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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7>폐주 광해군 묘<下>

惟石정순삼 2010. 7. 30. 08:4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7>폐주 광해군 묘<下>

광해군 묘 뒤에서 본 안산.

사방이 가로막힌 산옥지형(山獄之形)으로 패자의 탄식이 교차되는 역사의 현장이다.

 

광해군이 유배지에 내려 서울 하늘을 바라봤을 월곶 나루터. 강화읍 월곶리 연미정 아래 있다.

 


 한여름 장맛비가 성가시게 내리던 어느 해 여름날.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과 한음(漢陰) 이덕형(1561∼1613)이 소찬에 박주를 기울이며 시국을 한탄했다. 오성 대감으로 유명한 백사가 한음 대감에게 운을 뗐다.

 “이보게 한음,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고 민심마저 흉흉해져 가니 조정이 심상찮소이다. 왕실에 적란운이 역력하오.”

 둘은 다섯 살 차이였으나 어릴 적부터 단짝으로 지내온 절친한 죽마고우 사이였다. 이항복은 권율(영의정 권철 아들) 장군 사위고 이덕형은 영의정 이산해 사위다. 두 대감 모두 난세의 광해군 시대를 재세하며 목민관(牧民官)으로 어질게 살다간 출중한 인물이다.

 “그렇소이다. 어이해서 간신배들은 뒷날을 두려워 않고 일신 영달에만 혈안인지 금상이 위태롭소이다. 얼마나 많은 피를 더 흘려야 할 것인지….”

 광해군이 재위한 15년 세월은 전후 복구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정면 대결로 혼조(昏朝)가 거듭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어부지리로 세자가 되고 나서 선조가 돌연 훙서하면서 등극한 광해군은 늘 임금 자리가 불안했다.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이 서자 인데다 차남이라며 현장 실사를 통보해 왔고, 동복형 임해군은 “동생한테 왕위를 도둑맞았다”며 노골적으로 비방하고 다녔다.

○ 재위 15년간 대북파들 국정 장악

 더욱 참을 수 없는 왕권 위협은 두 살된 영창대군을 왕으로 앉히겠다는 소북파(영의정 유영경) 세력들의 도전이었다. 광해군보다 10살 아래의 계비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지만 부왕의 정실부인이 낳은 대군 왕자여서 명분은 충분했다. 용상을 넘보는 세력은 또 있었다. 이복동생인 정원군(인빈 김씨 3남·인조의 생부로 추존 원종대왕)의 셋째 아들 능창군으로 그가 태어난 새문동 생가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대가들의 소문이 장안에 자자했다. 능창군은 어릴 적부터 총명 한데다 기상마저 비범했다.

 광해군에게는 열 명의 충신보다 한 명의 간신이 절실했다. 자신으로선 차마 어쩌지 못할 혈육들인 임해군·영창대군 ·능창군을 대역죄로 몰아 죽여 버리고 눈엣가시였던 계모 인목왕후까지 폐모시켜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킨 은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대북파(이이첨·정인홍) 세력들이었다. 광해군은 이들에게 결초보은했다.

재위 15년 동안 딴 세력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오직 이들에게만 국정을 전담토록 했다.

 자고로 친·인척과 측근들이 주군(主君)을 망쳐 왔다. 동시대를 산 고산 윤선도는 “의정부·사간원·승정원·홍문관·사헌부·이조를 맡은 위인들이 이이첨 심복 아닌 사람 없다”고 개탄했다. 이이첨은 미리 낸 문제를 자표(字標)로 맞추고 시권(試券)에 징표까지 해 네 아들 모두 장원급제시켰다. 길 가는 행인들도 이이첨을 보면 눈을 흘겼고 이이첨의 비위에 거슬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부자 형제지간에도 말을 삼갔다. 서얼 출신들은 벼슬길이 통하지 않는 사회제도에 분통을 터뜨렸고 팔도의 선비들은 과거를 조롱하며 학문을 포기했다.

