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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5>선조대왕과 목릉<下>

惟石정순삼 2010. 7. 30. 08:3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5>선조대왕과 목릉<下>

인목왕후 능상의 곡장을 두른 기왓장. 풀길 없는 천추의 한이 겹겹이 쌓인 듯하다.

 

계비 인목왕후 능침에서 바라본 선조대왕릉.

다른 왕릉에선 찾아 볼 수 없는 천심수(사진 앞)가 참도 옆에서 샘솟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불혹(不惑)의 나이에 들어서면 이따금씩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아본다고 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가족이나 지인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해 줄 것인가. 생일에 잘 먹자고 이레 굶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산 자의 입에 오르내리는 난도질이 두려워서도 함부로 살 일은 아니다.

 동구릉(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내 선조대왕의 목릉 앞에 서는 참배객들 마음은 만감이 교차한다. 16세 왕위에 올라 41년을 용상에 있는 동안 편할 날이 없었던 임금 자리. 대신들 간 죽고 죽이는 사생결단으로 이 민족 역사에 당쟁이라는 정파싸움을 처음으로 태동시킨 군주. 왕조 창업 200년 만에 당한 경천동지의 국가적 재앙(임진왜란)을 알고도 못 막아낸 인군으로서의 치욕. 선조가 다시 태어나도 주상자리에 앉겠다며 명종의 청을 선뜻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선조는 서자 출신이란 신분상 약점을 극복하고 왕도교육에 열중해 학문적으로 대신들을 제압한 영명한 임금이기도 하다. 이 같은 선조의 탄탄한 내공 축적은 당시 조정을 양분해 국정을 농단하던 훈구와 척신세력을 제거한 뒤 사림세력으로 새 판을 짜는 데 결정적 뒷받침이 됐다.

 훈구파들은 개국 이래 왕실 근친과 공생공존하며 온갖 혜택을 누려 온 수구세력들로 벼슬자리를 대물림했다. 반면 척신들은 왕이나 왕비의 외척들로 객관적 실력이나 인물 됨됨이의 검증 없이 조정 요직을 독점하며 군림하던 세력들이다. 이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매관매직으로 백성들은 고혈을 짜야 했고 신고(辛苦) 또한 헤아릴 길이 없었다.

○친정권 넘겨 받고 200년 망국병 청산 작업

 임금 자리에 오른 선조는 이듬해 친정권을 넘겨받으며 200년 동안 누적된 망국병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조정 내 훈구·척신들을 축출하고 사림 명사들을 대거 등용해 권력 구조를 혁신했다. 전국 각지에 은둔해 있던 어진 선비들을 천거받아 등용하는 현량과를 부활해 한때 문치시대를 열기도 했다. 식자우환이라 했던가. 조정 안팎은 이미 전국 서원에서 배출된 선비들로 넘쳐났다. 명종 때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팔도 각지의 서원들은 요즈음의 국·공·사립학교들로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를 하겠다고 각 서원 문을 나선 식자(識者)들은 가르쳐 준 스승의 학맥을 중심 삼고 출신 지역별로 규합해 철옹성같이 뭉쳤다.

 이때 조정은 사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김효원과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 동생인 심의겸 세력으로 양분 돼 서로 간 감정의 골이 깊었다. 사람들은 김효원이 대궐 동쪽 건천동에 살고 있어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궁궐 서쪽인 정동에 집이 있다 하여 서인으로 지칭했다. 이것이 조선 후기 당파 정치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당쟁의 시초다. 이 권력의 중심에 왕심(王心)이 있었고 왕심의 향배에 따라 대신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동인은 주리철학을 가르쳐 온 영남학파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추종했고 영의정 이산해가 거두였다. 반면 서인은 주기철학을 신봉하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문하의 기호학파였으며 좌의정 정철이 태두였다. 영·호남 대결이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학맥과 인맥골격도 깊숙이 파고들면 이 당시 형성된 당쟁 구도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후일의 사가들마저 이 당시 정쟁상황을 놓고 의견이 엇갈려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끝없는 소모전으로 국력을 낭비한 붕당논쟁으로 격하시키는가 하면, 미숙하나마 의회정치의 태동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선조는 서자 출신이란 열등감에 사로잡혀 대통만은 정비 출생 대군으로 잇고자 했다. 후궁 소생의 장성한 왕자 임해군·광해군 등이 있었지만 안중에 없었다. 그래도 후궁 소생 중에는 총애하는 인빈 김씨가 낳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는 정도였다. 그 세월이 25년이었고 임금의 보령 40이었다.

