방비에 주력했다. 양전제(量田制)를 통해서는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송시열·송준길·김육·김집 등 탁월한 학자들을 배출시켜 조선 후기로 이어지는 성리학 전성기를 마련했다.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가 표착하자 이를 환대하면서 서양 열강과 교섭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인조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청국 연호를 사용 안 하며 원수로 여겼다. 전국에 산재한 사대부가(家) 묘비를 살피다 보면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년’이란 표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이 사용했던 연호 ‘숭정’으로 황제가 죽은 지 몇 년 후라는 의미다. 인조의 수모와 한이 묘비에까지 새겨져 있는 역사의 실증이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고두배한 삼전도비는 매몰과 손괴를 거듭한 끝에 현재는 서울 송파구 잠실동 47번지 석촌호숫가에 있다. 정식 비명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사적 제101호다. 청의 요구로 인조 17년(1639) 강제 건립된 석비며, 당시 만주어와 몽골어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 자료가 되고도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