○ 무너진 성벽·부서진 병기 보수 정비

 그래도 세월은 흘러갔다. 어진 백성은 세조 때의 인간 도륙 참상과 연산군 당시 패륜 무도를 엊그제 일처럼 기억하는 터였다. 그저 또 하나의 임금을 잘못 만났다고 자조하며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복구하고 포로로 잡힌 왜군 병사를 통해 조총 제조술을 습득하는 개가를 올렸다. 무너진 성벽과 부서진 병기를 보수 정비하고 군대 조직을 개편해 변방 침공에 철저히 대처토록 했다.

 무리한 토목공사였지만 창덕궁·경희궁·인경궁을 중건하고 무주 적상산성에 사고(史庫)도 새로 지었다. 난리통에 유실된 문헌자료들을 수집해 신 동국여지승람·동의보감·양금신보 등을 복간시키고 부왕이 결단 못 내린 오현(五賢) 선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의 문묘 배향도 과감히 단행했다. 오늘날 주민등록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호패 제도를 다시 실시해 인구 동태를 파악했고 각종 문화재 보수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광해군의 국제 외교술은 탁월했다. 비록 삼천리 강토를 처절하게 짓밟은 왜구였지만 그렇다고 영구 원수로도 못 지내는 게 이웃나라 사이다. 한동안 분노를 삭인 뒤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해 일본과 조약을 맺고 국교를 텄다. 명나라와는 나라를 구해 준 은공을 보답하며 군신관계를 유지했다.

○ 동북아 국제 정세 정확히 꽤뚫어

 이때 중원 대륙에서는 천지가 이동하는 엄청난 지각 변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조선 7년 전쟁의 대리전으로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한 명나라가 기진맥진하며 비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틈을 타 여진족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와 접전을 벌이니 후일의 청나라다. 국지전으로 전쟁을 일삼던 누루하치가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명으로 쳐들어갔다. 마땅히 명은 조선임금 광해군에게 원병을 요구했다.

 이 당시 광해군은 동북아 국제정세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명은 지는 해고 후금은 뜨는 해였다. 명의 원병 요청에 명분을 세워 주고 후금 비위를 안 건드리는 절묘한 등거리 외교만이 살 길이었다.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에게 1만3000 병력을 내주며 명을 돕되 후금과 원수지게 싸우지 말라고 밀령을 내렸다. 강홍립은 명과 후금의 운명을 가르는 부차(富車) 전투에서 명군이 불리해지자 얼른 후금에게 투항해 버렸다. 명의 노여움을 안 사고 후금의 침략도 모면한 섬광 같은 책략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국력을 회복 못한 명(1368∼1644)은 마지막 황제 의종(崇禎帝)이 자살하며 개국 277년 만에 멸망했고 곧이어 후금이 국호를 바꿔 청(淸)이라 했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는 몽골족의 원나라에 이어 여진족이 두 번째다. 남의 나라 전쟁에 잘못 파병했다가 망국의 길로 접어든 역사적 사례다.

 선인들은 항상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고 경책해 왔다. 광해군이 그러했다. 대북파의 15년 장기 집권으로 권력이 독점되면서 인재 등용에 형평성을 잃고 지나치게 많은 정적들이 양산됐다. 서궁에 유폐시켜 죽지 못해 연명하고 있던 인목왕후도 민심이반의 큰 요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명군 원병에 군사를 동원한 뒤 도성과 궁궐치안도 소홀하기 짝이 없었다.

 1623년 봄 세검정에서 칼을 갈던 김류·이귀·이괄·김자점 등이 분연히 봉기해 대궐을 장악하니 곧 인조반정이다. 조카에게 삼촌이 당한 것이다. 이들은 서궁에 갇혀 있던 인목왕후 교지를 받들어 능양군(추존 원종의 장남·능창군 큰 형)을 보위에 올리니 이가 제16대 인조다. 이후 광해군의 남은 인생 역정을 필설로 헤아려 무엇 하겠는가. 대북파 영수들은 자식들과 함께 몰살당했고 조정 뜰에는 혈해(血海)가 넘쳐흘렀다.

 분기탱천한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36가지 죄목을 언문으로 적어 사사코자 했으나 인조의 간청으로 목숨만은 부지하게 됐다. 광해군은 유배지 강화도의 나루터에 내려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몰아쉬었다.

 “내가 복위돼 저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역사는 광해군 편이 아니었다. 그 후 광해군 후손은 멸문되고 망국에 이를 때까지 인조의 후손들이 왕통을 이었다.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