 이때 동인의 이산해와 서인의 정철이 광해군을 책봉하자고 모처럼 합의해 정철이 주청했는데 이것은 이산해의 계략이었다. 신성군을 점찍었던 선조가 격노해 정철을 삭탈관직하고 유배 보냈다.

서인세력의 참담한 몰락이었다. 조정을 장악한 동인은 다시 정철을 죽이자는 과격파(이산해 이발)와 살려 두자는 온건파(유성룡 우성전)로 분열?榮쨉?이산해 집이 북악산 아래여서 북인이라 했고 유성룡 집은 남산 밑이어서 남인으로 불렸다.

○日 동태 살핀 통신사 보고 동-서인 `극과 극'

 이럴 즈음 바다 건너 왜인들의 동태가 수상했다. 일본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신흥 군부세력(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이런 내정 형편을 여러 차례 밀탐하고 돌아갔다. 기미를 알아챈 조선에서도 통신사를 보내 현지 상황을 염탐토록 했다. 1591년의 일이다.

 통신사 대표는 서인의 황윤길과 동인의 김성일이었다. 이들은 1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살펴본 뒤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 보고는 극과 극이었다. 서인 측이 “전쟁준비에 한창이니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먼저 아뢰자 동인 측은 “도요토미가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데다 전쟁 준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정세력 판도는 동인이 압도적이었다. 선조 자신도 전쟁 자체가 두려워 동인 측 의견에 솔깃한 채 국방태세를 소홀히 했다.

○ 광해군 보위 오르며 조정은 또 피바람

 이런 방심 끝에 터진 전쟁이 1592년 4월 13일의 임진왜란이다. 왜인들은 명나라를 칠 테니 군량미를 대고 길을 비켜 달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전쟁은 급박한 국면으로 촌각을 다투게 됐다. 불과 보름 만에 부산포와 충주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더니 급기야 서울마저 함락 직전에 이르게 됐다.

 선조는 명나라에 고급사(告急使)를 보내 황급히 구원병을 요청했다. 명은 조선을 버리지 않고 이여송에게 요동군 4만 명을 내주며 참전토록 했다. 이때 우리 땅에 상륙한 일본군 병력은 20만 명에 달했다. 중과부적이었다. 서울과 평양까지 유린당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란을 갔다. 압록강만 넘으면 남의 땅 중국이다. 왕이 도강하면 나라가 망하는 급전직하의 상황이다. 선조는 이여송에게 매달렸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대인을 만나게 되었소. 조선의 운명은 오직 대인에게 달렸소이다.”

 천운이 함께해 전쟁은 끝이 났다. 전 국토는 잿더미로 변해 초토화됐고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시체를 치우고 묻는 일이었다. 선조는 인목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아 또다시 적통대군 출생을 기다렸다.

그토록 원하던 대군왕자가 태어나니 영창대군이다. 조정은 또다시 서자 광해군을 폐하고 두 살 된 영창대군을 새로 책봉하자며 목숨 건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전란에 만신창이가 된 선조가 돌연 훙서하고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니 자신을 반대한 무리들을 온전히 놔둘 리가 없었다. 다시 조정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 난국에 희생된 영창대군과 계비 인목왕후 모자의 슬픈 사연은 필설로 헤아릴 수가 없다.

 선조의 목릉 정자각 앞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다. 원래 묘지 앞 외명당에 솟는 물은 천심수(天心水) 또는 융취수(融聚水)라고도 한다. 혈처를 제대로 잡아 재혈(裁穴)만 잘하면 천년향화가 끊이지 않는 명당길지라 할 수 있다.

<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